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6화
605화-달기 (8)
[감히…… 인간 따위가……!]
설천위의 도발에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던 달기가 두 눈을 번뜩였다.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어, 아직도 포기 안 했나? 아니면…… 포기하지 못하는 건가?”
히죽 웃으며, 달기를 도발하던 설천위는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달기를 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웃으며 흑도를 어깨에 걸친 설천위는 달기의 감정에 반응해 강렬한 살기를 토해내는 적들을 보며 웃었다.
“여기 있는 것들 싹 다 치우고, 네 앞에 도달했을 때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어디 보자고.”
달려드는 거한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린 설천위는 다시금 진군을 시작했다.
달기에게 들킨 이상 더 숨길 것 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천하패도의 힘을 이용해 적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삐쩍 마른 나약한 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창을 꼬나든 병사 비슷한 것들까지 설천위의 천하패도에 먹혀 사라져 갔다.
흡수한 혼을 쥐어짜 영력을 만들어 내고, 그 영력으로 실체화한 혼들에게 힘을 더한다.
무한 동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딜 구조를 완성해 낸 설천위는 무식하게 전진해 나갔다.
베고, 짓밟고, 집어삼키고.
그야말로 패악에 가까운 전투 방식을 고수하며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슬슬 이상함을 느끼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군.]
[영역의 힘인가?]
현태중과 소백진의 감상에 뒤에서 지켜보던 손휘가 고개를 저었다.
[권능이다. 무식한 무인 놈들아.]
[권능?]
[잡놈이 뭐라는 거냐.]
[이래서 무식한 놈들은…….]
되묻는 현태중과 욕하는 소백진을 보며 혀를 차고 고개를 저은 손휘는 한숨과 함께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줬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에도 달기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그것이 이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근간이기 때문일 거다.]
“황제를 알현한 자, 그 누구도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본디 암살을 막기 위해 생겨났던 규칙은 그 특유의 성질로 인해 위압감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곧 위엄을 위한 전통으로 변질됐다.
그리고 달기는 자신의 부하에게 제군(帝君)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오만한 존재.
그 성역이 달기의 앞에 서는 것조차 불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손휘의 설명을 들은 이들은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가가지 못한다면 놈을 쓰러트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니더냐?]
현태중과 소백진의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손휘가 아니었다.
[이제라도 깨달았다니 다행이구나. 천것들아.]
오만한 목소리.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달기가 끼어든 것이다.
[네놈들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나는 지고한 존재. 네놈들 같은 천것들은 내 앞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짧게 호흡을 끊고, 설천위와 눈을 마주친 달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영원히.]
네놈 따위가 내 앞에 도달할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 달기의 조롱에 설천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달기 할매, 내가 아까 전에도 말했지?”
달려드는 위호를 칠흑의 손으로 붙잡은 설천위는 그대로 위호를 찢어발기며 웃었다.
“내가 보기엔 오만한 건 너라니까?”
* * *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에 든 소검을 역수로 고쳐 쥔 유예린은 짜릿한 통증을 느끼고 손에 힘을 더했다.
어디가 부러졌지?
팔꿈치? 아니, 움직인다.
이건 상완의 뼈가 부러진 거다.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어.’
관절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부족해진 내구성은 내공을 이용해 메우면 되고, 통증은 참으면 된다.
부드러운 피부 속에 잠들어 있는 질긴 근육으로 억지로 골절 부위를 옥죄어 고정한 유예린은 허리를 쭉 폈다.
짜릿한 고통이 올라오며, 절로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삼키고 역수로 쥔 소검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그런 유예린의 앞.
완전히 걸레짝이 된 위영제군의 몸이 삐걱거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명백히 달라.’
달기가 제군들을 부활시켰던 것은 그야말로 순간 회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회복 과정이 동반됐었다.
저렇게 이쪽에게 대놓고 틈을 드러내는 형태로 서서히 재생하진 않았다.
거기다 저렇게 재생하는 틈을 노려 들어간 공격에 뼈와 관절을 으스러트리는 형태의 반격도 취하지 않았었고.
‘너무 길게 싸우고 있어.’
적이 내공을 쓰는지 영력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힘을 계속해서 어딘가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기에 이미 몇 번이나 전투를 거듭해 체력과 내공을 소모한 자신들이 서서히 불리해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물며.
“후우우.”
백유조차 곳곳이 망가진 몰골을 하고 있으니, 어느 쪽이 더 불리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재생이 느리긴 했으나, 제군들은 착실하게 재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이건 면이 안 서는데…….”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백유는 유예린의 옆에 섰다.
“어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럼 네가 셋 맡아. 난 왼팔이 안 움직이거든.”
왼팔이 안 움직인다는 말에 유예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기도 전부터 이미 피로 질척해진 그녀의 어깨를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문 소협은…… 무리이겠군요.’
이쪽의 위기를 감지하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기 위해 날뛰던 문율도 기이할 정도의 재생력을 가진 적들에게 포위당해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심지어 본래의 적들에 이어 다른 적들까지 나타나서 상황은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끼익, 끼익.
기이한 소리를 내며 뼈와 근육을 맞추는 제군들을 바라보던 유예린은 가볍게 호흡을 뱉어내며 팔을 들어 올렸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참는다.
고통 따윈 몸의 비명일 뿐이다.
해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뒤에 평생 팔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해낸다.
팔이 안 움직인다며 웃고 있는 백유도 정말 필요할 때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왼팔을 휘둘러 적을 끝내려 들겠지.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미안해요.’
