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3화
612화-마지막 준비 (7)
“형님!”
주현운의 외침과 함께 구복을 붙잡고 있던 철백이 몸을 비틀었다.
“흐아아아압!!”
괴성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허리를 비튼 철백이 구복의 몸을 잡아당겼다.
억지로 구복의 몸을 휘두르듯 잡아당긴 철백의 등이 땅에 닿을 듯 휘었다.
정확하게 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는 철백의 기예에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힘이 합쳐져서 그대로 철백에게 이끌린 구복이 다시 자세를 고치려는 그 순간.
서걱!
귀신같이 달려든 주현운의 참격이 구복의 일부를 잘라 냈다.
꾸륵!
절단해 분리해 내고 몇 초 지나지 않았음에도 꿀렁이는 소리와 함께 절단면이 요동친다.
‘더 빨라졌군……!’
그것이 재생이 시작되는 징조임을 이미 몇 번이나 보아서 알고 있는 주현운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베어 내고, 쳐 낸다.
잘라 낸 길쭉한 팔을 세 토막으로 나눈 뒤 그 파편들을 쳐 내 날려 버렸다.
연화가 있는 곳으로.
“흡!”
주현운이 날려 보낸 파편 아래.
미리 자리를 잡고 서 있던 연화는 양손을 위아래로 벌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술식이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태평(太平) 태청(太淸)……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무아지경에 빠져 온갖 것이 뒤섞인 말을 뱉어내는 연화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완전한 무아(無我).
스스로를 잊고 오로지 지금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한 연화는 여태껏 없었던 속도와 깊이로 술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크르르르르르!]
짐승처럼 우는 괴연천식이 연화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편을 집어삼켰다.
쿵! 쿵!
사람의 손바닥만 한 송곳니가 가득한 검붉은 연기의 짐승이 집어삼킨 살점을 씹어 삼킨다.
뼈와 육체가 부서지고 찢기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지금 그 소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버텨……!’
연화가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싸움의 행방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이미 열 번 넘게 신체를 잘라 냈음에도 구복의 힘은 크게 줄어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연화가 몇 번이나 더 구복의 일부를 집어삼켜야 할지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지금 연화의 상태는 어떤가?
설천위에게 받은 혈주의 힘을 품어 더욱 강력해진 괴연천식은 마치 자아라도 가진 듯 마구 요동치고 있었고, 연화는 그런 괴연천식을 제어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유가 없었다.
괴연천식의 폭주는 거셌고, 연화의 역량은 그것을 온전히 억누를 수 있는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천위가 가장 늦게 찾은 인재.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과는 발전에 들인 시간 자체의 차이가 너무 컸다.
까득!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늦게 배운 연화가 저리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절망감에 소윤혜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절망은 감정이고 현실은 비정했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연화의 부담을 덜어 주는 유일한 방법은 연화가 저 괴물을 온전히 흡수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내해야만 했다.
연화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저 괴물을 약화시키기를.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자신의 일격이 저 괴물에게 닿을 수 있는 수준까지 저 괴물이 약화되기를.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손에 힘을 풀고.
전신에 가득 차오르는 긴장을 풀어내고.
최고의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서.
기다려야 한다.
소윤혜가 억지로 턱에 힘을 풀고 스스로를 다스리던 그때, 주변 모두의 예상대로 연화는 죽을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키아아아악!]
[캬아오오!]
머릿속에 넘치는 것은 짐승들의 포효다.
손발을 묶는 것은 짐승의 본능이요,
육체를 뜨겁게 달구는 것은 짐승의 욕망이니.
피와 살결을 갈구하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를 억지로 다스리며 연화는 끝없이 주언을 읊었다.
형식이 정해진 건 아니다.
그저 지금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그와 맥락이 맞는 말들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 읊고 있을 뿐.
도교, 불교, 유교 가리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말이 있다면 꺼내어 되새겼다.
인세의 역사와 함께 쌓인 모든 깨달음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도저히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고통스럽나?
아니.
아니다.
고통 따윈 없었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고통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쾌락.
피와 살결을 갈구하는 본능이 만들어 낸 쾌감이 흥분으로 변해 육체를 미친 듯이 달구고 있었다.
짐승으로 가는 길.
그 길에 고통 따위는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버렸기에, 연화는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어째서 축생도(畜生道)가 설천위가 경계하던 삼계(三界) 중 하나인지.
지옥도, 아귀도와 한데 묶여 어째서 지옥 중 지옥이라는 것인지.
이 축생도의 형벌은…….
‘망아(忘我)……!’
자신을 잃는 것이다.
본능과 욕망, 쾌락에 빠져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망자(忘者)가 되는 길이었다.
망자(亡者)가 아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축생도의 형벌이자, 그곳이 지옥의 일부가 된 이유였다.
축생도와 융합한 구복을 흡수하는 것으로 연화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마치 마약에 빠져 스스로를 잃고 그것만을 찾게 되는 것처럼, 축생의 힘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의 쾌락에 빠져 육체가 망가지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약은 개인 하나만 망치지만.
‘버텨야 해……!’
축생도에 빠진 자신이 폭주하면 한두 명 죽는 수준으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혈주의 힘까지 머금은 자신의 괴연천식이 축생도의 힘을 품고 폭주하면?
‘……못 막아!’
설천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나마 설천위가 있으니 끝은 있겠지만…….
그전까지 대체 몇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을까?
혹은 자신의 손에 살결을…….
음, 그건 하나뿐일까?
