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2화
591화-불가능을 가능으로 (4)
희미해졌던 의식이 돌아온다.
뿌옇게 변했던 무언가가 점차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선명한 무언가가 찾아온다.
또렷해지는 의식과 함께 찾아온 것은 고통이었다.
통증.
연옥에 대부분의 육체를 빼앗긴 뒤로는 제대로 느껴 본 적 없던 감각.
연옥이 열린 것인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통증은 선명하고 아주 강렬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심장이 요동친다.
피를 쥐어짜듯 고통을 쥐어짠 심장의 맥동을 따라, 아픔이 퍼져나간다.
거짓된 머리가 찌릿해지는 것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시야 가득 차오른다.
콰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암흑이 찾아왔으나, 선명해진 의식은 그것이 찰나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시킨다.
튕겨 나가려는 목을 억지로 지탱한다.
뒤이어 멀어지는 주먹이 사라지고 선명해진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철백.
자신의 형제를 먹어 치운 인간.
고작 인간 따위에게 자신의 형제가 먹혔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설천위라는 괴물 놈이 도움을 주었겠거니…… 그리 생각했으나.
‘과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공격을 위해 주먹을 내지르는 철백의 두 눈과 마주한 구복은 납득해 버렸다.
설령 설천위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내 형제는 끝내 이자에게 밀려 사라졌으리라고.
언여휘가 자신만만하게 철백의 육체를 자신에게 보여 줬던 이유가 그 혼을 이미 임시로 봉인한 뒤였다는 것을 구복은 이제야 깨달았다.
언여휘는 아마 알고 있었을 거다.
이번 전투에서 자신의 형제가 눈앞에 있는 인간의 육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끝내 잡아먹혀 사라질 것이란 사실을.
자신이 형제를 내어줄지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품이 먼저 드는 작업을 끝낸 이유가 다 있었다.
아마 이 눈을 봤다면 자신은 만약을 생각해 형제를 내어주지 않았겠지.
[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소용인가.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신화시대에도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시간이란 절대적인 것이며, 바꿀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현재와 미래뿐.
과거는 절대로 바꾸지 못하는 불변의 영역이다.
그러니.
‘……언여휘.’
이번에는 따라 주마.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을 인지한 것만으로 구복은 상황을 파악했다.
축생도와 융합했던 자신이 정신을 차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언여휘가 강제로 축생의 곤옥을 빼 간 거다.
그 결과, 연결이 끊어진 축생의 힘이 점차 빠져나가며 자아가 돌아온 것이고.
언여휘가 적들을 쓸어버릴 칼이 되어 줄 자신을 버리고 축생의 곤옥을 빼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상황 파악은 안 되지만, 지금 자신이 눈앞에 있는 인간을 찢어발겨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이 인간을 찢어발긴 뒤에 언여휘의 본체도 찾아서 찢어발기고 싶지만.
[인정하마.]
콰득!
자신의 안면에 처박힌 철백의 손목을 움켜쥔 구복은 자신의 악력에도 멀쩡하게 버티는 철백의 손목에 더욱 힘을 가했다.
보통 인간의 손목이었다면 머리카락 정도로 가늘어지고 남았을 악력에도 멀쩡하게 버티는 철백을 똑바로 바라보며, 구복은 선언했다.
[나는 미래를 포기하겠다.]
가증스러운 언여휘, 그년을 향한 복수조차 포기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찢어발기리라.
돋아났던 팔다리가 떨어져 듬성듬성 비어 있던 가죽 위로 금빛의 털이 솟아난다.
축생의 곤옥과 융합하며 윤기를 잃었던 털이 다시 찬란한 광택을 되찾고, 유일하게 본신의 것인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며 영력을 전신으로 뿜어냈다.
[나는 금수의 왕이다.]
늑대의 주둥이, 호랑이의 앞발, 사슴의 다리, 곰의 몸체.
각기 다른 동물의 신체 부위들이 뒤섞였음에도 한 점의 위화감도 없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구복의 육체는 완성되었다.
