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9화
598화-달기 (1)
“귀찮게 하는군요.”
벌써 몇 번째였지.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위영제군을 죽인 유예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깨에서 난 상처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끝을 타고 떨어졌다.
몇 번이나 거듭되는 부활.
전투 경험이 이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드는 공격에 몇 번이나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
그나마 백유는 큰 상처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진짜 질척거리네, 이것들…….”
장수처럼 창을 쓰는 호무제군(虎武帝君)을 상대로 싸우던 백유가 적을 죽인 틈을 타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도 유예린처럼 몇 번이나 적을 죽인 상황.
하지만 계속해서 부활하는 적 때문에 체력과 심력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다.
게다가 유예린보다 먼저 전투에 참여했던 백유는 체력도, 내공도 어느 정도 소모된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게 문제인 것 같은데.”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눈짓으로 달기를 가리키는 백유의 말에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상황이 이런데,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도 이상하고요.”
아무리 유흥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켜만 본다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제군이라 불리는 저 괴물들이 끝없이 부활하는 것과 무언가 관계가 있을 터.
그 틈을 찾아내 찌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역시 강행 돌파가 맞나?”
“아뇨.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커요.”
혹시라도 달기가 함정을 준비했다면 그대로 붙잡혀 큰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최선은 설천위를 지키면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설천위가 적들의 술수를 막아 주고 있는 지금,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술법이 완성되는 것을.
언여휘가 어떻게든 술법을 완성해 조금이라도 상황의 흐름을 바꾼다면, 설천위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단숨에 배가된다.
그렇게 되면 설천위라도 끝내 대법의 완성을 막을 수 없게 되고, 연옥이 열리는 순간 저 밑에서 철백, 서하영, 소윤혜에게 합공당해 썰리고 있는 구복은 물론이고 눈앞의 달기마저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 될 터.
놈들이 기다리는 것은 언여휘의 성공이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문제는 이쪽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설천위가 어떻게든 대법을 찍어 눌러서 막아 내고, 합류해 주는 것.
술법에 실패한 언여휘가 싸움에서 이탈하고, 설천위가 이쪽에 합류한다.
이것이 지금 이쪽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흐름이었다.
문제는…….
‘……무능해.’
이 경지에 올라서도 고작 한다는 것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그가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고 할까.
스스로가 한심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평생을 지켜 줄 것이라 스스로 맹세했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설천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던 대로 갑니다. 저 제군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죠.”
이쪽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것뿐이다.
* * *
백유와 유예린이 달기가 불러낸 제군들과 싸우고 있을 때.
문율은 설천위의 곁에서 다가오는 축생의 적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저 밑에서 동료들이 구복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구복이라는 괴물의 발악이 점점 더 거세지면서 적을 죽이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어도 문율은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해 한심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유예린은 팔까지 잘렸었다.
운 좋게 그 실수를 설천위가 만회해 주었지만, 다음에 할 실수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실수하지 않는다.
내가 강해지려 노력하고 꾸역꾸역 이 자리까지 올라선 이유는 모두 설천위의 등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지금 그 등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문율은 점점 더 뜸해지는 괴물들의 숫자에 더욱더 날카롭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이 쉬워진다고 느껴질 때가 인간이 가장 방심하는 때이고, 실수는 바로 그런 순간에 나오는 법이니까.
한껏 긴장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인 덕일까.
문율은 그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할 수 있었다.
수백의 팔이 순식간에 설천위를 휘감는다.
뜬금없는 힘의 낭비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며 놀랄 사람도 없을 정도로 재빠른 반응.
단숨에 설천위를 휘감은 팔들이 단단하게 설천위를 감싸는 그 순간.
찌지이이익!
설천위를 휘감은 팔을 찢어 낸 발톱이 날카롭게 빛났다.
수백이 아니라 수십을 겹쳤더라면.
‘뚫렸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함께 문율은 양팔을 들어 올렸다.
가슴을 가리는, 본능에 의한 방어.
설천위를 가르는 데 실패한 부정형의 발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그대로 문율을 덮쳤다.
양팔을 가르고 지나가는 발톱.
그 상처를 타고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문 문율은 다시금 만들어 낸 팔을 이용해 반격했다.
팔의 시작점.
부정형의 무언가를 향해 전력으로 손을 뻗었다.
주먹, 손바닥, 지르기 등등 수많은 형태를 한 공격이 단숨에 대상을 휩쓸었다.
그 어떤 것도 허초가 아니고 모든 것이 진짜인 공격.
방어에 실패한 순간 걸레짝이 될 것이 뻔한 공격이었으나, 상대는 어떤 방어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 낼 뿐.
자신의 손들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을 깨달은 문율은 두 눈을 부릅떴다.
실체가 없다.
방어에는 실체가 없고, 공격에는 실체가 있다.
이 무슨 부조리한…….
[쯧, 짜증 나는구나.]
말이 안 되는 상대의 대처에 문율이 고민에 빠진 그 순간,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와 함께 부정형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것이 달기가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달은 문율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그 잡것이 자신의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어.]
짜증이 담긴 달기의 목소리와 함께 문율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없었다.
분명 사방에 가득 차 있었던 혼들이.
대법에 의해 솟구치던 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대법은 끝났다.
그렇단 말은?
“진짜, 더럽게 힘드네.”
“단주님!”
뒤에서 들린 놀랍도록 반가운 목소리에 문율이 환호했다.
그리고 그런 문율의 반응에 상황을 눈치챈 다른 이들 또한 입꼬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도 부활이다. 이놈들아.”
