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2화
601화-달기 (4)
영역(靈域).
말 그대로 영적인 땅을 의미하며, 당연하게도 현세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지는 않는 공간이다.
지맥이 뭉치거나 자연의 기(氣)가 모여 생기는 곳을 영역(靈域)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술사들이 말하는 영역(靈域)은 그것과는 개념이 달랐다.
글자 그대로 영혼(靈)이 깃든 땅(域).
그것이 술사들이 말하는 영역(靈域)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도 한 지역에 머무는 악령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다.
자신의 영력으로 영역(靈域)을 만들어 낸 악귀는 그 안에서 보다 강한 힘을 지니며 영감이 없는 인간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실체화할 수 있다.
악령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영역이 만들어 내는 힘은 더욱 거대해지고 선명해지며, 영력이라는 불가시(不可視)의 힘을 다루는 술사들의 자기암시를 방해했다.
자신을 확고히 믿는 것에서부터 힘을 만들어 내는 술사들에게 그것은 매우 큰 위협이었기에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발버둥이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그렇게 자신을 더욱 확고하게 믿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으로 악귀의 영역을 밀어내는 술사의 자성영역(自省靈域)이 등장했다.
악귀의 영역을 짓밟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힘.
악귀가 무의식으로 만들어 내는 영역은 술사의 확고한 정신력과 견고하게 짜인 술식 아래 완전히 짓밟혔다.
완벽하게 역전된 우열.
공략자이자 발악하는 존재였던 인간이 악귀의 머리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수백, 아니 천년도 더 전에 생겨난 이 변화에 악귀들 또한 발버둥쳤다.
무리를 짓지 않고 지식이 퍼져나가는 것이 극히 느린 악귀들의 세상이었지만, 악귀들에겐 인간에게 없는 영원함이 있었다.
지식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가진 존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그 결정적인 차이는 전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으나, 단일 개체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달기는 그 지대한 영향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길게 받은 존재 중 하나였다.
인간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의 오랜 시간 존재해 온 악귀.
백(魄), 원(怨), 귀(鬼), 재(災), 멸(滅)의 단계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멸(滅) 등급의 악귀.
그 악귀는 자신을 퇴마하러 온 수천의 술사들을 잡아먹으며 자신의 영역을 키웠다.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는 악귀의 영역(靈域)을 넘어, 인간 술사들처럼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그녀의 세상.
[후회할 것이다. 인간.]
그 안에 순순히 들어온 설천위를 보며 달기는 낮은 울음을 토해 냈다.
[오만하구나. 네놈의 능력은 분명 뛰어나나, 그래 봤자 고작 인간인 것을.]
기이한 빛으로 일렁이는 달기를 마주 보던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순순히 들어온 걸 후회할 거다, 뭐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네놈이 인간들 중에서는 특출 난 것이 확실하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오만한 것을 넘어서서 어이가 없는 수준이구나.]
영역이란 것은 결국 자리싸움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준비 태세를 갖춘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에 무방비로 들어온 인간 놈이 저리 여유로운 태도라니.
그저 오만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
물론.
“뭐, 확실히 느낌이 다르긴 하네.”
그럴 리가 없지.
덤덤하게 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들기는 설천위를 바라보는 달기의 눈은 이미 찐득한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심?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자성영역까지 펼칠 정도로 인정한 상대다.
상대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방심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달기는 자신이 펼친 영역의 힘을 다시금 확인했다.
설천위가 날뛰는 모습을 보고 영역을 펼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강한 힘으로 놈을 짓누르기 위해.
둘은 놈이 이 이상 힘을 보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다른 존재를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능력.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한 힘을 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특히, 그것이 뛰어난 술사라면 달기 정도 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무식하게 싸우면 그 끝을 자신할 수 없게 된다.
신(神)에 가까운 존재에게까지 인간의 손이 닿을 정도로, 무한정으로 보충되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다.
그렇기에 달기는 자신의 영역을 전개한 것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살아오며 축적되어 완성된 그녀만의 세상.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 내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것은 온전히 그녀가 만들어 낸 법칙뿐이다.
‘문제없군.’
영역 전체를 다시금 살핀 달기는 설천위가 수작을 부린 곳이 없음을 확인했다.
확실하게 외부와의 연결이 끊겼다.
이러면 제군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저놈만 처리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밖에서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아마 놈도 비슷한 생각이겠지.
자신만 가두면 밖에 있는 이들은 안전하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자신을 감당하기 위해 홀로 이 영역 안으로 순순히 들어온 것일 터.
‘그런 생각이 네놈을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영역이 완벽하게 펼쳐진 것을 확인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남은 것은 놈을 찢어발기는 일뿐.
달기의 의지에 반응한 세상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고, 대지가 펼쳐진다.
바닥에서부터 치솟은 건물들이 흙먼지를 뿌리며 자리를 잡았다.
장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환경으로 세상이 완전히 변한 것과 함께.
화르르륵!
세상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타오르는 파괴적인 광경과 함께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한 자신의 옷 위로 흑관을 겹쳤다.
달기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화염을 차단하고, 임시로 자신의 육체를 달기의 영역에서 분리시켰다.
“확실히.”
