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6화
595화-불가능을 가능으로 (8)
“흐으응?”
제도의 한 전각 위.
달려드는 적을 베며 움직이던 살존은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일인자 자리를 뺏긴 것 같은 기분이……?”
“시답잖은 장난은 그만 쳐라. 나잇값은 여전히 못 하는군.”
“흥, 여자는 평생을 여인으로 살아가는 법이야. 홀아비.”
“결혼 자체를 안 해서 자식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홀아비라는 거냐.”
“제자가 있잖아. 자식이나 제자나 거기서 거기지.”
음, 일리가 있군.
살존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사존은 이내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자식이 있고 없고와는 다른 얘기잖나.”
“흐응~. 당신도 옛날이랑 다르네. 옛날에는 전장에 서면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적을 쓸어버리는 데만 집중했던 양반이.”
“여유가 생겼을 뿐이다.”
“그때도 강하긴 더럽게 강했으면서.”
전면전으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어서 암살 의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좀 했었지.
아주 먼 옛날, 손에 꼽을 정도로 희미했던 전투의 기억을 떠올리던 살존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금 정도의 상황이면 여유가 생길 법도 한가.”
“적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군.”
사존의 말대로 지금 사천맹이 맡은 구역은 얼추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적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줄어든 것 덕분이라는 점이라고 해야 할까.
“어린놈들이 빠져서 자빠져 자기나 하고. 세상 참 말세야~.”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살존의 말처럼 사천맹의 하급 무사들 중 상당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언여휘가 펼친 대법의 영향이다.
혼이 빠져나간 병사들을 챙기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데도 상당한 수고가 들었지.
물론.
“우리가 전장에 나서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상황이 변한다는 건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드는군.”
본래라면 전투가 끝에 다다를 때쯤에서야 전장에 나섰을 현경과 화경급 고수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자, 사망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보통 사천맹의 전투는 사망자가 많은 편인데, 이번에는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망자가 적었다.
“늙은이들의 똥고집에 여태껏 젊은 피가 흘렀다는 증거지.”
“……흥.”
“백유, 그 아이도 좀 변한 것 같아.”
“변한 것 같은 게 아니라 변했다.”
타오르는 파멸의 피.
투쟁을 추구하며 그 끝에 있을 승리와 피로만 목을 축일 수 있는 혼.
사파의 강자들이란 대부분 그런 괴인들이고, 사존 또한 그러했다.
하물며, 광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흑수단주를 단주로 채용한 이유도 그런 광기가 별다른 흠이 아니라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던가.
평생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고작 남편의 죽음 따위에 풀 죽어 틀어박힌 살존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유를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가 나타났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무공을 전수했다.
그것이 당연했고, 사파의 지존이라면 사파의 정점에 설 존재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 이번에는 다들 열심히 좀 움직여 줘.’
설천위의 식령이 전해 준 소식에 전투 준비에 들어간 시점.
간부들을 모두 모아 놓고 내뱉은 백유의 말에 사존은 조금 실망했었다.
‘최대한 아무도 죽지 않는 전투가 됐으면 하니까 나중에 집계해서 가장 많이 죽은 단의 단주는 엎드려뻗쳐 놓고 몽둥이질을 할 거야.’
히죽 웃으며, 부하들을 살리라고 말하는 백유의 태도는 너무나도 물러 보였다.
사파라면 아니, 칼밥 먹고사는 무인이라면 죽음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사파의 지존이라는 자리에 오른 녀석이 그런 소리를…….
조금은 실망했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은거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전장에 섰는데.
“똑똑한 아이야.”
“백유, 그 아이가 머리가 좋긴 하죠.”
“시대의 흐름을 탈 줄 아는 건 머리가 좋은 것과 다르지.”
백유는 그런 계산 따위 하지 않고 그저 설천위가 좋아서 그의 방식을 따르려고 한 것뿐이겠지만, 사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저 괴물 녀석의 시대겠지.”
