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8화
607화-마지막 준비 (2)
백유와 유예린은 왜 저렇게 됐는가?
언여휘가 던진 그 물음에 살존은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거듭된 전투로 지쳤으니까.
적이 계속해서 재생하는 괴물이니까.
이유야 많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만으로 백유가 저렇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
고개를 돌려 북존과 사존이 상대하고 있는 적들의 실력을 가늠한 살존의 미간은 더더욱 깊게 패었다.
“어떻게?”
저런 수준으로 백유와 유예린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지?
피어난 의문은 단숨에 커져 넝쿨처럼 뻗어 나갔다.
그리고 사고의 끝.
그 정상에 넝쿨의 잎이 닿는 순간.
“후후.”
자신만만한 언여휘의 웃음과 함께 살존의 눈이 번뜩였다.
“저주다!! 두 사람 다 저주에 대응해!”
살존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찬 성인 형태의 인형이 살존을 덮쳤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공격.
조금 전의 공격보다 더 빠르고 매섭다.
아니.
‘내 쪽이 느려진 건가!’
자각한 순간, 현경의 뛰어난 감각이 자신의 육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무뎌진 것은 무엇이냐.
육체냐, 정신이냐.
무엇이 문제인 거지?
“역시 살수라 그런지 빠르네~.”
즉각적으로 수비에 집중하며 자신을 파악하려는 살존을 보며 언여휘는 웃음을 흘렸다.
“그럼 문제.”
손가락을 까딱이며 언여휘는 빙긋 웃었다.
“나는 어째서 저 두 아이 앞에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었으면서 너에게는 내 싸움 방식까지 알려 줬을까?”
장난스러운 질문.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존은 어리석지 않았다.
‘영력……!’
유예린과 백유에게 있고, 자신들에게 없는 것.
영력이다.
이런 싸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설천위는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력을 가르쳤다.
무인이지만, 술사를 만나 무력하게 당하지 않도록.
괴이와의 싸움은 지식의 싸움이고.
그런 괴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술사와의 싸움도 아는 힘의 싸움이다.
술사가 어떤 것을 할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움직이고, 알고 대응하는 것으로 술사와의 전투는 그 어려움의 정도가 대폭 내려간다.
“저 아이들은 눈치가 좀 없었지. 하긴, 천위도 화린이도 저주에는 영 소질이 없는 아이들이니까. 아, 천위는 없진 않나?”
낙인(烙印)이라는 지독한 수법을 쓸 줄 아니까.
그렇게 보면 그냥 본인이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쓰는 것뿐일지도.
“그런 의미에서 충고를 하나 하자면, 술사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틀린 미소와 함께 언여휘는 앙상한 손가락을 흔들었다.
“자신이든 세상이든 알고 있다고 믿지 않는 거야.”
희미하게 일렁이는 언여휘의 시선 끝.
백유와 유예린이 쓰러져 있는 건물 지붕 위로 기이한 힘이 일렁였다.
* * *
지하 구덩이.
철백과 구복의 싸움으로 만들어진 깊은 구멍으로 뛰어든 주현운은 생각보다 더 오래 낙하하는 깊이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싸우면 이런 깊은 구멍이 생기는 거야?
벽면을 박차며 속도를 줄여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아래로 내려가던 주현운은 이내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으읍!!”
필사적으로 적을 붙잡고 있는 철백.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발악하며 철백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고 있는 구복.
어느새 수십 개로 늘어난 팔들이 쉴 새 없이 철백을 두들겨 패며 땅으로 처박고 있었다.
쾅! 쾅!
이를 악물고 버티는 철백의 머리가 몇 번이고 땅속 깊숙이 파묻힌다.
하지만.
“크아아아압!!”
괴성과 함께 목을 당긴 철백은 자신이 붙잡은 괴물의 머리에 박치기를 갈겼다.
우득! 우득!
철백이 놈을 옭아맨 손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윽고, 완전히 골절된 놈의 허리가 한 번 어긋나는 것과 동시에 재생을 시작한다.
어긋난 상태로 재생되는 육체.