설천위가 달기라는 거물을 처리하고 나올 때까지 서 있을 자신이 없다는 것 정도.
그리고.
‘최후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면 좋겠군요.’
결심이 섰기에 유예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에도 잘 짓지 않는 미소를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지었다.
지금부터.
“죽기 전까지 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을 겁니다.”
마치 백유에게 약속이라도 하듯, 입으로 자신의 결심을 내뱉은 유예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흐흥, 미친년.”
웃음을 흘리며 천박한 말을 뱉어내는 백유가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된 건물들 사이, 이미 바닥에 내려와 싸운 지 오래였지만 철백과 구복은 아직도 그들의 밑에서 싸우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간 걸까.
쓰러져 있던 서하영을 향한 걱정에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잡은 유예린은 소검을 들었다.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역수로 쥔 자세가 어색하다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더딘 일격.
그 일격에.
촤악!!
회복해 가던 위영제군의 몸이 갈라졌다.
어깨에서 복부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진 상처가 쩍 하고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콰득!
쏘아진 위영제군의 손가락이 유예린의 배에 박혔다.
자신의 손을 절단해 쏘아 내는 암살자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자들만 익히는 사술이었으나, 지금의 유예린은 그것에 반응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며, 점점 더 힘들어지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대로 죽는다?
아쉽고 미련이 남지만, 어쩔 수 없다.
살아서 설천위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그 사람의 아이도 가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면.
“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죠.”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를 혼잣말을 내뱉으며, 유예린은 나아갔다.
“그러니 저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은검(隱劍)이란 것이 그러했다.
음지에 숨어 일격을 노리면 신의 목에라도 검이 닿지만, 대놓고 햇빛 아래 서면 이리도 빨리 한계가 드러난다.
자신보다 훨씬 먼저 싸우던 백유와 비슷한 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림자를 품었던 것에 후회한 적이 없었다.
후회한 채로 살아갈 생각도 없다.
그렇기에,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내리라.
설천위가 달기의 힘에 휩쓸려 사라지기 전에 부탁했던, 눈앞의 이 적들을 정리하는 것을 끝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유예린은 검을 휘둘렀다.
부러진 팔로, 자신을 무너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적을 베기 위해…….
“그만.”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목소리.
하지만, 싫지 않은 부드러움이 스며든 목소리.
동시에 유예린을 향해 재차 공격을 쏘아 내려던 적이 거대한 얼음에 갇혔다.
흘러나오는 한기에 입김이 절로 나올 정도로 순식간에 하강한 기온.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유예린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내린 북존은 그녀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너희들은 이미 충분히 제 몫을 해 주었다.”
“아버님…….”
“……쉬도록 해라.”
북존이 부드럽게 짚은 혈에 힘이 빠진 유예린을 설란이 받아 뒤로 이동했다.
“저 양반, 아버님이라고 부르니까 잠깐 멈칫했던 거 맞지?”
“그런 것 같다만.”
“어휴, 북존은 무슨?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쯧쯧, 혀를 차는 살존과 그런 살존의 옆에서 덤덤히 서 있는 사존.
살존에게서 백유를 넘겨받은 백수아는 설란과 같은 곳에 모여 유예린의 옆에 백유를 눕혔다.
“참 부끄럽네요. 이런 사람들 곁에 끼어서…….”
“능력이랑은 상관없을 거다.”
기죽어 있는 백수아의 어깨를 토닥인 설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동생 놈은 밀어붙이는 것에 약한 것 같으니까.”
“그럼…….”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능력이 필요해지겠지.”
“네?”
그게 뭔?
고개를 갸웃하는 백수아를 보며 설란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두 아이를 뚫고 내 동생에게 들이댈 수 있는 능력이라면…… 살존의 칭호를 이어도 되지 않겠니?”
“아…….”
아.
그러니까.
응.
이 두 사람을 뚫고?
응…….
“엄마한테 다시 수련시켜 달라고 할까…….”
풀이 죽은 백수아가 쭈그리고 앉아서 백유의 곁을 지키는 모습에 피식 웃은 설란은 몸을 돌렸다.
절정 수준인 백수아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자신까지 해이해져선 안 되는 수준이니까.
유예린과 백유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적.
거기에 더해 저 바닥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충격까지.
“이쪽은 내가 맡지.”
“그럼 나도.”
“그럼 아래는 내가 가면 되는 건가.”
북존과 살존이 위에 남기로 하자, 사존이 아래를 바라봤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진동.
솔직히 흥미가 있었다.
사존이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아뇨. 아래는 저희가 가겠습니다.”
“저희요?”
엥? 난 이쪽에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주현운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연화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은 주현운이 그대로 구덩이를 향해 도약했다.
순식간에 깊은 구덩이로 사라지는 두 사람.
그리고.
“슬슬 나오지 그래?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짜증이 담긴 살존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출렁거렸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저기 밑으로 간 아이가 알려 줬거든. 황군을 너무 죽여선 안 된다는 것까지도. 그래서 그쪽은 정파 양반들한테 맡겨 놓고 왔어.”
안 죽이는 건 그쪽이 나름 전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살존의 대답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연화. 똑똑한 아이야. 천위는 대체 저런 아이를 어떻게 알고 챙겼대?”
웃으며 나타난 것은 삐쩍 마른 여인이었다.
너무 말라 피부와 붙은 뼈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마른 여인.
창백하기 그지없는 혈색에다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까지.
누가 봐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여인의 등장에 살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인형으로 다니는지 알겠네. 생각보다 더 추하게 생겼네, 언여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