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4화
613화-마지막 준비 (8)
“흐흥 흐흥~ 꽤나 버거워 보이네?”
콧노래를 부르며 갈라진 자신의 피부를 쓸어내리는 언여휘.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에 결계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 살존은 마찬가지로 여유로운 웃음으로 대꾸했다.
“조금 몸이 가벼워진 것뿐이야.”
“꺄하하하! 당신 많이 여유로워졌네? 딸아이가 건강해진 탓일까?”
예전에는 부드럽긴 했어도 조급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정도로 훌륭하게 여유로워졌을 줄이야.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인 언여휘는 자신을 가둔 결계에 또 한 겹을 추가했다.
벌써 몇 개째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애초에 기억할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쌓아 올린 것도 그래서였고.
웬만한 적이라면 깨지는 것과 깨질 것을 고려해 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결계를 짰겠지만…….
‘이 인간들을 상대로 그건 사치지.’
눈앞에 있는 괴물들을 상대로는 그만한 사치가 없었다.
효율?
깨진 것과 깨질 것을 헤아릴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많은 결계를 만들어 내는 게 옳았다.
어차피 무슨 수를 쓰든 결계는 깨질 텐데,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하나라도 더 설치해서 깨져도 상관없는 결계를 만드는 게 낫지.
그러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언여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의 앞에 선 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 비틀린 미소에 살존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그럼, 여기서 대화가 통할 만한 상대가 달리 누가 있겠어? 너 말고 팔팔한 인간이라곤 쉰내 나는 남정네들뿐인데.”
“사존이야 홀아비 냄새가 나긴 해도 북존은 아닌데?”
“……헛소리할 시간에 손을 움직여라.”
“사실인 걸 어떻게.”
사존의 낮은 목소리에 코웃음을 친 살존은 북존의 손이 묘하게 가벼워진 것 같다고 느끼며 단검을 움직였다.
카각!
결계에 박힌 칼날이 비틀린다.
솔직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자신의 모든 기예는 암살(暗殺)을 위해 갈고닦은 것들이다.
눈은 물론이고, 코와 귀 그리고 입과 손발까지.
모두가 암살만을 위해 단련되어 극한에 이른 상태다.
눈은 적의 치명적인 빈틈을 찾아내고.
코는 완벽한 일격을 위한 호흡을 유지한다.
귀는 사방의 모든 정보를 보지 않고도 읽어 낼 수 있고.
입은 뱉어낼 수 있는 암기와 독을 품고 있다.
손발은 말할 것도 없이 얻어 낸 모든 정보를 암살로 이어 갈 수 있도록 실천력과 순발력을 지니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살존의 오의는 암살의 극(極)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단검이 몇 번이고 막히고 있었다.
고작 술사가 만들어 낸 결계 따위에.
아무리 자신이 영적인 소질이 부족하다고 해도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결계의 틈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감이 무뎌지진 않았을 터.
실제로 몇 번이고 그렇게 결계를 부쉈다.
그런데, 점차 그것이 통하지 않는 결계가 늘어나고 있었다.
사존이나 북존과 교대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이 이리도 고전하고 있다는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사존과 북존이 계속해서 부활하는 괴이와 인형들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은 언여휘의 본체를 타격하는 이 구도에서 자신의 무능은 곧 아군의 패배로 이어진다.
가볍게 단검을 튕겨 역수로 바꿔 쥔 살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여휘의 농담에 어울려 줄 정도로 여유를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언여휘의 힘을 끊을 준비를 사전에 해 놓았다고 한들 이 넓은 제도에서 그것이 빠르게 완료될 리가 없었다.
그 젊은 중이 활약해 준다면 조금 시간이 빨라지겠지만, 어찌 됐든 이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 터.
즉, 어떻게든 힘의 공급을 받고 있는 언여휘의 방어를 뚫어낼 필요가 있었다.
공급이 더뎌지면 방어의 재생도 더뎌질 테니, 방어가 완전히 사라진 틈이 언여휘의 목이 날아가는 순간이 될 거고.
날카로운 눈으로 언여휘의 결계를 훑으며, 살존은 단검을 휘둘렀다.
“흐음.”