비틀리고 어긋난 놈의 몸체가 그런 재생이 몇 번이고 일어났음을 알려 주었다.
‘……안 와도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 같네.’
끌어안은 것 하나만으로, 신(神)의 영역에 도달했었던 괴물을 옭아매다니.
이건 단순히 육체가 강인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꺾일 수 없는 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후우.”
주현운 또한 그래서 이 자리에 섰다.
“너……!”
연화를 데리고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윤혜의 앞에 도달한 주현운은 놀란 눈을 한 소윤혜를 보며 빙긋 웃었다.
“철 형처럼 저도 놓아주지 못하는 게 있어서요.”
“지금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뭐 상황이랄 게 있나.”
웃으며, 연화에게 두 사람을 부탁한 주현운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저 괴물을 베면 끝. 그게 다 아닌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로 앞으로 나아가는 주현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윤혜는 웃음과 함께 몸에 힘을 풀었다.
“……진짜 못 말리겠네.”
“언니, 팔 부러졌죠? 줘 보세요.”
간단한 응급조치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뼈가 완전히 박살 난 소윤혜의 팔에 약을 뿌리고 임시로나마 지지대를 붙여 고정시킨 연화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괴물의 뒤에 도달한 주현운의 검이 놈의 팔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주현운이 합류한 것을 인지한 철백이 이를 악물고 더 강하게 놈을 붙잡기 시작했고, 괴물의 괴성은 더욱더 커져 지하를 크게 울렸다.
‘……위쪽이 문제야.’
지금 위쪽의 상황을 만든 사람은 누가 봐도 언여휘였다.
그게 아니라면 백유와 유예린이 그렇게까지 몰린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위쪽에 술사가 있으니 당연히 자신이 위에 남을 줄 알았는데…….
‘나를 왜?’
그런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고 눈앞에 닥친 현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영력의 흐름이 비정상적이야.’
거기다 흐르는 양 또한 범상치 않았다.
저런 괴물이 대체 왜 철백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든다는 것은 곧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졌다.
‘아직 제대로 힘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이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저런 식으로 비효율적인 힘의 사용밖에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이쪽에겐 호재다.
놈이 저 거대한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쪽이 유리해진다는 소리니까.
“좋아. 할 수 있어.”
연화가 고민에 빠진 사이, 몇 번 숨을 고르던 소윤혜가 왼손으로 도를 쥐고 일어섰다.
“네? 뭘 해요?”
“네가 왔으니, 하영이는 네게 맡길게. 놈을 죽이는 덴 내가 필요해.”
철백과 주현운의 힘은 괴이를 죽음으로 이끄는 데 유리하지 않다.
싸움이 길게 이어지면, 주현운 같은 경우엔 깨달음을 얻어 어떻게든 방법을 손에 넣겠지만…….
‘그때까지 못 버텨.’
철백은 이미 한계다.
애초에 처음 놈이 폭주하는 순간 자신과 서하영을 지키기 위해 놈에게 달려들었을 때도 철백은 꽤나 지친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대체 얼마나 버틴 거지?
괴물 같은 놈을 붙잡고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틴 건지 이젠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철백이 꺾이지 않은 인간이라고 해도, 육체가 완전히 한계를 넘어서면 철백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들이닥칠 거다.
그리고 철백이 무너지는 순간, 저 괴물은 마구 날뛰게 될 것이고.
철백에게 붙잡힌 상태로 펼친 발악만으로 이렇게 깊은 구덩이를 판 놈이다.
‘설천위 그 녀석은 이런 괴물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했던 건가.’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달기라는 존재까지 있는 이상 이 전투에서 패배는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셋이서 어떻게든 마무리 짓는다.
이놈을 막지 못해 위로 올라가면?
가뜩이나 힘든 설천위에게 부담을 배로 가하는 꼴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자리에 선 의미가 없다.
전장에서 짐이 되어 동료의 발목을 붙잡을 바엔.
스르르릉.
죽더라도 적을 죽여 제 몫을 다한 뒤에 죽을 것이다.
늘어트린 도를 바닥에 끌면서 소윤혜는 앞으로 나아갔다.
뒤는 없다.