“흡!”
잡힌 손목을 털어 내듯 풀어낸 후 물러난 철백은 순식간에 변화한 구복의 모습에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그냥 있어도 초월자로서의 위압감을 뿜어내던 구복이었으나.
‘……모르겠군.’
지금은 그런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산에서 범을 만났을 때의 위압감조차 느낄 수 없어서 철백은 더욱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강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상대의 역량이 너무 거대해서 좁은 시야로는 그 전체를 담지 못하는 경우.
상대가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 너무 뛰어나 알아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
철백은 전자의 경우는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 정도로 역량 차이가 나는 적이었다면, 이렇게 대치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밖에 남지 않는데, 문제는…….
“흡!!”
쾅!!
단숨에 근육을 경직시킨 철백은 자신의 두툼한 가슴근육이 얻어맞은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뚫리진 않았으나, 그 충격은 고스란히 파고들어 뼈와 폐를 울렸다.
그래, 후자일 경우의 문제.
기세를 감추는 것이 극도로 뛰어나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숨기는 것에 능하거나.
흐트러트리는 것에 능하거나.
전자라면 은신에 능한 것이고.
후자라면 동화에 능한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모두 철백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라는 점이다.
극에 이른 은신 혹은 극에 이른 자연스러움.
철백이 아무리 기예를 갈고닦았다고 해도 그 본질은 외공의 고수.
일종의 권능의 영역에 도달한 상대의 심상에 닿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육체의 강인함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쾅!!
또다시 찾아온 충격에 철백은 기어코 다리를 넓게 벌려 허리를 비틀었다.
어깨를 때린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허리를 틀어 충격을 흘려 낸 철백은 공격이 시작된 곳을 향해 팔을 뻗었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공기를 찢어발기며 그야말로 공간 전체를 후려친다.
펑!!
뻗은 주먹보다 느리게 터진 파공음이 허공에 퍼졌으나, 구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한에 철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크허허헝!]
호랑이가 달려들듯 철백의 등 뒤를 덮친 구복의 주둥이가 다급히 들어 올린 철백의 팔뚝을 물었다.
[크르르르!]
짐승의 그것과 같은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철백의 팔뚝을 자근자근 씹는 구복의 송곳니가 조금씩이지만 철백의 팔뚝을 파고들고 있었다.
주르륵 흐르는 핏방울을 보며 철백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거 어디 가서 금강불괴라고 말도 못 하겠군.”
보통의 인간, 아니 현경급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단숨에 뼈와 살이 뜯겨 나갔어야 할 공격을 피 몇 방울로 막아 낸 철백은 입꼬리를 비틀며 손을 뻗었다.
콱!!
자신의 팔을 물고 있는 구복의 머리를 그대로 붙잡은 철백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빨을 뽑는 게 쉽지 않은 것 같군.”
[!!]
미묘하게 빠지지 않던 이빨 때문에 반응이 늦어졌던 구복은 그것이 철백이 의도한 것임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그런 구복의 반응에 덤덤하게 미소 지은 철백은 구복의 목덜미를 쥔 손에 꽉 힘을 더했다.
자신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큰 짐승을 상대로.
“환영한다. 내 영역에 들어온 것을.”
철백은 힘 싸움을 시작했다.
구복의 목을 잡은 손을 그대로 흔들었다.
한 번, 두 번.
구복의 거대한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과 함께 철백은 더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구복의 자유로운 앞발이 철백의 어깨와 팔을 긁어내고, 복부를 찔러 들어왔지만.
“흐으읍!!”
버텨 냈다.
생채기 정도의 수준으로 그친 구복의 공격이었지만, 유일하게 한 곳은 그저 생채기로 끝나지 않았다.
가슴.
조금 전까지 말뚝이 박혀 있었던 가슴 부위를 때리는 일격에 터져 나온 피가 팔뚝을 물고 있는 구복의 눈앞까지 튀었다.
통한다.
그것을 인지한 구복이 철백의 가슴에 공격을 집중시켰지만, 이미 거리는 극도로 좁혀진 상태.
