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7화
606화-마지막 준비 (1)
삐쩍 마르다 못해 어딘가 아파 보이기까지 하는 언여휘의 등장이었지만, 전장에 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방심하는 이가 없었다.
왜냐고?
당연했다.
자고로 노인, 여자, 아이를 조심해야 하는 무림에서 일단 두 가지나 해당되는 노파가 바로 언여휘 아닌가.
하물며, 저리 앙상한 몰골로도 노인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의 외모라면 더욱 그렇다.
뒤틀려도 무언가 단단히 뒤틀려 인간의 수명을 아득히 벗어난 시간을 이승에서 버텨 왔다는 증거니까.
방심 따윈 절대 해선 안 되는 상대라는 뜻이다.
“일단, 각자 할 수 있는 걸 하도록 하지.”
슬쩍 앞으로 나온 사존의 발언에 살존과 북존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합이 맞지 않는 상태에서 한 명뿐인 적을 상대할 땐 먼저 서로의 역량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니까.
오존쯤 되는 고수라면 어느 정도는 눈대중으로 헤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눈대중은 결국 눈대중일 따름이다.
극한까지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뭐, 애당초 저것이 혼자 싸울 리도 없을 테니 쓸데없는 걱정 같지만.”
천천히 발아래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살존의 모습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맞는 말이다.”
살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북존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러니 전부 얼리고 시작하지.”
“……야, 이…….”
살존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북존은 거침없이 검을 그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차가운 일격.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색의 얼음이 황궁을 뒤덮었다.
“후후. 북존, 무식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세상이 얼어붙었음에도 언여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아픈 몸은 추위를 견디기 힘들거든. 어울려 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렴.”
언여휘를 중심으로 솟아오르던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린다.
내공으로 만든 것을 넘어서서 심상(心想)이 담겨 있는 얼음이 너무도 쉽사리 녹는 광경을 보고 북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차가웠던 눈이 한층 더 차가워져 보고 있으면 절로 오금이 저릴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본다고 변하는 건 없지.”
언여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 또한 그리 생각하지 않아?”
“……고목의 껍질은 질기고 단단한 법이란 걸 내가 깜빡 잊고 있었네.”
자신의 단검을 막아 낸,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장막에 살존은 가볍게 허공을 박차고 거리를 벌렸다.
“고목이라니 여인에겐 너무 가슴 아픈 비유네.”
“여인? 여인이라…….”
여인이라는 단어에 입꼬리를 비튼 살존은 단검을 흔들었다.
“네가 딱히 그런 개념에 집착할 것 같진 않은데?”
“후후후.”
언여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참격.
당연하다는 듯이 살존의 암경을 막아 낸 언여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네. 맞아. 성별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지.”
사존이 쏟아 내는 벼락과 북존의 참격까지 장막으로 막아 낸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지. 여자든, 남자든, 아니면 내시든 뭐든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흥이 오른 언여휘의 설명이 길어지려는 순간.
어느새 사라졌던 살존의 단검이 언여휘의 머리로 꽂혔다.
당연하다는 듯이 가로막는 보랏빛 장막을 꿰뚫고, 단숨에 그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힌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
콰득!
살을 파고드는 단검이 끝내 그 속력을 잃고 멈춰 섰다.
언여휘의 머리 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 내민 손이 살존의 단검에 꿰뚫려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자신의 볼로 받아 내며, 언여휘는 혀로 피를 핥았다.
“그러니, 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도 상관이 없지.”
“응응, 그럼 상관없지.”
“맞지, 맞지.”
장막 너머.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언여휘의 인형들이 장난치듯 소란을 떨었다.
“소녀가 존재하는 것으로도 언여휘는 존재합니다.”
살존이 비틀어 빼낸 단검 때문에 손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여인 형태의 인형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암, 여기에 있는 모두가 나이고.”
“내가 모두지.”
“너도.”
“나도.”
“얘도.”
“쟤도.”
“혹시 너도?”
“혹시 나도?”
“히히, 전부!”
정신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소란스럽게 떠들며 웃음을 터트리는 인형들.
손이 꿰뚫리는 큰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인형까지 있음을 확인한 살존은 순순히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굳이 손발을 맞출 필요는 없겠네.”
“성벽에서 하던 것과 별다를 게 없는 일이군.”
“나쁘지 않다.”
북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존과 살존은 각자 전투태세를 갖췄다.
“전부 쓰러트린다.”
“예외는 없다.”
“놈의 인형은 혼의 파편. 쓰러트리면 반드시 상응하는 충격이 갈 거야.”
호기롭게 준비를 끝낸 사존과 북존을 보며, 살존은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니, 확실하게 목을 따든가 머리를 으깨 놓도록.”
“문제없다.”
“그러지.”
사존과 북존이 땅을 박차 양옆으로 흩어지고, 언여휘의 본체와 마주 보고 있는 살존은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살존,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거야? 히히, 역시 옛정이 있어서인가?”
“헛소리는 사절이야. 대꾸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에이, 정이 많은 당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존의 대꾸에 웃으며 대답한 언여휘는 이내 호흡을 멈췄다.
단 한순간의 경직.
호흡이 정지한 언여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우, 후우.”
이윽고 순간적으로 멈췄던 호흡이 돌아오고, 부족했던 숨을 몰아쉰 언여휘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칼날에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이 과한데?”
“좀 받아 줬으면 좋겠는데.”
단검을 회수한 살존은 다시금 거리를 벌린 채,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여인을 살폈다.
언여휘의 인형치고는 상당히 좋은 신체 능력.
거기다 본체가 펼친 것으로 보이는 기이한 결계까지.