확실하게 적을 베고, 이 싸움을 끝낸다……!
“아우, 진짜!”
“너?!”
단숨에 달려들어 자신을 들어 올린 연화의 손길에 소윤혜의 발이 공중에 떴다.
옆구리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치욕적이기 그지없는 자세……!
체구가 작은 소윤혜를 보고 누구나가 한 번쯤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만 했지 그 누구도 시도한 적 없던 그 일을 연화가 해냈다.
다시 서하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거리.
바닥에 끌리지 않는 도의 침묵에 소윤혜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주 선배가 여기 왜 왔는데요! 언니는 좀 쉬고 계세요.”
“너……!”
“그리고 환자를 볼 거면 언니가 봐야죠. 쌩쌩한 제가 나가서 싸우고.”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소윤혜를 다시 서하영의 옆에 내려놓은 연화는 손을 탁탁 털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깊은 생각 따윈 필요 없다.
설천위가 인정한 천재 중의 천재가 주현운 아니던가.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것일 터.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걸 한다.
[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쾅! 쾅! 쾅!!
내가 할 수 있는…….
“크아아아아압!!”
“형님! 좀만 더 버티세요!”
콰득! 콰직!
내가…….
“커헉!”
“흐읍!”
……뭘 할 수 있지?
응?
저 싸움에 끼어들면 바로 곤죽이 될 것 같은데?
괴성을 내지르는 구복은 주먹이 수십 개나 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세상을 으깨 버릴 것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몸으로 받아 내고 있는 철백이 말이 안 되는 거지, 보통은 현경급 고수라도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봐라.
주현운도 모든 공격을 다 피하고 있으니까 멀쩡한 거지, 한 대라도 맞았으면 저렇게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그래.
다 피하면 되겠지.
응.
“……무리.”
저 미친 짓을 어떻게 하라고?
멀리서 보고 있는 지금도 가끔 주먹이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빠른데.
저걸 저 거리에서 하나도 맞지 않고 다 피하면서 싸우라고?
미친 거야?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그런 인간들을 모아 놓고도 본인이 가장 강한 설천위가 얼마나 괴물 같은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연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술사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다.
상대가 괴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생각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소윤혜가 어째서 그리 무리하게 움직였지?
적을 죽이지 못하니까?
왜 죽이지 못하지?
‘……왜?’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연화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주 선배! 영역 펼쳐 주세요!”
“영역을?”
날아오는 구복의 공격을 피하면서 주현운은 일단 영역을 펼쳤다.
[천검지악(天劍知惡)]
주변의 영력을 세밀하게 감지해 내는 주현운의 영역이 펼쳐졌다.
‘괴물이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영력을 눈앞에서 목도한 주현운은 경악과 함께 이어질 연화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제 베어 주세요!”
베어 달라는 요청.
그 요청에 주현운은 망설임 없이 하던 대로 구복의 팔 하나를 베었다.
잘려 나가 완전히 떨어진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팔.
그리고.
“……돌아가?”
이상을 감지해 낸 주현운의 한마디에 연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백에게 저렇게 붙들려서 싸우고 있음에도 놈이 힘의 고갈 없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엄청난 고효율인 힘의 회수 때문이다.
꺾이고 잘려 나가도 마치 순환하듯 영력이 다시 돌아오니 힘이 거의 끝없이 샘솟고 있는 거다.
설천위라면 당연하다는 듯 잘라 낸 것들을 먹어 치워 그 힘을 갉아먹으면서 싸웠을 테니, 상대가 지쳐 갔던 것이고.
그렇다면.
“베어 내 주세요!”
공략법은 간단했다.
철백이 붙잡고.
주현운이 베고.
자신이 먹는다.
주현운이 다시금 구복의 팔을 잘라 내고, 그곳으로 달려간 연화는 망설임 없이 괴연천식을 펼쳐서 그 힘을 먹어 치웠다.
“흐읍!”
전신이 찌릿할 정도의 충격.
이 힘은 섣불리 먹어선 안 된다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계속해요!!”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연화의 뜻에 맞춰 그녀의 내면에 있던 붉은 영력이 맥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