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5화
594화-불가능을 가능으로 (7)
‘……더럽게 빡세네.’
완벽한 명상의 상태에 돌입한 설천위는 세상을 눈이 아니라 영력으로 보고 있었다.
언젠가 연화가 돌입해 우공의 공간 속에 있던 오시를 감지해 냈던 그때 그녀가 펼쳤던 것이 바로 지금 설천위가 사용하고 있는 감각의 일종이다.
물론, 지금 설천위가 펼치고 있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이지만.
‘많기도 많네.’
제도 전체에 펼쳐진 대법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족히 수만.
그들 하나하나를 모두 감싸 보호한 뒤에 자신의 힘으로 찍어 눌러 대법을 부수는 방식은 설천위 자신이 생각해도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이지만…….
‘까득!’
이것밖에 답이 없었다.
지금 내면세계에서 아우성치는 다른 혼들의 외침을 듣지 못할 정도로 극한에 몰린 설천위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영력이 부족하다는 감각을 느끼며, 설천위는 대법의 파훼에 더더욱 몰두했다.
그리고 끝내 그 가락을 잡아 대법을 몰아붙여서 그 끝이 보이려던 순간.
쿵!
세상을 뒤흔드는 강렬한 영압의 존재와 함께 자신이 만들어 낸 우위가 단숨에 사라진 것을 깨달은 설천위의 속이 단숨에 뒤집혔다.
‘누구지? 이 느낌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낯이 익는 영력.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전에 황궁에 기둥을 떨굴 때 나타나서 막았던 그 힘과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초월자급의 괴물 하나가 더 나타났다.
심지어 자신을 방해하면서.
거기다.
‘왜 이렇게 강하지?’
구복도 그렇고, 혈주도 그렇고.
신화시대 이후 초월자라 불러도 마땅한 존재들은 그 힘을 상당수 잃어버렸다.
대표적으로 혈주와 구복이 그러했다.
당장 자신의 육체를 연옥에 빼앗긴 두 존재는 전성기 시절의 반의반도 안 되는 힘밖에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설천위가 이를 악물고 연옥이 열리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새로운 적의 힘은 아무리 봐도 혈주나 구복을 가볍게 뛰어넘은 수준이다.
최소 두 배.
잘하면 세 배 이상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영력.
거기에서 느껴지는 영력의 질이 보통의 악귀들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권능이 영력 자체에 배어 있는 것처럼 기이한 신력 같은 것이 느껴지는…….
‘아.’
순간, 가장 높은 가능성을 떠올린 설천위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초월자들은 접근하지 않는데, 언여휘와 구복이 주축이 되는 계획에 고개를 내밀 만한 존재이면서 그 둘보다 확연하게 강한 힘을 보유한 초월자.
하나밖에 없었다.
달기.
사혈천의 수장이자 십이군을 만들고, 술사들을 이용해 강시와 괴이를 부리는 악녀.
고대에 인간을 타락시키고 고문하는 것을 유흥으로 살아온 뒤틀린 쾌락 중독자.
그렇기에 지루함을 견뎌 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스스로가 아닌 부정형의 존재로 지내며 억지로 시간을 때우는 괴짜.
그런 괴짜가 직접 몸을 움직여 이곳에 나타났다.
무엇 때문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달기로 추정되는 존재를 면밀하게 관찰한 설천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혈주의 힘.’
자신이 연화에게 나눠 주었던 그 힘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달기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피에 환장하는 그 괴물의 성격상, 피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혈주의 힘은 꽤나 탐나는 장난감일 테니까.
연화 정도라면 통째로 집어삼켜도 문제없을 테고.
달기의 개입과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사혈천의 병력.
‘……위험한데.’
조금 전에 자신을 공격했던 악귀를 백유가 쫓아내긴 했지만, 달기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제 그런 장난 같은 공격으론 끝나지 않을 거다.
본격적인 악귀들의 공세가 시작되면…….
‘막을 수 있을까?’
무인이라는 본질을 가진 자신의 동료들이 버틸 수 있을까?
심지어 유일한 술사인 연화는 달기에게 노골적으로 노려져 손발이 묶일 텐데?
