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9화
608화-마지막 준비 (3)
저주.
설천위나 백화단주, 연화는 잘 쓰지 않지만, 의외로 술사들이 흔히 쓰는 술법 중 하나다.
특히, 만귀단처럼 식령을 부리는 것을 주력으로 삼는 술사들은 거의 필수로 저주를 익힌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의 주력을 담당하는 식령을 돕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저주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약화시키는 건 물론이고, 자잘한 타격을 계속 쌓는 것으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 저주를 익히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거기다 악령들에게도 효과가 발군이고, 인간에게도 사용해 호신용으로 쓸 수 있으니 술사의 필수 소양이라 할 만하다.
그렇기에 술사를 상대로 싸운다면 당연히 고려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저주이지만…….
‘백유나 유예린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저주라고?’
문제는 그거다.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유예린이나 백유가 명백하게 열세에 몰릴 정도로 저주가 몸에 쌓였는데, 그걸 전혀 몰랐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냐 아니냐를 차치하고 문제는 그것이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현경에 이른 무인이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침투하는 저주가 실재한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지금 결계를 펼치고 간이나 보고 있는 언여휘를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웬만한 저주 같은 건 자연스럽게 튕겨 내는 현경급 고수들도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쌓이는 저주라면, 어떻게든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일단, 사존과 북존을 도와 저 끈질긴 것들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저주가 더 쌓이기 전에 셋이서 언여휘의 본체를 끝내는 게 맞았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살존은 망설임 없이 기척을 지웠다.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는 극한의 은신술.
눈앞에서 살존의 모습이 사라졌음에도 언여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흐응, 내 충고는 또 안 듣는 걸까?”
나름 진심을 다한 충고였는데?
언여휘의 웃음과 함께 사존이 상대하던 제군 중 하나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단숨에 목을 쳐 낸 살존의 일격에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달려든 사존의 손이 그대로 남은 육체를 벼락과 함께 휩쓸었다.
공간 전체를 벼락으로 지워 버린 것 같은 무시무시한 파괴가 지나가고.
파스스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육체 위로 살존이 내려섰다.
“시간이 없어. 빠르게 정리할 거야.”
“저쪽은?”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뚫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알겠다.”
언여휘가 방어에만 집중한 채 술법을 펼치고 있다면, 살존이 언여휘에게 붙어 있다고 한들 딱히 손쓸 도리가 없다.
언여휘의 본체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무인인 그들이 술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문제는 저쪽이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군.”
달려드는 또 다른 제군을 향해 벼락을 뿌리던 사존은 언여휘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성인 형태의 인형을 가리켰다.
“저것의 수준은?”
“최소 화경 정도는 되는 것 같았어. 문제는 내가 저주에 걸려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모르겠다는 것?”
“흠.”
살존의 평가에 잠시 고민하던 사존은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제군 하나를 박살 냈다.
“그럼, 고민은 무의미하겠군.”
“동감이야.”
고개를 끄덕인 살존은 사존의 옆에 서서 손가락 사이에서 단검을 돌렸다.
“싹 정리하고 그 뒤에 마저 생각하자고.”
* * *
“허억, 허억.”
오존의 등장과 함께 전장의 중심이 그들에게로 옮겨 간 뒤.
백유와 유예린은 백수아와 설란이 챙겼지만, 그 둘과 달리 중상을 입지 않았던 문율은 휴식을 거부했다.
처절하게.
다른 이들이 싸우는 하늘 말고, 땅 위에서 문율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괴이들은 물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무인들까지.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들 말고도 철백과 구복의 전투로 생긴 구덩이로 들어가려는 적들까지 막아 냈다.
달려드는 적을 막고 또 막고.
천수(千手)라는 독특한 형태의 무공을 사용하는 덕에 육체에 별다른 외상은 없었지만, 내공은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였다.
“후우.”
