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5화
604화-달기 (7)
영원히 닿을 수 없다.
달기의 호언장담에 설천위는 되레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천하패도의 힘을 품은 도를 어깨에 걸친 설천위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그 앞에 도착해서 다시 물어봐 주마.”
짓밟고 나아간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패도(覇道)는 천천히 형체를 이루어 그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망자의 대지가 번지고, 혼을 짓누르는 패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달기가 불러낸 깡마른 인간들이 망자의 대지를 밟는 순간 그것에 잡아먹혀 침몰하고, 현태중과 소백진을 비롯한 혼들과 맞서 싸우는 강자들은 패기에 짓눌려 무뎌진다.
막을 수 없는 행군이 시작된다.
적을 짓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헛수고다.]
달기의 힘에 의해 부활한 적들이 다시금 달려들지만, 이미 기세를 탄 설천위는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달려드는 거한의 창을 베어 내고, 그 목을 친다.
옆에서 끼어든 괴한의 곡도를 현태중이 받아 내고 궤적이 사라진 검이 그 목을 쳤다.
어디선가 쏘아진 활을 암영의적이 잡아내고, 그 활을 쏜 궁사의 머리 위로 손휘가 불러낸 창이 떨어져 그 머리를 꿰뚫었다.
설천위가 불러낸 병력은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기세로 적을 쓸어버리며 나아갔다.
베고 찢는다.
날뛰는 적은 제압해 그 목을 치고.
은밀하게 다가온 적은 그 목을 꿰뚫어 대지에 꽂아 버렸다.
피와 살이 튀고, 죽음이 번뜩이는 전투가 이어진다.
첫 번째 죽음은 두 번째, 세 번째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곧 다섯 번째, 열 번째로 이어진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다.
그 어떤 죽음도 끝나지 않았다.
처음 설천위에게 창을 찔렀던 거한은 여전히 몸을 일으켜 창을 찔렀고.
곡도를 휘둘렀던 사이한 인상의 사내는 여전히 곡도를 휘둘렀다.
심지어 활을 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고, 맨 처음 나타났던 거한만큼은 아니나 창을 다루는 뛰어난 고수들이 나타나는 등 견제 세력은 점점 더 불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한칼에 죽이던 것이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나고.
점점 더 늘어지는 전투와 함께 이윽고.
[발이 멈췄구나. 애송이]
설천위의 걸음이 멈췄다.
고작 몇십 미터 정도를 지나왔을 뿐인데.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적에게 엉켜 기어코 설천위의 발이 멈췄다.
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기의 웃음 섞인 조롱을 들으며 설천위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흠.”
적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이쪽의 병력에는 한계가 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불러낼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가진 혼이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말이 통해서 부릴 수 있는 혼은 더더욱 적었다.
하지만.
“흐으으음.”
주위를 둘러보며 길게 호흡을 내뱉은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창의력이 부족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배우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웠어야지.
달기의 영역에서 혼을 실체화시키는 요령의 섬세한 부분을 배워 자잘한 것들을 쳐내고 효율을 높였다.
그렇다면, 다른 점도 배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창을 내지르는 거한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전력이 부족하면 더 끄집어내면 되지.”
웃음과 함께 설천위의 발아래에서 치솟은 검은 무언가가 꿀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력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
달기가 다루는 저 망자들은 말이 통할까?
아니.
그럴 리가.
그렇다면 그들이 말은 통하지 않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전투를 이어 나가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나라고 못 할 것 없지.”
나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달기가 만들어 낸 존재들을 꿰뚫어 본 설천위는 그 원리를 곧바로 자신에게도 적용시켰다.
설천위가 여태껏 죽이며 흡수한 혼들.
말이 통하지 않거나, 내부에서 정보만 빼내고 처박아 두었던 것들.
그것들을 불러냈다.
적이 끊이지 않는 엄청난 물량 공세로 승부한다면, 이쪽도 똑같이 물량으로 밀어붙여 주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 아니던가.
설천위의 발아래에서 시작된 망령들의 군세가 달기의 병력과 충돌했다.
부딪혀 깨진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다.
망가지든 말든 상관없는 것들이니까.
[애송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달기의 반응은 미지근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싸운다면 네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연히 이런 전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기가 이런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녀가 오랜 시간 힘을 축적한 괴이이기 때문이고, 둘째,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불러내는 것으로 그 힘의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이 저런 식으로 군세에 가까운 병력을 불러내면 영력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순식간에 고갈되어 폐인이 될 게 뻔했다.
물론 설천위는 보통 인간이 아니니 정신력이야 어떻게든 버틴다고 하더라도, 영력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무슨, 푸기만 하면 물이 나오는 우물도 아니고, 영력이란 것이 그렇게 끝도 없이 솟구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신화시대 때부터 버텨 온 멸(滅) 등급의 악귀들은 전부 진즉에 제힘을 되찾아서 신들과 다시금 전쟁을 벌였을 거다.
현실이란 것은 매정하기에 때로는 불가능한 것도 있는 법.
“쓸어버려.”
[크아아아아!]
그러니 저 발악도 얼마 가지 않을 거다.
“아, 좀! 더럽게 질척이네!”
여태까지 쓴 힘도 있으니 정말 얼마 남지 않았겠지.
“오, 슬슬 열린다.”
인간 나부랭이가 억지로 버텨 봤자 그 한계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터.
“야야! 이쪽부터 뚫어 봐! 아씨! 노공, 이 새끼 반항하냐? 말 안 들어? 뭐? 노인 공경? 노인 공격을 당하고 싶냐? 똑바로 안 해?”