앞으로 향후 백 년의 무림은 설천위의 영향 아래 들어갈 거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림의 도리가 되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림의 법도가 될 거다.
당장 저 멀리 보이는 반짝이는 머리를 봐라.
저 미친 중놈은 이 상황에서도 적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제압하고 있었다.
사지를 전부 으스러트리고, 몸의 핵심이 되는 기혈을 비틀어 버렸지만, 뭐 일단 숨은 붙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저런 미친 광경도 설천위가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천위가 없었다면, 저 중도 결국 자신의 동료를 지키기 위해 적을 죽였을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지금부터 적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농사짓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모르겠군.”
“응? 알려 줄까? 은거하면서 나름 이것저것 키워 봤는데.”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어차피 은거하면 심심할 테니 말 상대 정도는 있는 게 낫겠군.”
“살궁으로 와. 이 전투가 끝나면 기어코 승부를 본다고 했으니, 한동안은 혼자 살아야 할 것 같거든.”
“생각해 보마.”
살존의 긍정에 고개를 끄덕인 사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저쪽을 해결할 차례군.”
“그러게. 꽤나 오래 기다렸는데, 황궁 놈들은 발이 너무 느려.”
“갑옷을 입은 병사가 무인만큼 빠르다면, 그건 무인이 단련을 소홀히 한 탓이겠지.”
성벽 넘어, 그야말로 개떼라는 상스러운 말이 어울리는 군대와 마주한 사존과 살존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혈패황 그자는 홀로 만을 쓰러트렸다고 했던가.”
“정예 중 정예로 만이라…….”
진짜 사람이 할 짓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거.
어깨를 으쓱인 살존은 가볍게 발을 굴러 성벽에 도달했다.
“역시, 준비된 거겠지?”
텅 비어 있는 성벽 위.
아마 대부분이 쓰러져 저 대법에 혼을 잡아먹힌 것이리라.
아니, 잡아먹히고 있는 중일 것이다.
대법이 멈춘 건 설천위가 손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자, 그럼 일단…….”
한 사람당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막을까?
일기당만(一騎當萬)은 힘들겠지만, 일기당천(一騎當千)쯤은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성벽 위에서 각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맡아야 할지 재던 사존과 살존은 성벽을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병력이 벌써 들어왔을 리가 없는…….
“크으으윽!!”
이를 악물고 달리는 병사.
성벽 위를 달리고 있는 병사의 몸놀림은 꽤나 단련된 무인의 그것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올라선 황보중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던 그자의 의지를 되새겨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자의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성벽 위를 질주하며 부하들을 다독이는 황보중.
심지어 사이사이 인원 배치의 지시까지 내리는 그의 모습에 사존은 솔직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무식하게 권위나 내세우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능력 있군.”
“옛날에 전장에서 무식하게 싸우다가 피를 봤던 게 사무쳤었나?”
지휘 능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네.
아니면 가주를 맡으면서 늘어난 지도력 덕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황보중의 모습에 사존과 살존은 솔직하게 감탄을 내뱉다가 이내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럼, 뒤는 저들에게 맡기는 거로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날뛰는 게 가장 좋겠네.”
* * *
접근하는 황궁의 병사들로 인해 제도의 전투는 그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성벽을 두고 싸우는 공성전.
본래라면 텅텅 빈 성벽의 성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왔어야 할 병력이었으나, 한 사내가 자신의 혼을 비틀어 들여보내 준 황보중의 별동대가 성벽을 차지해 버리면서 자연스럽게 공성전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공성전을 상정 못 한 황궁의 병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의문의 고수들까지 날뛰기 시작하자 제도를 향해 전진하던 황궁의 병력은 단숨에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깔끔하네.”
우연찮게 북쪽 성문을 맡게 된 설천운은 성벽 너머로 보이는 적들이 아버지가 만들어 낸 거대한 빙산 앞에 막힌 것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천외천이라고 해야 하나.