* * *
“으으음…….”
“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요?”
“흐음.”
언여휘의 인형들을 찾아내 파괴하던 주현운과 연화는 도중에 쓰러져 있던 무림맹의 무인을 발견했다.
이미 열이 넘는 인형을 처리한 상태.
대법이 끝난 직후 본체로 돌아가는 혼을 따라 움직여 무림맹 무인의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연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단주님이 성공한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네.”
인형의 숫자가 줄어듦에 따라 설천위가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은데.”
다만, 본능이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언여휘다.
지독할 정도로 지겹게 따라붙어 일을 벌이는 괴물.
그 괴물이 고작 이 정도로 끝났다고?
설천위가 대단하긴 해도 철저하게 불리한 상황에서 이토록 간단히 대법을 파훼했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일단, 조금 더 주위를 살피자.”
“네? 바로 합류 안 하고요?”
“대법이 실패했다는 말은 설 형이 깨어났을 거라는 소리니까. 그쪽으로 굳이 합류할 필요는 없지.”
“아하.”
납득이 가는 설명이군.
주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군말 없이 주현운을 따라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을 언여휘의 인형을 찾아서.
“이것도 비어 있군.”
영력이 느껴지지 않아 기억을 더듬어 그 자리를 찾은 주현운과 연화는 비어 있는 인형만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법의 실패 때문인가 생각했고.
두 번째는 이상함을 느꼈고.
세 번째는 확신을 가졌다.
“언여휘가 도망쳤어.”
“네?”
“인형을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혼을 빼 갈 이유는 단 하나야.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거.”
영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언여휘는 어째서 도망쳤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조금 더 도시를 돌아다니던 주현운은 이내 깨달았다.
“……축생의 유정들이 없군.”
도시를 파괴하던, 가장 기본적인 적들이 사라져 있었다.
* * *
설천위의 등장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달기도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달기가 평상시의 태도와 달리 언여휘와 구복을 도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화에게 깃든 혈주의 힘이 탐이 나서.
둘은 설천위에게서 위협을 느껴서.
‘여기에 없는 놈들은 모르겠지.’
지금 얼마나 강한 괴물을 방치하고 있는지.
저 괴물이 완성되는 순간, 이쪽의 대업은 수백 년이나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연옥을 연다?
저 괴물이 버티고 있는 이 중원에서 과연 저 괴물의 눈을 피해 연옥을 열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연옥을 열기 위해서 필요한 제물의 숫자는 최소 수만에서 십수만에 이른다.
그만한 인간의 희생을 들키지 않고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괴물은 전이문까지 익혀서 이동이 자유로우니 놈이 완성되는 순간 연옥을 연다는 것은 허망한 꿈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저런 괴물을 방치하고 도망친다?
족히 수백 년은 숨을 죽이고 공포에 떨어야 할 게 뻔했다.
완성된 괴물이 언제 찾아와 자신을 죽이려 들지 모르니까.
그러니.
[이 자리에서 치워 주마.]
달기는 힘을 감추지 않았다.
제군들을 살리던 힘마저 회수한 달기가 부채를 펼쳤다.
부정형의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타오르듯 솟구치는 동시에 막대한 영압이 사방을 짓눌렀다.
“흡!”
몸을 짓누르는 힘에 당황한 문율이 두 눈을 부릅떴다.
보통의 영압과는 명백히 다른, 혼을 꺾는 듯한 무시무시한 영압.
그 안에 담긴 것이 신성이라는 것은 몰랐으나, 문율의 혼은 본능적으로 그 힘에 저항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꿇어라. 잡것들아.]
오만하게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달기의 기세가 한층 더 강렬하게 세상을 짓눌렀다.
이형의 존재에서 시작해, 그 미모로 황제마저 속이고 세상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괴이.
그 잔인한 행적은 전설이 되어 전해져 내려오며 끝내 사람들에게 악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괴이.
인간의 두려움에는 힘이 있고,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 공포를 받아먹은 달기는 연옥에 힘을 대부분 뺏긴 존재들 사이에서도 으뜸가는 강함을 지닌 존재였다.
아예 모든 것이 연옥에 처박힌 다른 괴물들과 달리, 인세에 남아 공포를 먹고 힘을 회복한 괴이.
[네깟 놈들이 고개를 쳐들고 봐도 되는 존안이 아니니라.]
그 괴이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이곳에 있는 인간들의 고개를 짓누르려는 그 순간.
“그건 아줌마 생각이고.”
그 공포를 집어삼킨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뻗어 나온 힘이 달기의 기세를 밀어냈다.
[……네놈.]
인간이 순수하게 기세만으로 자신의 영압을 밀어내자, 말문이 막힌 달기가 죽일 듯 설천위를 노려봤다. 하지만, 설천위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영력의 소모는 극심했다.
아마 회복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거다.
안에 가두고 있던 혼들도 겁나 쥐어짰으니 회복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
그렇기에 지금 쓸 수 있는 수가 이것 정도밖에 없었다.
위기 상황에는 역시 스킬만 한 게 없지.
옛날, 패기를 상급에 올렸을 때 첫 조각을 얻었고, 후에 수많은 일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얻어서 완성된 힘.
그 조건은 크게 세 가지.
상급 이상의 패기 스탯.
천 이상의 살육.
천 이상의 지배.
그것은 악(惡)이자 영웅(英雄)이니.
[천하패도(天下覇道)]
설천위의 발아래로 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