머릿속에 든 삿된 생각에 살짝 흔들릴 뻔했던 연화는 휙휙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육체의 감각이 되돌아온다.
완전한 무아에 빠져 힘을 다스리던 것이 깨졌다.
‘욕망 때문에!’
그것을 삿된 욕망 탓으로 돌린 연화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집중했다.
일단 지금 해야 할 건 괴연천식의 통제다.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무아가 깨져 버렸으니 다시금 무아에 들기 전에 다시금 괴연천식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 괴물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자신이다.
혈주의 힘마저 흡수한 자신이다.
전부를 흡수한 것도 아닌데, 거기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을 리가 없지 않은가.
완전히 상념에서 벗어나 부릅뜬 두 눈으로 세상을 인지했다.
일단, 괴연천식부터…….
[크르르르르르.]
사람 손바닥보다 큰 송곳니.
한 가닥, 한 가닥 억세 보이는 꽤나 풍성한 털.
칠흑의 배경에 금색의 선이 그어진 눈동자.
질척한, 탁한 피를 침처럼 흘리는 주둥이.
‘응. 무리 같은데.’
연화는 깨달았다.
이건 자신이 알고 있는 괴연천식이 아니라고.
설천위의 패융처럼.
자신의 힘에서 태어난 무언가라고.
설천위의 패융과 다른 점은 자신은 이 아이의 부모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 정도?
[크르르르……!]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는, 전체적으로 늑대의 형태를 한 괴물의 으르렁거림에 연화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술식?
죽음의 공포 앞에 본능과 욕망이 살짝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연화는 손을 뻗었다.
“ㅉ, ……쫑쫑?”
아, 이게 아닌가?
너무 당황해서 괴물을 향해 지금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손짓을 했던 연화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뭐가 있지?
저 거대한 주둥이가 덥석 물면 나는 그대로 토막 나겠지?
아아, 운주랑 더 놀고 싶었는데.
진짜 이름은 주운이려나?
진짜 걔가 황제일까?
일이 다 끝나고, 어떻게 보지?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일이 끝나면 헤어질 테니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미련이 남았고.
“아…….”
미련은 깨달음이 되어 찾아왔다.
인간도 결국 동물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도, 본능도 있는데.
그저 꾹 참고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사회를 위해.
타인을 위해.
그렇다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나라는 인간은.
나라는 동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꽈악!
주먹을 움켜쥔 순간, 연화는 앞으로 나아갔다.
“앉아.”
[크르르르르……?]
대뜸 앉으라고 하는 연화의 행동에 짐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자아조차 희미한 짐승이 본능에 자신을 맡기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선 눈앞의 인간을 물어뜯어야 한다.
짐승이 살기를 품은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반응했다.
연화의 상태가 이상해 구복의 사지를 잘라 내던 것을 멈춘 주현운은 물론이고, 마지막 일격을 위해 힘을 아끼던 소윤혜까지.
그들의 시선이 단숨에 짐승을 포착한 그 순간.
“앉으라고.”
덥석, 연화의 손이 짐승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깨갱!]
찍어 눌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주현운과 소윤혜는 손에 힘을 풀었다.
상식적으로 연화가 저런 거대한 존재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앉아.”
되찾은 거다.
괴연천식에 대한 지배를.
놈의 힘을 묶은 뒤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는 놈을 찍어 누른 거다.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연화의 눈빛을 느낀 짐승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반항하기 위해서.
조금 전까지 자신을 채우던 그 힘을 되찾기 위해서.
짐승이 연화의 머리통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그 순간.
“앉아.”
[끼잉!]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두 눈과 마주한 짐승은 고개를 숙였다.
코를 땅에 박고, 자신의 욕망을 꺾었다.
이길 수 없다.
직감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저 눈동자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욕망과 본능을 받아들인 연화의 몸을 타고 축생의 힘이 흐른다.
그 힘이 익숙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구복은 되레 그 힘에 영향을 받아 존재가 틀어졌지만, 그 힘이 낯선 인간인 연화는 되레 선명하게 그 힘을 인지하고 온전히 자신의 손안에 쥐었다.
물론, 구복이 쥔 것과 그 총량은 달랐으나.
“계속해 주세요!”
그것도 머지않아 같아질 것이다.
연화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철백과 주현운이 움직였다.
다시금 구복을 흔들고 빈틈을 만들어내 구복의 일부를 끊어 냈다.
그리고 그 일부를 연화가 집어삼킨다.
그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후우우.”
있는 힘을 다해 힘을 빼고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소윤혜의 일격이 마침내 구복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땅속에서의 전투는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흐음, 저쪽은 슬슬 끝을 향해 가고 있네. 생각보다 더 잘해 주고 있네.’
황궁이었던 곳의 하늘 위.
그곳에 서서 발아래로 짧게 시선을 줬던 언여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잘해 주고 있는 건 좋았지만, 계산보다 더 잘해 주고 있는 건 문제였다.
‘너무 고집을 부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슬쩍 달기가 있는 영역을 살피던 언여휘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방식이야 무슨 상관인가.
그 끝에만 제대로 도달하면 되지.
웃음을 머금고, 언여휘는 손을 뻗었다.
자신을 향해 파고들던 살존의 단검을 결계로 막아내고 동시에 지독할 정도의 저주를 쏘아 냈다.
그 기세를 느낀 살존이 몸을 살짝 비트는 순간, 공중에서 터진 저주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에 반응하는 오존과 성화린.
개인을 지키는 오존과 달리 환자와 약자를 지키고 있는 성화린은 저주가 퍼지는 범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였다.
“후후후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도, 너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