제615화
614화-연옥 (1)
[키야오오오오오!!]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초고속으로 휘둘러진 꼬리가 전방을 휩쓸었다.
앞으로 나아갔던 설천위의 병력이 단숨에 쓸려 나갔다.
[괴물이군.]
[천 년, 아니 그 이상을 묵은 괴이다. 당연한 결과지.]
현태중의 감상에 뭔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혀를 찬 손휘는 날뛰는 달기를 바라봤다.
설천위가 끝내 그 앞에 도달했을 때.
지고(至高)라는 달기의 격은 무너졌다.
자성영역(自省靈域)이란 본인을 되새겨 그 내면의 것을 꺼내는 것이다.
자아(自我)가 강할수록 영역의 힘은 강해지고, 벽을 넘는 순간 그건 힘이라는 규격을 뛰어넘는다.
권능.
주인의 의지에 따라 당연하다는 듯 세상의 법칙을 뒤틀고 순리를 부정하는 힘.
그 절대적인 힘에 맞서는 방법은 보통 다른 권능으로 맞서는 것이다.
애초에 권능을 부릴 정도의 존재들이 벌이는 싸움은 동격의 존재끼리 성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혹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권능을 부리지 못하는 존재가 권능을 부리는 존재의 영역에서 그를 상대할 때는 오로지 하나의 방법을 취한다.
어떻게든 권능의 빈틈을 찾아…… 도망친다.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게 기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권능이란 것은 존재의 격을 말해 주는 힘이다.
단순한 영력의 총량,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의 숫자, 부릴 수 있는 식령의 한계 따위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의 영역에선 맞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 상책…….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고 현실이지만.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런 상식과 현실이 깨졌다.
자신의 자성영역조차 제대로 정하지 않고 제 맘대로 휙휙 바꾸는 녀석이라 가능한 건가.
아득한 세월을 쌓아 온 권능조차 끝내 흙발로 짓밟아 버렸다.
[키야오오오!! 꺼져라!!]
날뛰는 달기의 앞발과 꼬리에 설천위의 병력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진다.
그 광경에 손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정답이다.
달기가 무슨 짓을 하든 그녀의 권능인 지고(至高)가 설천위의 흙발에 짓밟힌 순간, 달기의 패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애초에 육탄전에 익숙한 존재도 아니니 이대로 병력을 쏟아부어 힘을 깎아 내고 지친 달기의 목을 잘라 내는 것만큼 좋은 끝이 어디에 있을까.
완벽한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는 전황에 손휘가 흡족하게 웃는 순간.
“다 비켜. 너희는 저것들이나 막아.”
손가락으로 이미 힘이란 힘은 다 빠져 버린, 허울만 남은 달기의 군대를 가리킨 설천위는 성큼성큼 달기를 향해 걸어갔다.
[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이대로 힘을 빼 두기만 해도……!]
병력을 물리고 앞으로 나서는 설천위의 행동에 손휘가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설천위가 손을 휘둘러 그를 밀어냈다.
“길게 끌 생각 없어.”
짜증이 담긴 설천위의 목소리에 손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길게 끌 생각이 없다.
여태까지 조급한 행동 하나 보이는 일 없이 전투를 이끌어 온 설천위였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손휘는 관찰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길한 거군.’
술사의 감은 지독할 정도로 정확하다.
지금 설천위는 기이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근거 같은 건 없는 막연한 불안감.
망상이라고 치부해도 될 정도로 붕 뜬 불안이겠지만.
설천위의 경지를 생각하면 결코 무시해선 안 될 불안감이기도 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지금 밖의 상황은 썩 좋지 않을 거다.
짧게 이어진 생각 끝에 손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뛰어난 술사인 손휘가 입을 다물자, 다른 혼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적의 영역에서 술사들이 내린 결정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크르르르. 네놈, 무슨 생각이더냐?]
가죽이 긁히며 생겨난 생채기 사이로 흐르던 피가 보라색 연기로 화해 흩어진다.
자신의 몸에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던 달기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설천위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수법은 뻔하지 않은가?