거친 호흡을 고르며, 허리를 편 문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제대로 된 천수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내공으로 형태를 잡을 수 없다면, 형태가 있는 육체를 움직여 싸우는 수밖에.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한다.
완전히 가다듬어진 호흡으로 문율은 땅을 박찼다.
달려드는 적을 때리고 부순다.
이 전장엔 산을 날려 버릴 정도의 강자들이 몇이나 있고, 그 싸움의 여파로 이미 웬만한 건물들은 전부 무너졌을 정도지만.
“흐읍!”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싸움 또한 치열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희미한 강기만을 두 주먹에 두른 문율의 몸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때리고 부순다.
그 재능의 찬란함이 진짜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율은 두 팔과 두 다리만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착실하게 막아 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
발은 무거워지고, 주먹은 무뎌진다.
“큭!”
원래라면 일격에 끝냈을 적이 살아남아 내지른 반격을 겨우 피해 낸다.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한번 주먹을 꽂아 넣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냈다.
틀어진 자세를 억지로 고쳐 주먹을 내지른 탓에 몸이 휘청거리며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무인들은 치욕으로 여기는 흙바닥을 구르는 동작이었지만, 문율은 애초에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흐읍!”
재빨리 일어나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창을 막아 낸 문율은 그대로 창을 움켜쥐고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일격.
단숨에 상대의 턱을 으깨고 그 머리를 날려 버린 문율은 그대로 다시 기세를 몰아 전투를 시작했다.
끝나지 않는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고, 가슴이 턱턱 막혔지만.
[키아아아악!]
“쳐라!!”
적은 끊이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적을 때리고 차고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니.
“커헉!”
기어코 한계가 찾아왔다.
무뎌진 몸이 결국 뒤에서 들어온 창을 피하지 못했다.
등을 꿰뚫린 상태로 어떻게든 몸을 비틀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창날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문율은 주먹을 휘둘렀다.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이제는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처절한 몸짓으로.
이제는 적이 당연하다는 듯이 막아 내는 나약한 주먹으로.
문율은 발악했다.
어떻게든 이 아래로 적을 보내지 않기 위해.
지금 밑에서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적을 끝내기 위해 싸우고 있을 동료들을 위해.
“나는……!”
그 사람처럼 모두를 지킬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문율의 주먹 위로 칠흑과 같은 패기가 맺힌다.
이미 다 쥐어짜서 없는 내공 대신, 패기를 손에 휘감은 문율에게서 시작된 흉포한 살기가 사방을 집어삼킨다.
까득!
이를 악물고 아찔할 만큼 끔찍한 통증을 가져오는 몸을 쭉 편 채로, 문율은 두 주먹을 올렸다.
“그 누구도, 지나가지 못한다.”
결의.
최후의 순간, 모든 것을 각오하고 의지를 불태우는 문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쩌저적!
세상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달려들던 적들이 얼어붙고, 문율을 지나쳐 놈들이 뛰어내리려던 구덩이의 입구가 얼어붙었다.
북존?
설마 설 형의 아버지가?
얼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에 문율이 고개를 들었지만, 오존은 여전히 제군들을 비롯한 강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북존이라고 한들 여유가 없는 상황.
그렇다면?
“정말, 가슴이 아플 정도로 무식하게 싸우네요.”
한숨과 함께 다가오는 인기척.
“갑자기 적들이 사라지고, 성벽에서 공성전을 벌이기에 무언가 했더니…….”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
“성벽 밖에는 언여휘가 설치해 놓은 것들이 가득하지, 피는 계속해서 진법으로 흘러가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온 인물을 확인한 순간, 문율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이 순간.
이 전장에 가장 필요한 인재.
“너희는 언제나 무리만 하는구나.”
백화단주, 성화린의 등장에 문율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흑룡단의 매력이죠.”
“다행히 멀쩡해 보이네.”
그런 뻔뻔스런 대답도 할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인 성화린은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차가운 눈빛으로 문율을 살피고 있었다.