큰 사상자 없이 저렇게 막아 내는 건 아버지 정도 되는 무인이나 가능한 방식이다.
“너는 저쪽으로 안 가도 되겠느냐?”
“제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오라버니.”
설천운의 옆, 설천위의 수행을 깨고 나온 설란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벽을 넘었다고 해서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거든요.”
“하! 진짜, 말로 표현하기 힘들구나.”
내 여동생이 나보다 강해졌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여동생이 엄두도 못 낼 전장의 중심에 막내가 있다는 것이.
어린 시절, 항상 움츠려 있던 그 아이가…….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과연.”
세상사는 변화가 많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운은 다시 성벽에 집중했다.
지금 외부의 병력을 아버지가 크게 저지하긴 했지만, 아버지라고 모든 땅을 얼려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빙산을 돈 병력은 결국 이 성벽에 도달할 것이고, 그러면 전투는 벌어진다.
패력단주가 데려온 별동대는 소수.
이 넓은 성벽을 그들만의 힘으로 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지시를!”
“전원 던질 것을 준비해 주십시오!”
이런 전투의 경험이 뛰어난 군부 출신 장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움직이기로 한 무인들은 성벽에 자리 잡고 공성전을 준비했다.
제도의 싸움은 제2막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하찮은 것들이 발악하는구나.]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려 나뒹구는 구복의 시체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달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아는 아이로구나.]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유예린을 칭찬하며, 달기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하지만, 괴이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것 같구나.]
구복(九復).
그것은 아홉 번 세상을 뒤집는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크르르르르르르…….]
아홉 번 돌아온다는 의미도 있었다.
구복이 다른 형제들을 전부 잃으면서도 자신만큼은 살아남아 심장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그는 자연에서 탄생한 수많은 괴이 중에서도 가장 불사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일어선 구복의 목이 또다시 떨어졌다.
심장을 헤집어 쓰러지는 육체 위로 구슬픈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맑은 소리를 내는 풍령처럼.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콰득!
피가 솟구친다.
“아홉 번, 아니 그건 아니겠지요. 신화시대에 살아남으며 몇 개나 목숨을 썼을 테니.”
구복의 시체 위에서 또다시 흩어져 가는 유예린의 목소리가 그 신형처럼 바람에 흩어진다.
“많아 봐야 일곱 번. 적으면 두세 번 안에도 끝날 테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진 유예린의 모습 위로 흐릿한 목소리만이 잔잔히 퍼져나갔다.
서걱!
눈을 감고 술법을 펼치던 언여휘의 인형이 목이 잘려 땅으로 떨어진다.
“소 언니, 하영아.”
“응.”
“네. 언니.”
“나머지 횟수는 맡길게.”
싸움을 이어 가던 소윤혜와 서하영을 철백에게 붙인 유예린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허공을 거닐었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허공을 걸어 사라진다.
그리고.
“주 소협과 연화는 언여휘의 인형들을 처리해 주세요.”
“예.”
“넵!”
주현운과 연화를 보내고, 설천위를 중심으로 그 반경 3장 이내에 있던 모든 존재들을 보이지 않는 참격으로 베어 버린 유예린은 설천위의 앞에 섰다.
“문율, 당신은 전체적인 보조를.”
“네.”
유예린의 지시에 자연스럽게 설천위의 곁으로 다가온 문율이 천수를 펼쳐 자잘한 적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백유.”
“응?”
“당신은 저와 함께 바깥사람을 지키죠.”
“오, 두 번째 공동 작업인가?”
“……천박해요.”
차마 첫 공동 작업은 뭐냐고 되묻지 못한 유예린은 한숨과 함께 소검을 꺼냈다.
“그럼, 목표를 정하죠. 버티느냐, 처리하느냐.”
유예린의 물음에 어느새 그녀의 곁까지 다가온 백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연히, 처리하는 거지.”
최고의 호위는 적을 사전에 모두 말살하는 것이다, 라는 말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