“별거 아니야.”
으르렁거리는 달기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어깨 위로 칠흑의 팔을 불러냈다.
거대한 덩치의 달기에 맞춰, 큼지막한 흑도를 쥔 팔을 만들어 낸 설천위는 흑도로 달기를 겨누며 웃었다.
“내가 후딱 처리해 버리고 쉬고 싶어서 말이야. 그게 더 간단할 것 같기도 하고.”
[인간 놈……. 끝까지 오만하구나!]
설천위의 별거 아닌 도발에 달기는 전신의 털을 곤두세웠다.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까득!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전신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세상을 흙발로 짓밟은 저 무뢰한을 향한 분노를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었다.
[키야야오오오오오오오!!]
강렬한 포효와 함께 달기가 높이 뛰어올랐다.
“뭐,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이라고 한다면.”
밤하늘을 등지고 치솟은 달기를 올려다보며 설천위는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칭찬할 만한 점이 하나 있긴 했다.
“나를 상대로 유혹은 쓰지 않았다는 것 정도?”
쾅!!
설천위가 만들어 낸 거대한 팔, 흑완(黑腕)이 흑도를 쥐고 그대로 위로 치솟았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달기의 앞발과 맞부딪친 흑도가 굉음을 토해 내었고, 그 충격으로 건물과 대지가 마구 흔들렸다.
“통할지 안 통할지 순식간에 가늠하는 그 판단력은 매우 좋았어.”
경국지색.
나라를 뒤흔드는 미(美)를 자랑하는 달기의 주력은 당연하게도 유혹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상을 유혹해 노예로 부리는 힘.
그것을 지배의 형태로 구현해 사용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달기라는 존재의 뿌리는 대상을 유혹하는 것임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설천위를 유혹하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가슴골과 달콤한 목소리는 유혹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 본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내가 또 부동심의 상징이라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
찰나의 고민.
양심의 발악 끝에 설천위는 말을 바꿨다.
“적의 유혹에는 지지 않지.”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는 건 아니었지.
음.
시답잖은 자기평가와 함께, 설천위는 고작 몇 마디 내뱉는 동안 수백 번은 앞발을 휘두른 달기를 보며 웃었다.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한 건 훌륭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지.
콰득!
[네놈……!]
말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은밀하게 영력을 뿌려 낸 설천위가 만들어 낸 흑관들이 달기의 앞발을 속박했다.
예상치 못한 속박.
당황한 것이 눈에 보이는 달기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왜 지금은 주제 파악을 못 할까?”
콰드득!
약간의 틈을 두고 달기의 앞발을 속박했던 흑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했다.
단숨에 비틀린 앞발이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를 뿜어냈다.
[캬오오오오오오!!]
고통의 비명인지, 분노의 포효인지 모를 것을 토해 내며 달기가 몸을 비틀었다.
진하게 휘감은 영력으로 설천위의 흑관을 밀어내고 달기는 거리를 벌렸다.
‘괴물 놈……!’
안 된다.
이런 방식의 싸움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순식간에 재생을 시작해 땅에 닿을 때쯤에는 이미 형태를 다시 갖춘 앞발로 대지를 밟은 달기는 생각을 바꿨다.
분노에 몸을 맡긴 전투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차라리 여기선 술법을 사용해 놈의 빈틈을 만드는 것이…….
“그러니까 왜 주제 파악을 못 하냐니까?”
순식간에 달기의 앞에 도달한 설천위의 흑완이 그대로 달기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흑도를 쥐지 않은 왼손이 달기의 정수리를 붙잡고 땅을 향해 내리꽂았다.
쩌적!
[카흑!]
흙과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여태껏 맛본 적 없던 끔찍한 고통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달기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가 없었다.
설천위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푸욱!
달기를 붙잡지 않은 손이 그대로 흑도를 내려찍었다.
몸통을 꿰뚫는 흑도가 심장과 폐를 꿰뚫었다.
“이 영역은 네가 포기하기 전까지 유지되겠지.”
죽인다.
……이건 너무 오래 걸리고.