말로는 자신의 장난에 어울려 주면서도 눈과 손만은 냉철하게 움직이는 살존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언여휘는 결계를 또 펼쳤다.
언여휘가 결계를 펼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언여휘의 시야에서 살존이 사라졌다.
완벽한 소실.
마치 애초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모습은 물론이고 떨림과 소리, 체취 등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기척마저 사라졌다.
저 밑에 있는 유예린의 은신도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살존의 것은 그 수준이 남달랐다.
유예린은 숨기는 것에 집중한 느낌이라면…….
콰득!
이쪽은 죽이는 것에 집중한 느낌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궤도에서 파고든 단검이 단번에 결계를 부순다.
동시에 반응한 언여휘의 결계가 그 단검을 가로막았다.
완전히 허공에 멈춘 단검을 인지한 순간, 언여휘는 싸늘한 감각에 즉시 고개를 들었다.
카가가가가각!
머리 위로 펼쳐 놓은 두터운 결계가 단숨에 연달아 박살이 났다.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온 단검의 뾰족한 칼날을 바라보며 언여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살수 아니랄까 봐.”
정말 죽이기 위해선 모든 걸 하는구나?
자주 쓰는 단검 정도는 우습게 미끼로 던져 주기도 하고?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인 언여휘는 순식간에 중첩되는 결계로 살존을 휘감았다.
잡히면 안 된다.
그것을 직감한 살존이 훌쩍 뛰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결계를 빠르게 펼친다고 해도 귀신같은 감에 의존해 빠져나가는 살존을 붙잡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꿈이었나.
부드럽게 빠져나간 살존을 바라보던 언여휘는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정말 즐거워. 이 몸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모양이지?”
불치병을 앓는 천재가 현실을 비관하다가 끝내 그릇된 방법으로 회복을 꾀한다는 이야기는 그리 드문 이야기도 아니었다.
무림에서는, 그것도 특히 사파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타인의 생명을 흡수하는 무공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미쳐 버리는 인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희망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면 몰라도 가능할지도 모르는 비술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만큼 제대로 미쳐 버린 종자들이 그쪽으로 빠지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몰골은 치료의 부작용인가?”
그 결말도 대부분 비슷했고.
아니, 비슷하다기보다는 백이면 백, 거의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파멸.
살육은, 그것도 인간을 제물로 삼아 자신을 보신하려는 행위는 사파에서조차 금기시하는 죄업이다.
그렇게 쌓인 죄업은 마음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다는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심한 경우 토벌대가 조직되고, 흔하게는 살수가 고용된다.
살존으로서 몇 번이나 그런 살업을 진행해 봤으니 확실했다.
그런 의뢰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했고.
뒷맛이 깔끔하니까.
그렇기에 살존의 예측은 꽤나 타당했고, 살존은 그것이 언여휘를 자극하길 바랐다.
저런 류의 범죄자는 대체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기질이 있으니, 말로 긁어 주는 것만으로 꽤나 정신이 요동치는 법이니까.
“치료의 부작용? 아아, 아니야, 아니야. 이건 반대.”
“……반대?”
반대라고?
순간, 미간을 찡그렸던 살존은 이내 반대라는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언여휘는.
“치료를 해서 이 정도인 거야. 노화라는 게 참으로 막기 힘들더라고.”
수백 년을 살아온 노괴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쇠약해지고 질병은 쌓인다.
대해와 같은 영력으로 육체를 다듬고, 긴 세월에 걸쳐 쌓은 영약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그 뿌리가 술사이기에 육체의 한계를 넘는 일은 언여휘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름진 피부를 팽팽하게 늘리긴 했지만, 그 반대로 갈라지고 곰보가 되었다.
하얗게 물들던 머리의 생생한 검은색을 유지하는 대신 듬성듬성 빠진 몰골이 되었으며.
삐걱거리는 관절을 지킨 대신에 근육은 삐쩍 말라비틀어져 일상생활에 필요한 근력조차 부족해져 버렸다.
힘을 잃어 가던 심장에 다시금 힘을 불어넣는 것을 대가로, 이제는 액체 정도밖에 먹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수많은 부위들의 일부가 망가지는 것을 대가로 겨우 그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 왔다.