한계가 코앞…….
“야, 씨! 한 놈 흘렀잖아! 똑바로 안 해? 너 아직 정신 남아 있는 거 다 안다니까.”
[네놈, 대체 언제 쓰러질 것이냐?]
반항하는 노공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설천위의 모습에 끝내 참지 못한 달기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아니, 대체 어떻게?
제도 전체에 걸친 대법을 언여휘와의 싸움 끝에 막아 낸 인간이 대체 어떻게?
영력이란 것은 그렇게 쉽사리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영(靈)의 힘이기 때문에 보통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한데, 저놈은 대체 어떻게?
달기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던지자 설천위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쓰러져? 누가?”
비웃음이 섞인 그 대답에 미간을 찡그린 달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뻔뻔한 낯짝을 어떻게 깔아뭉개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힘을 끌어올린 달기는 제가 불러낸 망자들에게 힘을 더했다.
[제풀에 꺾여 쓰러지지 않는다면, 직접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다. 애송이.]
“그걸 못 해서 이러고 있던 거 아니었나?”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설천위의 도발에도 달기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네놈이 무엇을 이용해 버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작 그뿐이다. 힘을 빼기 싫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니.]
달기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영역에 흐르는 공기가 일변했다.
찐득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살기.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호흡 한 번 하기도 전에 그만 절명했으리라.
그 정도로 농도가 깊은 살기가 자욱하게 깔렸지만, 설천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다음은 그래…….”
느긋한 태도로 턱을 쓸며 주위를 둘러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호인가?”
[위호(衛狐).]
자신과 설천위의 말이 겹쳤다는 것을 깨달은 달기가 눈을 크게 뜨는 사이, 달기의 부름에 응해 나타난 위호들이 포효했다.
[키야아아아오오오!!]
세 마리의 위호들.
영역이 펼쳐지기 전에 달기가 설천위를 공격할 때 불러냈던 거대한 여우들과 비슷했지만 풍기는 흉포함만큼은 아예 격이 다른 세 여우의 등장에 현태중을 비롯한 혼들은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냥 넘길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위호와 마주한 다른 혼들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달기,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으르렁거리던 위호 한 마리가 쏜살같이 솟구쳐 설천위를 향해 쇄도했다.
거대한 주둥이를 벌려서 한입에 설천위를 삼켜 버리기 위해 위호가 벌어진 턱을 닫는 순간.
까득!!
완전히 다물어지지 못한 위호의 앞니 사이로 양손을 낀 설천위가 이를 악물었다.
뿌득! 뿌득!
어떻게든 완전히 다물려고 하는 위호의 턱을 억지로 비틀어 여는 과정에서 위호의 턱뼈와 근육이 부러지고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완전히 벌어진 턱을 붙잡고 그 너머로 보이는 달기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거기서 뭉개고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날 못 잡아.”
우드드득!
[키이야아악!]
괴성을 내지르는 위호의 턱을 그대로 더 벌려서 본래 벌어져야 할 각도, 인간이 양팔을 뻗어 도달 가능한 최대의 수준에 이른 순간, 설천위의 등에서 생겨난 칠흑의 팔이 단숨에 위호의 턱을 붙잡았다.
인간의 크기보다 월등히 큰 두 팔이 벌어지자, 결국 한계를 넘어선 위호의 턱이 뜯겨 나가듯 찢어졌고, 그 균열은 몸까지 이어져 끔찍한 참상을 만들어 냈다.
“혈주조차 나를 못 잡았는데, 이딴 장난 놀음으로 나를 잡겠다고?”
혈주는 가진 힘의 총량이 달기보다 적었지만, 그가 지닌 강함마저 달기보다 밑이라고 단언할 순 없는 존재다.
애당초 이 정도 영역에 들어선 존재들의 강함은 단순히 영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
“오만한 건 너다. 달기.”
웃으며 앞으로 걸어오는 설천위.
그 위압감에 짓눌린 망자들은 설천위를 막아 내지도 못하고 길을 내주었다.
달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위호들만이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냈지만, 그들과 연결된 달기의 정신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달려들지 못했다.
달려드는 순간, 찢겨 나갈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막지도 않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르르르.]
개가 된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위호 한 마리가 끝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단숨에 들이닥쳐 앞발을 휘두르는 위호.
그러나 이번엔 시작부터 모습을 드러낸 칠흑의 팔이 단숨에 위호의 앞발을 붙잡아 그대로 비틀어 버렸다.
[키아아오오오!]
애달픈 비명과 함께 발버둥치는 위호.
반대쪽 앞발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위호의 발악에도 덤덤하게 다른 팔을 움직인 설천위는 그대로 붙잡아 위호의 앞발을 짓이겼다.
그리고.
[……네놈.]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달기는 싸늘한 살기를 드러낸 눈동자로 설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먹어 치우고 있었구나. 네놈……!]
어째서 저놈은 영력이 끊임없이 솟아나는가.
어째서 저놈은 지치지 않는가.
달기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이제야 얻을 수 있었다.
설천위가 위호를 찢어발기기 위해 강한 힘을 쏟아 내는 순간, 설천위가 펼친 패도에 잡아먹혔던 망자들이 일순간에 소멸했다.
말 그대로 소멸.
즉, 설천위에게 잡아먹혀 한 줌의 영력으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치욕감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달기를 보며 설천위는 히죽 웃었다.
“네가 거기서 백날 뭉개고 있어 봤자, 날 못 잡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