‘상당한 수준이야.’
자신조차 그냥 봤을 땐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은밀하고 섬세한 저주다.
아무리 영력을 깨우쳤다고 해도 무인들이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나도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무인들이 평상시에 얼마나 강한지 몰랐다면, 처절하게 싸우던 문율이 평소보다 얼마나 더 약한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면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지독할 정도로 은밀하고 음흉한 저주다.
“해주에는 시간이 걸려.”
일단 목숨을 건드리는 것만 해제하자.
문율에게 다가간 성화린은 부드럽게 문율을 쓸어 냈다.
성화린이 만들어 낸 뇌전이 문율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상처도 심한데 저주까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목숨이 위험했겠어.’
성벽 쪽의 일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오길 잘했다.
오존이 움직이기에 혹시나 해서 움직였더니, 정답이었다.
귀령단주도 나름대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성벽은 부하들에게 맡기는 거로 충분하겠지.
“어머? 이건 또 반가운 얼굴이네?”
문율의 저주가 해제된 것을 느낀 언여휘의 시선이 기어코 땅으로 향했다.
빙글거리는 웃음.
“네 스승은 알아채는 게 늦어서 죽었는데, 너는 조금 더 뛰어나구나?”
순수하게 감탄의 감정이 실려 있는 그 목소리에 성화린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언여휘, 당신이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아요.”
문율에게 응급조치를 끝낸 성화린은 문율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곳에서 모두 끝날 테니까.”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으로 초고속으로 이동한 성화린은 백유와 유예린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기절해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곁에 문율을 눕혀 놓고 여기에서도 치열하게 전투 중인 설란과 백수아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저주에 침식되어 가고 있는 두 사람.
저기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는 오존들도 다를 게 없었다.
세 사람은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꽤나 순조롭게 적을 줄여 나가고 있었지만, 시간을 길게 끄는 순간 지금 가지고 있는 우위는 사라질 게 자명했다.
“후우.”
여유롭지 못한 상황.
가볍게 숨을 내뱉은 성화린은 양손으로 인을 맺었다.
해주(解呪)?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좋지 못했다.
지금 한 명을 해제하고 다른 사람을 해제하러 가면 그사이에 다시 저주에 빠질 거다.
즉, 지금 하나하나 해제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런.”
성화린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언여휘의 표정이 변했다.
“역시, 너희들도 나름 학습이란 걸 하는구나?”
나와의 정면 대결이 비참할 정도로 불리한 싸움이라는 것을 드디어 깨우친 모양이네.
“당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곱게 모은 양손, 엄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부적이 흩날린다.
부적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이 사방으로 퍼진다.
적을 제거하는 힘은커녕 언여휘를 압박하는 힘조차 없는 술법.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언여휘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드는 술법.
“쇄(鎖).”
그것은 지금 사방에 펼쳐진 저주들을 잠그는 힘이었다.
저주를 풀진 못하지만, 이 이상 저주가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한 수.
“지금부터 저주는 여러분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며, 성화린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오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확실하게 처리해 주세요.”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주한 사존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하하하하! 정파의 술사도 꽤나 기개가 있구먼.”
“천위랑 잘 어울리던 아이라서 그런가?”
살존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곤 단검을 돌렸다.
촤악!
솟구치는 피.
살존에게 목이 베인 제군 하나가 무리하게 몸을 비틀어 손을 내민다.
잘라져 쏘아지는 손가락.
일순간 공간을 지나친 벼락이 그 손가락들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고, 차가운 얼음이 그 제군을 빙산 속에 가뒀다.
“빠르게 끝낸다.”
아직 남아 있는 적들의 숫자는 꽤 있지만, 온몸을 짓누르던 저주가 계속해서 더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겐 저주가 서서히 풀린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북존의 말처럼 합심한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는 인형들의 숫자에 언여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면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끝날 거다.
“아무래도 그쪽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툭툭.
언여휘의 영력이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달기의 영역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