거기다 철백이 묶어 두고 있던 구복마저 빠져나와 자유를 되찾은 지금 이쪽의 열세는 확실해졌다.
달기가 본격적으로 힘을 쏟아 내지 않더라도, 이쪽이 확실하게 불리하다.
거기다.
‘장난질을……!’
대법을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한 연여휘 때문에 설천위 자신도 손을 뗄 수 없게 됐다.
지금 이 대법을 막지 못하면 달기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언여휘, 나아가 구복까지 지금의 달기 이상의 괴물이 될 터.
그 최악을 막지 못한다면 어차피 미래는 없다.
이를 악물고 막아야 한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쥐어짜서 도움을 주는 것도 생각해 봐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동료를 챙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무리지만…….
불가능한 걸 가능으로.
그 길을 관철하기로 한 이상, 불가능할 것 같다고 물러나는 일 따윈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조금 더 쥐어짜서……. 음?’
자신의 혼까지 쥐어짤 생각을 하고 영력을 움직이려던 그 순간.
설천위는 기이한 감각에 사고를 멈췄다.
그리고.
‘하.’
헛웃음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다시 대법의 저지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완벽한 결말을 위해.
모든 것은.
‘너와의 앞날을 위해.’
나올 거면 조금 더 일찍 나와 줘.
* * *
기묘한 대치.
언여휘가 본격적으로 설천위를 방해하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축생의 곤옥이 만들어 내는 괴물의 숫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육도의 힘을 섬세하게 제어해 동물들이 터지지 않게 괴물로 바꾸는 건 상당한 실력을 요하는 일이었으니까.
얼떨결에 그 일을 맡게 된 우공이 언여휘와 같은 속도로 괴물을 찍어 낸다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결 여유가 생긴 일행은 자연스럽게 설천위를 중심으로 모였다.
“아으으, 힘들어요.”
“하핫!! 얘는 귀엽네!”
주현운과 소윤혜에게 구조되어 설천위의 곁에까지 올 수 있었던 연화는 백유의 거친 손길에 그만 볼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연화의 볼을 마음껏 주물럭거린 백유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딱히 없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베어 낼 뿐이지.”
“휘익~! 역시 천위의 친구들이야. 마음에 드는 대답들을 해 주네.”
단순한 계획에 가벼운 휘파람과 함께 단검을 꺼내든 백유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내가 날뛸 순번이야.”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백유가 가볍게 도약하는 순간, 적들이 움직였다.
축생의 괴물들에 더해 사혈천의 악귀들까지 뒤섞인 전장.
하지만 고작해야 잡졸에 불과한 적들이 백유의 돌진을 막을 순 없었다.
단숨에 썰리고 토막 나서 땅으로 추락하는 축생의 괴물들과 악귀들.
특히, 언여휘가 본격적으로 설천위를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허공에 만들어 놓은 발판들을 회수한 탓에 축생의 괴물들 중 상당수는 단순 도약의 형태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궤도를 정해 놓고 뛰어오르는 적들이야 백유의 눈엔 정지한 목표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백유가 잡은 기세를 타고 뒤이어 합류한 소윤혜와 문율의 공격이 적을 쓸어버린다.
[와라!!]
그리고 그 틈바구니를 뚫고 나타난 구복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철백이 뛰쳐나갔다.
단숨에 허공에서 얽힌 둘이 몇 번의 손과 발을 섞었다.
때리고 잡는, 기본적인 근접 체술의 전투가 지나고.
쿵!!
묵직한 굉음과 함께 땅으로 떨어진 둘은 본격적으로 대지에 발을 딛고 싸움을 시작했다.
초근접전으로 펼치는 난투전.
조금 전까지 물고 붙잡고 싸우던 둘이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저리 엉켜서 싸우는지…….
이번엔 서하영마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쪽은 철백에게 맡기자.
모두가 그렇게 정했고, 반대쪽도 그러했는지 두 세력의 전투는 허공에 집중됐다.
언여휘를 노리고 설천위를 지키는 설천위 일행.
설천위를 노리고 언여휘를 지키는 달기.