짜증 나는 공간이네.
들어온 모든 존재를 조건도, 전조도 없이 태우는 공간이라…….
지독한 세계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제대로 된 망종의 세계.
연옥이 열리면, 이 공간이 현실이 될 거라는 점이 참…….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흑도를 손에 쥔 채 옆에서 달려드는 여우를 베었다.
“후회할 거라더니, 하는 짓이 똑같은데?”
영역을 펼치기 전과 딱히 다른 점이 없었다.
조금 바뀐 거라곤 권능에 가까운 불길이 조금 더 강해졌다는 것 정도?
자성영역이라고 칭하기에는 무언가 많이 부족한 수준이다.
설천위의 도발에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달기는 그 몸에 화염을 휘감았다.
네 발에는 물론이고, 등과 몸을 타고 흐르는 불꽃.
약간의 붉은빛이 섞인 보라색 불꽃이 춤추자 세상을 태우던 불길도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러니 네놈을 오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덫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벌레 놈아.
으르렁거리는 달기의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고개가 꺾였다.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듯한 일격.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갑옷을 두르지 않은 머리를 노린 일격에 그대로 목이 꺾여 버린 설천위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과 동시에 달기가 움직였다.
거대한 몸으로 허공을 박차고 달려서 순식간에 설천위의 앞에 도달하는 달기.
보통의 인간이라면 목이 꺾인 순간 죽었을 테지만, 달기는 그렇게 안일한 사고 따윈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인정한 순간, 눈앞의 적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최소 악귀, 혹은 신에 버금가는 존재라 여기고 싸우는 것이 옳고, 그렇다면 고작 목을 조금 꺾은 것 정도는 결코 치명상이 될 수 없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설천위에게 달려든 달기는 그대로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에 깃든 화염이 궤적을 그리고 산조차 무너트릴 일격이 설천위에게 그대로 꽂힌다.
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한순간 확 하고 피어오른 화염의 폭발이 달기와 설천위를 집어삼켰다.
아주 잠깐 세상을 밝혔던 화염의 폭발이 지나가고.
“거, 뻐근하게 뭐 하는 짓이야.”
달기의 발톱을 막아 낸 설천위는 뻐근하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외부와의 연결을 끊은 건가? 내가 힘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꽤나 소심한 발악이네.”
달기의 발톱을 막아 낸 흑도에서 끈적이는 칠흑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 칠흑 속에서 솟구치는 망자의 팔이 달기의 앞발을 붙잡았다.
털과 가죽에 뒤엉키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 달기는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추잡한 힘이구나.]
자신의 앞발에 엉겨 붙은 칠흑을 불로 태워 버린 달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설천위를 살폈다.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멀쩡하기 그지없는 모습.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공격을 인간이 정면에서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막아 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단숨에 산을 무너트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그 힘을 받아 낼 수 있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전혀 없었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달기의 공격을 받아 내지 못했던 것은 그 괴력을 받아 내더라도 뒤이어 솟구치는 화염에 혼이 불탔기 때문이다.
육체의 괴력만으로는 혼을 지킬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 반대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혼을 지킬 수 있는 술사는 그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뭉개진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갖춘 인간은 양쪽 어디에도 통달하지 못한 어중간함 때문에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혼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육체는 망가져서 죽음에 이르렀다.
신화시대부터 살아왔던 달기로서는 고작 스물을 조금 넘긴 나이로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막아 낸 인간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보통 인간의 수명을 아득히 넘어 살 것이 분명한 이 어린놈이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아니, 100년이 지나면?
그때 이 세상에 과연 악귀라는 것이 존재할 순 있을까?
의문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곧 공포가 된다.
다시금 설천위를 짓밟기로 굳게 마음먹은 달기는 영역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킨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젠 남은 힘을 오로지 전투에 집중시킬 뿐이다.
[기뻐하여라. 인간.]
달기의 웃음소리와 함께 불타오르던 세상이 비틀렸다.
대지가 붉게 달아오르고, 세상이 흔들렸다.
고급스러운 청석이 깔린 대지 위로 삐쩍 마른 이들이 일어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불길 속에서 자신을 장작 삼아 몸을 흔드는 이들의 춤사위는 비참하고 가련했으나, 달기의 웃음은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본녀가 가장 좋아하는 무대이니.]
흔들리는 춤사위.
허름한 옷을 입은 농민들로 시작해서, 상인과 군인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불어나 대지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군.”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삐쩍 마른 사람들이 불길과 함께 몸을 흔드는 기괴한 광경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달기.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며, 잔인함을 미덕으로 삼는 악귀(惡鬼).
비참하고 지독한 악(惡)을 본질로 삼는 괴이이기에 그 영역은 상당히 고정적인 형태로 발현됐다.
설천위가 순순히 달기의 영역에 들어온 이유.
간단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경우 중간에서 탈락하는 언여휘와 달리, 달기는 최종 보스에 걸맞은 힘을 가진 존재다.
엔딩에 도달하다 보면 몇 번이고 연옥이 열린 뒤의 달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기쁘게 받아 가도록 하마.”
그렇기에 설천위는 달기가 영역으로 자신과 외부를 끊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