땅에 처박아 만들어 낸 상처는 물론이고, 흑도를 박아 넣은 상처까지 이미 재생을 시작한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도를 박아 넣은 상처는 이미 살이 엉겨 붙어 흑도를 빼내기 힘들 정도가 됐다.
지금 이 영역 속에서 달기를 죽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무한이 공급되는 영력은 달기가 부리는 부하들만이 아니라 그녀 본인에게도 불사를 부여했으니까.
그러니.
“네가 스스로 이 영역을 해제하고 싶도록 만들어 주마.”
고통은 익숙하지 않겠지.
정신력이 강한 것과 별개로 고통에 익숙하지 않다면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거든.
[키야아아오!]
날뛰는 달기의 머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려서 다시금 땅에 처박았다.
흑완이 쥔 거대한 흑도는 달기의 몸통을 꿰뚫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사지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육체를 휘감은 영력이 약해지고, 그 방어가 무뎌지는 것과 함께.
[키아아오! 캬아오오!!]
달기의 비명은 점점 더 비참하고 구슬프게 변해 갔다.
[지독한지고.]
설천위가 흑도에 패기를 이용한 낙인까지 담아 그 혼까지 함께 고문하고 있음을 깨달은 손휘가 혀를 찼다.
아니, 도시를 멸망시킨 악귀한테도 저런 짓은…….
‘흠, 그보다 더한 괴이이니 해도 되는 건가?’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냉철한 이성주의자인 손휘는 설천위의 행동이 꽤나 타당할지도 모른다며 홀로 납득하고 있던 그 순간.
[그, 그만! 그만!]
드디어 달기가 항복을 선언했다.
흑도에 의해 잘려 나갔어야 할 다리가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설천위의 흑완에 짓눌려 있던 거대한 여우의 머리가 사라졌다.
단숨에 작아진 인간의 모습으로 설천위의 손에서 빠져나간 달기는 양손으로 땅을 짚은 상태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보, 본녀가 졌느니라…….]
넝마 수준밖에 남지 않은 옷.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살결.
헤집어진 머리와 피를 뚝뚝 흘리는 입가.
안쓰럽다는 감정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처량한 모양새였으나.
“말과 행동이 다른데.”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단숨에 달기에게 접근해 그 머리를 짓밟아 버린 설천위는 이번엔 직접 손에 쥔 흑도로 달기의 왼팔을 날려 버렸다.
[꺄아아아아악! 네놈! 네놈! 항복한다 하지 않았더냐!]
“항복했다면, 이 영역부터 해제했어야지.”
분명 스스로 영역을 해제할 때까지라고 했지?
싸늘한 눈으로 달기를 내려다보던 설천위가 그 머리를 더욱 거세게 짓눌렀다.
[해제, 해제하마!]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터트려 버리려 하는 발짓에 달기는 다급하게 외쳤다.
죽지는 않겠지만, 아마 처참한 몰골이 되어 놈 앞에 뒹굴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재생되면? 또다시 반복.
고작 놈을 자신의 영역에 붙잡아 두기 위한 대가로는 너무 혹독한 희생이다.
마침내 항복한 달기가 손을 휘저었다.
영역이 무너진다.
대지가, 하늘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너무 늦게 나왔어. 우리 언니.”
히죽히죽 웃는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회수한 혼들이 설천위에게 돌아온다.
단숨에 허공에 떠오른 설천위는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언여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저 멀리서 놀란 듯 일어서는 백유와 유예린이 보였다.
그 둘을 똑바로 바라본 순간.
“언여휘……!!”
분노로 타오르는 설천위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언여휘가 환하게 웃었다.
“천위! 천위!! 선택해!”
언여휘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에 보이지 않게 새겨 놓은 술식들이 강렬한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 빛은 단숨에 달기를 집어삼키고, 저 지하에 처박혀 있는 구복을 집어삼켰다.
태곳적부터 있어 온 존재 둘과 인간의 몸으로 그들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을 제물로.
“세상을 구할지! 네 연인을 구할지!!”
언여휘는 연옥을 향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