‘까다롭네.’
암살이라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 술사, 그것도 인지를 아득히 벗어난 고위 술사라는 낯설기 그지없는 조건 또한 불리하게 작용했다.
적이 어떤 식으로 방어하고 공격할지 예측하기 힘드니 쉽사리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뒤를 충분히 남겨 놓는 선택은 당연히 돌아오는 이득도 적을 수밖에 없다.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적을 땐 그 적은 이득에 만족하는 것이 최선이다.
조금씩 적의 힘을 갉아먹으며 보이지 않았던 틈을 만들어 내거나 미세했던 틈을 더욱 키우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보통이다.
살존도 약했던 시절엔 그렇게 싸웠던 적이 있고.
미지의 적, 소극적인 움직임만을 취할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전투 방식이다.
문제는 시간.
일단, 백유와 유예린의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단순히 팔을 못 움직이는 골절뿐만이 아니라 반복되는 전투로 내장까지 꽤나 상한 듯했다.
너무 긴 시간을 방치하면 자칫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거기다 술사에게 긴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건 상식이나 마찬가지다.
오존이 셋이나 빠진 지금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불존과 정존이 적을 제압한다고 한들 일반 무인들까지 전부 그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불살대처럼 평소부터 그런 식의 훈련을 꾸준히 받아 온 것이 아니라면, 전장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눈앞의 적이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데, 그 순간 번거롭고 익숙하지 않은 제압이라는 방법을 떠올리고 펼칠 수 있는 이가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힘이 부족할수록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대다수의 무인들은 급소를 노리는 일에 숙달되어 있다.
눈앞의 적 말고도 사방에 적이 널린 전장에서 힘을 뺀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선택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불살대는 힘을 뺀다는 과정을 특수한 무공으로 대체해 해결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특수한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도리가 없다.
그러니 전투가 이어질수록 피는 흐른다.
흐르는 피가 곧 언여휘의 힘이 될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침묵이 내려앉은 도시 속 일반인들의 목숨은?
도시 전체를 먹어 치우는 대법은 설천위가 저지했지만, 적은 공간에 사람이 밀집된 곳에 언여휘가 따로 손을 써 놨다면?
지금 당장 언여휘가 힘을 얻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후우.’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부정적인 가정들에 살존은 가볍게 숨을 뱉어 내며 생각을 끊어 냈다.
이쪽도 손을 써 두지 않았던가.
조급해질 필요가 없다.
지금 북존과 사존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잡것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애초에 유예린과 백유에게 걸레짝이 될 정도로 당했던 놈들이니, 약해진 것들을 상대로 두 사람이 질 리가 없다.
시간이 흐르면 명백히 이쪽이 유리해질 상황이지만, 언여휘는 이쪽을 지켜만 볼 뿐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랫것들을 도와줄 여력이 없든가, 혹은 애초에 도와줄 생각이 없든가.
둘 중 하나겠지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전자가 유력해 보였다.
그러니.
“조금 대화를 해 볼까?”
“어머, 수다 좋지. 이 몸으로 다른 사람과 떠들었던 기억이 언제였는지…….”
웃으며 입가를 소매로 가리는 언여휘.
그런 언여휘의 코앞에 선 살존은 망설임 없이 단검을 찍었다.
끼이이익!
단검을 휘감은 보라색 결계에 끝내 언여휘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막힌다.
‘변했다.’
조금 전 파악했던 성질과 또 달라져 있었다.
“어머, 몸의 대화까지 하자고? 욕심쟁이네.”
“가벼운 체조 같은 거지.”
“꺄하하! 그거 나쁘지 않네. 으음, 하지만 이 몸으로는 체조도 힘들어서 말이야.”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은 언여휘가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러니, 체조는 저 아이가 함께해 줄 거야.”
언여휘를 휘감은 보랏빛 결계가 더 짙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곁에 있던 성인 형태의 인형이 살존에게 달려들었다.
‘무공?’
손끝을 날카롭게 세운 조법(爪法)을 펼치는 인형의 공격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꽤나 봐줄 만하지? 내 역작 중 하나야.”
강철을 아득히 뛰어넘는 강도를 지닌 손끝으로 쉴 새 없이 공격을 몰아붙인다.
‘지독한데.’
사파의 조법은 대부분 깊이 익히면 익힐수록 손가락이 굳는다.
정말 경지를 넘어서서 제대로 된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뻣뻣하게 굳어 버린 손가락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모든 게 무기를 지닌 상대에게 대처할 수 있도록 손가락의 강도를 무리하게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단단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니 반대로 유연함이 사라져 버리는 거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희생하고 노력해야 겨우 강철에 버금갈 정도로 단단해지는 것이 손가락이거늘.
지금 눈앞의 인형은 부드러우면서도 그 강도가 강철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단단했다.
“조법을 익힌 고수들의 육체와 혼을 섞어 만든 역작이야. 대단하지?”
경계하는 살존의 눈빛에 만족스럽게 웃은 언여휘는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그럼, 대화를 계속할까?”
체조는 인형이 대신해 줄 테니까. 입은 이쪽이 계속 놀려야지.
“으음, 시작은 어떤 화제가 좋을까. 고민되네?”
“할 얘기가 없다면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아니, 아니, 그럴 순 없지. 으음…… 그래! 기분이다. 좋은 정보를 하나 알려 줄게.”
히히 웃으며 깡마른 손가락을 들어 올린 언여휘가 손가락으로 쓰러져 있는 백유와 유예린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전투력만 보면 너희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저 두 사람은 어째서 저런 꼴이 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