망가져서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기능 이외의 것을 대부분 상실한 팔을 흔들며 언여휘는 웃었다.
“병 같은 게 있었다면 이렇게 버티지도 못했지~. 젊은 날의 나는 아주 건강했다고!”
흠!
콧김을 뿜어내며 깡마른 팔을 툭툭 치는 언여휘.
그 모습에 살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이 짓을 하는 이유는 대체 뭐냐?”
“응? 뭐가?”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지만, 언여휘를 자극할 수 있다면 뭐가 됐든 좋지.
대화를 이어 가기로 마음먹은 살존은 두 눈으로는 끊임없이 결계의 빈틈을 찾으며 입을 열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딱 보아하니 웬 잡신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딴 짓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다.”
“으으응?”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언여휘는 살존과 주위를 쓱쓱 둘러본 뒤에야 ‘아.’ 하는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이냐고?”
“그래.”
“에이, 난 또 뭘 묻나 했네. 흐음, 그에 대한 답은 너무 간단해서 그냥 말하면 재미가 없는데…….”
고민하듯 턱을 잡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던 언여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단한 문제를 내기로 할까? 너도 그게 좋겠지?”
마치 이쪽의 속내를 안다는 듯 웃는 언여휘의 미소에 살존은 마주 웃었다.
“광인의 넋두리를 듣는 건 처음이지만, 얼마든지.”
살존의 대답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흘린 언여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위에는 뭐가 있을까? 하늘? 신? 해? 달? 대체 뭐가 있을까?”
의문을 쏟아 내며 언여휘는 이번엔 손가락으로 대지를 가리켰다.
“저 아래에는 뭐가 있을까? 흙? 악귀? 지옥? 용암?”
이번에는 그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 안에는 뭐가 있을까? 인간? 영혼? 아니면 살덩이?”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언여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답은 하나야. 나. 오직 나만이 이 안에 있지.”
“……문제를 내는 재능은 없는 것 같네.”
왜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는 거야?
살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언여휘를 바라보자, 언여휘는 더욱 크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꽤나 힘든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답이라고? 그렇게 반응하면 섭섭하지.”
“대가? 무슨 대가?”
“확신이 없어서 나와 피로 이어진 소중한 가족들을 하나하나 헤집어 본 뒤에야 확신을 얻을 수 있었지.”
진주언가의 참사.
언여휘가 그 참사를 일으켰던 이유를 알게 됐음에도 살존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광인이군.”
“끄흐, 맞지. 맞아. 그러고 난 뒤에 평범하게 미쳐서 평범하게 노괴가 되어 악귀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산속에서 늙어 죽었을 거야.”
히죽히죽 웃으며 언여휘는 당과를 꺼냈다.
“그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혈패황.
본디 이름 없는 무인이었던 사내.
아는 사람만 아는, 적당히 자신의 강함을 숨기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사내.
그 모든 것이 짓밟혔을 때, 사내는 신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얻었다.
“나도 조건을 충족했다고 생각했지.”
가족을 잃었고, 재능도 충분했다.
하지만.
“닿지 않았어.”
완벽에 가까웠던 그 사내조차 길고 긴 싸움 끝에 결국 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제천대성이라는 무신(武神)에게는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라도 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온전한 나는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 걸까?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나는? 응?”
신(神)이 되면 된다.
광기로 가득한 언여휘의 눈동자에 살존이 미간을 찡그렸다.
“말에 맥락이 없다. 언여휘.”
“응. 그래도 너는 답을 알고 있잖아?”
기이한 답.
그러나 언여휘의 물음에 살존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광인의 넋두리.
그래.
언여휘는 자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스스로가 광인인 것을.
문제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광인에게 논리와 인과를 기대하면 안 되지.”
웃으며 양팔을 뻗은 언여휘가 웃음 짓고.
그 순간 본능적으로 달려든 살존의 단검이 십수 개의 결계를 찢어발기고 그 몸에 닿았다.
“너무 늦게 나왔어. 우리 언니.”
언여휘의 어깨에 단검을 꽂아 넣는 살존의 눈에 언여휘의 등 너머가 들어왔다.
무너지는 검은 영역.
‘……설천위!’
달기의 자성 영역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