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3화
602화-달기 (5)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설천위가 움직였다.
춤추는 인간들을 향해 달려든 설천위가 그대로 도를 휘두르자, 세상에는 순식간에 가로로 된 선이 생겨났다.
베이는 것과 함께 확 열린 시야 너머로 어느새 거리를 벌린 채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여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발을 붙잡는 삐쩍 마른 손에 설천위는 가차 없이 발을 들어 내려찍었다.
콰득!
뼈밖에 없던 손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으스러지고, 도를 쥔 설천위는 전진을 시작했다.
달려드는 인간들을 베어 내고, 남는 손으로 그 머리를 부순다.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설천위를 향해 삐쩍 마른 손들이 얽혀들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다리와 이빨을 비롯한 전신을 활용해 어떻게든 설천위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의 발악은 설천위에게 충분히 번거로움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너 어째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냐?”
[본녀가 하찮은 것들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라.]
“뻔뻔하네.”
하여튼, 제 고집에 사는 것들이 다 그렇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간 설천위는 달려드는 인간들을 하나씩 베어 내며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영역을 전개한 달기에게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영역에 순순히 들어온 설천위에게도 목적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달기의 짐작대로, 달기를 다른 이들과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다.
달기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영압은 영적인 단련을 거쳤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것이니까.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선 달기를 떨어트려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녀가 펼치는 영역은 그 역할에 딱 맞았다.
그다음으로 또 다른 이유는…….
“흠.”
순간 바닥에서 치솟은 불의 칼날에 고개를 틀어 피해 낸 설천위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달기와 눈이 마주쳤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차갑게 이쪽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불러낸 인형들이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음에도 그 어떤 동요도 없다.
‘……연옥이 열리기 전이라 내가 알던 것과 다를 수도 있겠군.’
다른 이들을 생각하다가 조금 섣불리 움직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설천위는 전진을 멈췄다.
애초에 이 무리를 아무리 베고 달려 봤자 달기에게까지 도달할 순 없다.
달기의 영역이란 그런 거니까.
절대자.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폭정을 일삼으며 세상을 좌지우지한 악녀.
그 정신이 실체화한 것이 이 영역이다.
그렇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쾅!!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등을 노리고 파고든 창을 쳐 낸 설천위는 눈앞에 나타난 거한의 모습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과연, 이런 느낌인가.”
전신에서 흐르는 파괴적인 기류.
높은 경지의 무술보다는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한 단련으로 끝을 본 무인의 그것이었다.
정의(正義)보다는 충심(忠心)을 우선시하며, 달기의 발을 닦았던 무인이겠지.
그 끝에 영원한 속박과 고통만 있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우직하고 무식한 사내였을 것이다.
카가가각!
옆에서 날아든 곡도를 막아 낸 설천위는 이번엔 그쪽을 바라봤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
이쪽은 자의로 기뻐하며 달기에게 동조한 쪽이네.
강한 힘을 가진 강자들의 등장은 그 둘을 시작으로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십 세대에 걸쳐 인간들을 지배하며 존재해 온 달기가 펼친 영역 속의 군세는 단순한 물량 공세가 아니었다.
혼을 짓누르는 영압.
끝없이 복구되는 적.
화경과 현경에 버금가는 강자들.
홀로 이 자리에 서는 순간, 죽음은 확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지독하고 강력한 영역이다.
콰득!
거한이 밟은 깡마른 인간이 뭉개지며 흘러나온 피가 청석을 타고 흘렀다.
그 피가 흘러, 거인의 육체를 채운다.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함께 다시금 돌진해 오는 거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재차 공격해 오는 다른 무인들까지.
순식간에 포위당한 설천위의 전신으로 갖가지 날붙이들이 달려들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상황.
“이 전개에는 고생 좀 했지.”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가 움직였다.
“뭐, 그것도 다 조잡한 스펙이었을 때 이야기지만.”
설천위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흑관의 파편이 모래처럼 움직여 그를 향한 공격을 막고 있었다.
모래처럼 흐르다가 상대의 무기를 휘감는 순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리는 흑관.
주변에 흐르는 영력의 흐름을 읽어 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까지 거기서 지켜만 볼 수 있을까?”
건물 위에 올라가 설천위를 내려다보던 달기는 그의 도발에 앞발을 휘둘렀다.
[영원히다. 애송이.]
네놈은 절대 내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애초에 그런 곳이니까.
* * *
설천위가 달기의 영역에 집어삼켜진 뒤에도, 밖에 남은 이들의 전투는 이어졌다.
애초에 끊길 이유가 없었기도 하고.
“후우, 정말 끈질기네요.”
[인간 놈들……!]
철백에게 붙들려 어떻게든 막고 있던 구복은 이를 갈며 자신의 목을 베는 여자를 노려봤다.
그 강렬한 시선에 어깨를 으쓱인 소윤혜는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서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거리.
구복이 발악하더라도 철백이 반응해 막아 줄 수 있는 절묘한 거리에 멈춰 서서 자세를 잡는 소윤혜의 모습은 너무나 덤덤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구복이라는 신의 영역에 발을 들였던 존재를 죽이는 일을 무슨 스승에게 받은 숙제를 하듯이 한단 말인가.
그 가증스러울 정도로 덤덤한 모습에 구복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을 이 인간들의 손에 죽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고도 이렇다 할 앙갚음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감히……!]
거기서 생겨나는 분노는 구복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위기감과 함께, 평생 겪어 본 적 없던 치욕이 가뜩이나 흐려진 그의 이성을 더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점점 더 버거워지는군.’