이 두 집단의 싸움이 단숨에 격화되기 시작했고.
[제군들이여.]
달기가 기어코 자신의 친위대를 불러들였다.
“흐응? 너 아까 걔구나?”
자신의 앞에 나타난 무형의 존재를 마주한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분명 설천위를 기습했던 은신에 특화된 것 같았던 존재.
과연 제군이라고 하나.
[위영제군(僞影帝君)이다.]
스산한 목소리.
흘러가는 듯한 그 목소리에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오만하네! 제군(帝君)이라 자칭하는가?”
[그분의 바로 밑에 있는 우리에게 당연한 칭호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위영제군의 목소리엔 오만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기에 백유는 더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과연, 그 정도로 미친년이라는 거지? 저 아줌마가.”
[말을 가려라. 계집.]
“자기도 계집이라고 하면서 뭐라는 거야. 사서삼경 안 배웠어? 예의란 자신이 타인을 존중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짧은 훈계와 함께, 단숨에 벼락이 된 백유의 몸이 위영제군을 갈랐다.
[그런 너도 예의라곤 없군.]
흩어진 그림자가 다시 뒤섞이며 형체를 잡아가는 위영제군의 목소리에 백유는 히죽 웃으며 자신의 옆으로 뛰어오른 축생의 괴물을 썰어 버렸다.
“눈치는 빠른 것 같네?”
* * *
“사서삼경이라…….”
“그 말을 저 여자가 할 줄은 몰랐는데요.”
사파의 맹주가 사서삼경을 읊을 줄이야.
서하영의 감탄에 연화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이 들었던 정보를 꺼냈다.
“듣자 하니, 학식이 꽤나 깊다고 하던데요.”
“……진짜?”
“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한두 번 읽은 건 전부 머릿속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할아버지들한테 들었어요.”
“아.”
별거 아니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이 괴물 같은 녀석이?’
주현운의 짧은 수긍에 서하영은 눈을 게슴츠레 떴지만, 딱히 입을 열진 않았다.
자신이 동료들 중에선 머리가 나쁜 편에 속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타고난 육체파인 자신과 다르게 주현운, 유예린은 말할 것도 없고 문율과 소윤혜까지 두뇌로도 충분히 천재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간들이었다.
주현운이나 유예린처럼 한 번 보고 전부 외우는 것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두 사람도 서너 번 보면 외우는 천재들이니까.
심지어 철백도 암기력은…….
‘그만하자.’
응. 생각하지 말자.
더럽고 치사한 천재들과 머리로 비비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야.
지금 중요한 건 눈앞에 닥친 전투지 실없는 생각이 아니다.
각오를 다지며 창을 쥐고 밑에서 솟구치던 축생의 괴물을 꼬챙이로 만들어 버린 서하영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없네?’
막 깨어났을 시점에 자신이 가장 먼저 깨어났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연화야, 마지막에 술법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야?”
“네? 아…… 전데요?”
“그럼 언니는?”
언니?
일행 중 여자는 전부 언니인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손바닥을 쳤다.
“그러고 보니 유…….”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지금 꺼내선 안 될 것 같다는 본능 단계의 자극이 연화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쾅! 쾅!
굉음이 터져 나오는 지상의 전투가 일순간의 정적에 들어갔다.
구복과 철백이 힘 싸움을 하는 단계.
몇 번이고 반복된, 각자 서로를 붙잡고 정지한 상태.
둘의 전투에서 몇 번이고 나왔던 구도.
이대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끝내 구복이 포기하고 다시 난타전에 돌입한다.
그렇기에 그 둘이 멈춰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길어야 2~3초 정도.
초고속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빈틈은 극히 짧았고…….
“후우.”
죽음 또한, 극히 짧았다.
뎅겅 잘려 나간 구복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소매에서 빠져나온 소검이 구복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털썩 쓰러지는 구복의 시체 뒤로 소검을 갈무리한 유예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 소협, 찾아 주세요.”
다시금 흐릿하게 사라지는 유예린의 모습과 함께.
“이 도시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여휘의 인형이 없어질 때까지.”
새로이 태어난 암살의 여신이 언여휘의 죽음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