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2화
611화-마지막 준비 (6)
“나는 패도(覇道)를 걷는 광인이니.”
앞으로 나아가며, 설천위는 손을 뻗는다.
“이 끝에 나는 세상의 절대자로 기록될 것이다.”
완전히 뻗은 그 손에 천하패도의 칼이 잡힌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망자들이 대지를 향해 쏟아진다.
먹어 치우고, 짓밟는다.
[천한 것이 감히!!]
설천위가 만들어 낸 패도의 영역이 자신의 공간을 짓밟는 광경에 달기가 노성을 토해 낸다.
분노로 가득 찬 달기의 외침에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달기라는, 역사에 아로새겨진 존재가 만들어 낸 하나의 세상이 흔들린다.
그그그그긍!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다른 건물에 쏟아지며, 굉음이 울려 퍼진다.
까득!
이를 악문 달기의 눈에 요동치는 공간의 비틀림이 훤히 보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건물들 중 고작 하나가 무너졌을 뿐이지만, 고작 건물 하나가 무너졌다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천박한 놈……!’
무너진 건물 위로 자신이 만들어 낸, 자신의 땅이 뒤틀린다.
정복.
말 그대로 놈이 자신의 땅을 정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백성들을 잡아먹고, 그 대지를 흙발로 짓밟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것을 저런 천것이 짓밟는다는 것이, 때가 낀 더러운 손으로 움켜쥐려 한다는 것이.
[선을 넘는구나……!]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속이 뒤틀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곧 그녀의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본래도 어두웠던 하늘이 더욱 검게 물들고, 치솟는 분노를 머금은 듯한 벼락이 무섭게 번쩍인다.
요동치던 벼락이 떨어지고, 설천위가 불러낸 군세 곳곳에 새까맣게 탄 재가 흩날렸지만.
“발버둥을 치는구나.”
설천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요동친다는 것은 달기가 그만큼 위협을 느꼈다는 말과 같았다.
본래 달기의 영역(靈域)을 공략하는 방법은 이것과 다르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방법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해결만 하면 되지.
짓밟고 찢어발겨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술식으로 영역을 해제하거나 달기에게 지배당하는 존재들을 깨우거나.
그런 귀찮은 과정 없이 그저 짓밟는 것만으로 해결된다니.
이 얼마나 쉬운 일이란 말인가.
콰득!
앞으로 나아가는 설천위의 발아래로 비쩍 마른 병사의 손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설천위에게서 흘러나온 망자들이 발버둥치는 병사를 집어삼켰다.
흩어지는 망자를 짓밟으며 설천위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달려드는 장수를 베어 넘기고, 발버둥치는 병사들을 짓밟는다.
그 전진엔 막힘이 없었고, 그런 그를 붙잡기 위해 공간이 뒤틀렸다.
달기의 영역이 만들어 낸 권능.
인간의 머리를 억지로 짓누르는 지독할 정도로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힘이었다.
만인이 자신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달기의 정신은 자신을 향해 날붙이를 들이미는 오만한 인간을 짓눌렀다.
[인간 따위가 나와 같은 영역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까득!
이젠 숨길 생각이 없는지 노골적으로 짓누르는 힘이 설천위의 발을 흙 속에 처박았다.
압도적인 힘.
이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운, 불허(不許)의 권능이 설천위를 짓눌렀다.
육체를 넘어 혼 자체를 짓이겨 비틀어 버리려는 그 힘 앞에서.
“흐하하하하하하하!!”
설천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육체와 혼을 짓누르는 압력에 삐걱대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 설천위는 흙 속에 처박힌 발을 꺼내 앞으로 내디뎠다.
쾅!!
설천위의 발을 중심으로 터져 나간 패기가 달기의 압력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가득 메운 건물들을 뒤흔들었다.
달려드는 위호의 턱을 움켜쥔 설천위가 그대로 위호를 찢어발겼다.
당연하다는 듯이 위호를 찢어발긴 그 순간.
설천위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버린, 공격을 흘려 내는 몸짓.
어깨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을 당연하다는 듯 흘려 내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짜, 겁나 꼴사나운데?”
저 멀리, 앞발을 휘둘러 참격을 날린 달기를 바라보는 설천위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반대로 달기의 눈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 * *
지켜보기만 했던 달기가 움직이긴 했으나, 전투의 흐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설천위는 돌파하고, 달기는 막는다.
단지 달기가 막아 내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에 원거리 공격이 추가됐을 뿐이다.
물론.
카가가가가각!
그 말도 안 되는 영력을 담은 일격이 고작 추가됐을 뿐이라는 말로 끝낼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녔지만.
날아오는 참격을 쳐서 날려 버린 설천위는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에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 세월이 어디 가진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로 농밀하고 묵직한 공격이라니.
발톱 끝에 응축시킨 영력을 앞발을 휘두르는 것에 맞춰 강하게 쥐어짜는 조악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참격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진짜였다.
마치 물을 초고압으로 쏘아 내는 듯 만들어 낸 칼날처럼.
단순함을 압도적인 힘으로 극복해 낸 위력이었다.
“왕을 자처할 만큼은 되네.”
저 참격이 끼어드는 것으로 이쪽의 전진이 크게 더뎌졌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복은 멈추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짓밟을 때까지.
달기가 날려 대는 참격을 쳐 내고 흘려 내면서 전진하는 설천위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짓밟았다.
달기가 일으킨 병사들부터 달기가 세운 건물들까지 모조리 그 발아래 짓밟았다.
밟고 또 밟아서.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건물이 잔해가 되어 바닥에 깔렸다.