감정이 곧 힘으로 이어지는 괴이들이 많고, 구복도 그런 면이 있었기에 점차 과열되는 구복의 감정을 철백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속박을 풀기 위해 가해지는 힘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있나.
거기다.
‘역시 자세가 안 좋아.’
설천위의 일격에 실수로 구복을 놓친 뒤 어떻게든 다시 구복을 붙잡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자세가 영 좋지 못했다.
소윤혜가 거리를 벌린 상태로 참격을 날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팔과 팔을 엮어 놈을 묶어 놓은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발이 움직이니 쉽사리 자세를 바꾸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흡!”
놈의 옆구리에서 돋아나는 팔을 서하영의 창이 단숨에 잘라 냈다.
“진짜, 징그러워요.”
무슨 팔이 저렇게 돋아나냐고.
으으.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창을 휘둘러 떨어진 팔을 좁쌀만 한 조각으로 나눠 버린 서하영은 확실하게 거리를 벌린 채 구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두세 번 정도 남았을까요?”
“몰라.”
눈으로는 구복을 노려보며 묻는 서하영에게 짧게 대답한 소윤혜가 호흡을 내뱉었다.
“죽을 때까지 베면 될 뿐이야.”
호흡을 뱉어낸 소윤혜가 말을 내뱉었을 때.
[크아아아아아아아!!]
이미 도달한 참격에 목이 반쯤 베인 구복이 괴성을 내질렀다.
“점점 빨라지네요.”
“빠른 게 효율이 좋으니까. 무뎌지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에이, 그런 걱정 안 해요.”
히히 웃으며, 창을 내지르는 서하영.
발악하는 구복의 발이 난자되어 넝마처럼 변하고, 이번엔 어깨 위로 돋아나던 팔이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
피와 살점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철백을 서하영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웬만하면 피를 튀기지 않는 방식으로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정도로 무른 몸뚱이가 아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이 끝나면 직접 닦아 줘야지.
“다음, 바로 갈게.”
“언니.”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무리하는 게 아니긴, 딱 봐도 무리하고 있는데요. 뭘.”
창백해졌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로 다시 도를 쥐는 소윤혜의 모습에 서하영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녀를 강하게 말리지 못했다.
지금 당장 구복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자신도, 철백도 저런 존재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차라리 연화가 돌아와 준다면, 소윤혜가 조금은 쉴 수 있겠지만…….
‘언여휘를 막은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왜 안 돌아오는 거지?’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두 사람을 기다리며 마냥 일을 뒤로 미룰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철백의 몸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서하영은 다시 창을 세웠다.
한 번 속박이 풀린 구복을 붙잡기 위해 철백이 얼마나 무리를 했던가.
어떻게든 다시 붙잡은 지금 기세를 이어 나가 끝을 맺는 게 맞았다.
연화와 주현운을 향한 걱정은 잠시 접어 두자.
우선은 눈앞에 있는 적에게 집중하는 거다.
소윤혜가 최대한 힘을 아끼면서 놈을 벨 수 있도록, 적의 힘을 최대한 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발악하는 구복을 향해 서하영은 창을 휘둘렀다.
지독할 정도로 단단한 육체는 아무리 베고 찔러도 생채기 수준에 그쳤지만, 생채기라도 몇십, 몇백 번 후비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후비고 또 후벼서 상처를 벌리고, 벌리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터.
놈의 재생력을 뛰어넘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걸 해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철백이 놈을 붙잡아 주고 있는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한 이야기다.
놈도 그걸 알고 창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발도 움직이고 새로운 팔도 만들어 내고 있는 거지만…….
“진짜, 너무 질겨요.”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구복의 발악에 입술을 삐쭉이며 서하영이 창을 내질렀다.
창에 일어난 바람이 단숨에 구복의 다리를 헤집었다.
발악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무릎이 걸레짝이 되어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며 구복이 상체에 힘을 더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죽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면 정말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든 반복되는 흐름을 끊고, 상황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
설천위 놈의 공격으로 속박이 풀렸을 때,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지만 놈들의 일격이 너무 날카로웠다.
그때 만약 죽지 않고 떨어질 수 있었다면, 영역(靈域)을 펼칠 수 있었을 터인데.
죽음에 의해 흐려진 정신으론 제대로 된 영역을 펼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무인 나부랭이에 불과한 인간들은 영역만 펼친다면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거늘……!
이를 악문 구복이 어떻게든 정신력을 회복하기 위해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그때.
“후후, 고생 많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목소리와 함께 구복의 발악이 멎었다.
“빌렸던 걸 돌려주러 왔어. 난 줬다 뺏는 취미는 없거든.”
웃음과 함께 구복의 몸이 요동친다.
주황색으로 빛나던 가슴이 벌어지고, 짐승의 눈동자가 눈을 뜬다.
“언여휘!”
구복의 머리 위, 아무런 존재감 없이 나타난 여인을 발견한 서하영이 단숨에 창을 찔렀다.
지금 당장 구복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본능이 구복보다는 언여휘를 공격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 너 같은 쫄따구는 관심 없는데.”
허공을 유려하게 가르는 손짓과 함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진 듯 서하영의 창이 빗나갔다.
창술 하나만큼은 무림제일을 논해도 될 정도인 서하영에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실패.
“후우.”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여인은 천천히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하렴~. 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하늘로 떠오른 순간, 여인의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소윤혜의 참격 또한 공간이 비틀린 것처럼 빗나갔다.
“그럼 안녕~.”
느긋한 웃음과 함께 사라지는 여인.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완전히 괴물이 된 구복의 몸에서 터져 나온 영력이 주위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