제대로 된 힘을 싣지 못하거나 빗나가는 공격들로는 철백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꽈아아아악!!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낀 구복은 어떻게든 입을 풀려고 했으나, 철백이 더욱 팔을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신화시대의 싸움에서도 이렇게 무식하고 천박한 방식은 없었다.
땅을 뒤집고, 산을 무너트리는 절대자들의 싸움에서 이런……!
“억울한가?”
꽈아악!!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구복과 눈을 마주친 철백은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구복의 몸을 비틀었다.
“억울하면 조심했어야지.”
짐승처럼 달려들 게 아니라.
초월적인 힘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무모한 행동이 만들어 낸 전세 역전.
철백은 이 우위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 *
“참 무식한 방식이네.”
철백과 구복의 싸움이 그야말로 개싸움으로 흘러가는 꼴을 지켜보며 언여휘는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가 개처럼 서로 물어뜯는 거 아니야?”
구복이야 짐승이니 원래 물어뜯는 게 자연스럽다고 해도, 철백은 나름 사람으로서 존엄성은 지켜야 할 것 같은데.
기세만 보면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작정이니, 이건 뭐…….
“참, 이런 전장에서 저런 싸움이라니…… 정말 천박하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파직!
언여휘의 물음에 번뜩이는 번갯불로 대답한 백유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더럽게 많네.”
짜증이 담긴 한마디와 함께 가볍게 주위를 둘러본 백유는 발밑에 수북이 쌓인 사체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설천위를 지키기 위해 방어에 전념하느라 일일이 숫자를 세지 않았지만, 밑에 깔린 사체의 숫자가 족히 수백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사체의 숫자에 백유가 감탄하는 사이, 그녀의 곁에서 서하영 또한 거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아무리 현경에 도달한 무인이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의 누군가를 지키며 수백의 적을 썰어 대는 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응? 슬슬 지치나?”
“후우……. 지치긴 누가 지쳐? 이 정도면 준비운동이지.”
“꺄하하! 무인들은 이런 거친 면이 좋더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까딱이는 백유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언여휘는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가지고 놀기 좋아.”
언여휘의 미소와 함께 재차 열린 공간의 문을 지나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몰려드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과 마주한 백유와 서하영이 무거워진 팔로 각자의 무기를 드는 순간.
“이런 느낌이군요.”
익숙한 목소리에 서하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문……!”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도 전에.
수백 개의 팔이 말 그대로 몰려오던 짐승들을 쓸어버렸다.
수백의 팔.
그것을 등에 짊어진 문율의 등장에 서하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었기에 수십 개 정도가 한계였던 팔이 수백 개로 늘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격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지금의 상황에서 손이 수백 개나 늘어났는데,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하영의 지시에 즉시 공세로 방향을 바꾼 문율이 한쪽의 적을 아예 쓸어버리기 시작하자, 한결 여유를 되찾은 서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라면, 언여휘의 공세는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술법적인 개입.’
지금 이렇게 적을 쏟아내고 있는 건 언여휘의 힘이 아니었다.
축생의 힘과 공간을 여는 악귀의 힘이지.
즉, 언여휘는 지금 이 공세에 힘을 쓰지 않고 있다는 소리고, 그런 언여휘가 힘을 쓰고 있는 대상이야 뻔했다.
대법.
지금 설천위가 저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대규모 술법에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것을 막으려면 그 술법의 축이 되는 언여휘의 인형을 부수는 게 맞지만…….
‘아마 저건 아니겠지.’
지금 눈앞에 나타나서 히히 웃으며 실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저 인형이 그 축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인형을 찾으면 되겠군요.”
“……주 소협!”
고민하는 서하영의 앞에서 허리춤에 있는 검 위에 가볍게 손을 걸친 채 허공에 선 주현운이 빙긋 웃으며 발을 굴렀다.
[자성영역(自省靈域)]
“그쪽은 제가 맡죠.”
[천검지악(天劍知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