[부숴라!!]
[영역 자체를 무너트려야 한다! 적과 환경을 가리지 말고 파괴해라!]
설천위의 힘을 받아 실체화해 날뛰는 혼들 속에서 손휘는 정확한 지시로 병력을 이끌었다.
[나란 천재는 지휘에도 재능이 있군.]
[헛소리 그만해라. 이런 형태의 군대가 아니었다면 네 말은 귓등으로 안 들렸을 테니.]
자아도취에 빠지는 손휘를 보며 혀를 찬 현태중은 검을 휘둘러 눈앞에 있는 건물을 무너트렸다.
이 군세가 지나갈 정도의 길을 만들어 내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파괴하고 있었기에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저 달기에게 언제쯤 도달할 수 있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달기의 영역을 파훼하는 방법이 뭔지 알았고 그것이 지금 통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달기에겐 있고 이쪽에겐 없는 게 있었다.
여유.
외부의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끈질기게 이 싸움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 설천위에겐 없었다.
당장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니까.
물론 쉽사리 무너질 전력이 아니니 설천위도 일단은 그들을 믿고 이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까지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조급함은 전장의 독이었기에 구태여 달기를 비웃으면서까지 자신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대견했다.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 단단한 부동심을 품었는지.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지만, 그렇기에 이어진 생각은 현태중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 주었다.
지금 이 전장엔 설천위가 지배한 모든 혼들이 나와 있다.
조급함을 억누르기 위해 전력을 쏟아 낸 것이겠지.
그런데.
그런 상황임에도.
‘천마 어르신만 없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전력이 될 수 있는 존재이거늘.
오로지 이 전장에 그만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현태중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 전장에 선 화경급 고수가 몇이고, 일류 이상의 고수가 몇이던가.
손휘라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걸출한 술사까지 있다.
그런데도.
천마는 이곳에 없었다.
지금 여유라곤 없는 설천위가 천마를 부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천마를 불러낼 정도의 여력이 없다는 소리다.
그를 불러 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천마 어르신 하나가 이 군대보다 더 강하다는 건가.’
그런 결론이 나왔다.
아니, 정복이라는 형태의 싸움 방식 때문에 구태여 한 명의 절대 강자보다 다수의 병력을 불러낸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이란 고수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약자들이 벌이는 행위이니까.
싸움의 방식을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직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들이 불려 온 것이 아니란 것을 현태중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자 지금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일 뿐이란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기에.
[나아가라!!]
현태중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죽은 뒤.
악귀가 되어 이승에 못 박혀 있던 자신을 꺼내 남아 있던 한마저 풀어 준 제자이자 주인을 위해.
[전진!!]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짓밟으리라.
* * *
들이닥치는 군세.
무너지는 건물.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력.
달기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저 절망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뿐이었다.
자신이 아득한 세월을 거쳐 쌓아 올린 대지가 무뢰배들의 발에 짓밟힌다.
치욕.
자신의 얼굴에 대놓고 침을 뱉는 것 같은 지독한 모욕에 달기의 눈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식어 버린 상태였다.
감히.
감히.
감히.
감히……!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몇 번이나 발톱으로 참격을 날린 통에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진 몸동작으로 다시 한번 공격을 쏘아 냈다.
공간을 가르며 나아간 일격이 놈에게 닿는다.
카각!
기이하게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참격의 방향이 변한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 흘려 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촤악!
달기의 볼을 타고 흐르는 피가 찌릿한 통증을 안겨 줬다.
붉은 피가 털에 밴다.
짐승의 주둥이가 들썩이며, 으르렁거리는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분노.
분노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거늘.
쿵!
“이 정도 거리면 되돌리는 것도 되네?”
내 착각이었구나.
묵직한 걸음과 함께 똑바로 허리를 펴는 설천위와 달기의 두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희미하게 흐트러진 숨소리를 들으며, 달기는 고개를 들었다.
무너지고 부서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불러낸 장수와 병력이 망가지고 짓밟혀 바닥을 기었다.
자신이 부여한 불사로 어떻게든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것들 위로 설천위의 군세가 내지른 날붙이가 틀어박혔다.
무너진 건물을 밟고, 그 위에 선 군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 군세가 자신의 힘을 갉아먹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껏 진정시켰던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인간.]
분노를 토해 내는 것은 아직이다.
[네놈의 힘. 마(魔)의 것이냐?]
마(魔).
수많은 의미가 있지만, 설천위는 달기의 물음을 듣자마자 그녀가 말하는 마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그래.”
그렇기에 긍정했다.
이 힘은 인간으로서 하늘에 닿았던, 천마(天魔)의 힘이니까.
그에게 배운 힘이니까.
……생각해 보면 혼원패공을 배울 때 마교의 유산 같은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뭐, 천마신공이랑 교체되며 마교의 것이 아니게 된 건 맞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사기당한 것 같기도……?
달기의 물음에 이어진 잡생각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뭐,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그럼, 목은 잘 닦아 놨냐?”
이 싸움을 얼른 끝내야지.
모든 병력이 짓밟히고 혼자 남은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목을 내어주는 것밖에 없으니.
물론.
그건 황제가 인간일 때의 기준이긴 하다.
[오만하구나. 설령 네 힘이 마(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사나운 기세가 달기의 몸 전체에서 치솟는다.
농밀하다는 수준을 넘어 숨을 틀어막는 살기와 영압.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듯 기세를 뿜어내는 달기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영역(靈域)의 근간(根幹)이 깨진 지금,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이 아니면 뭐? 목을 자르면 끝나는 건 똑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