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0화
589화-불가능을 가능으로 (2)
세상에 혼란이 가득했던 시기.
인간들이 삼삼오오 모여 살고 마을이란 것을 이루며 국가라는 형태를 엉성하게나마 형성해 나가던 그때,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숲속의 짐승들을 향한 공포심에서, 어떤 것은 가물어 버린 대지에서.
서로 다른 근원을 두고 태어났던 존재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인간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두려워했던 존재라는 점이다.
야생의 맹수들은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이 문자를 만들기도 전부터 공포의 대상이었고.
가물어 버린 대지는 밭을 일구며 살아가기도 전부터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끔찍한 공포였다.
갑작스럽게 넘쳐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홍수는 마을을 그대로 먹어 치웠고.
끓어오르는 용암을 토해 내는 화산은 모든 것을 불사르는 공포였다.
그런 공포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으나, 이들은 서로를 인정했고 태초부터 함께한 형제가 되었다.
형제가 몇이나 더 있었으나, 최후의 순간까지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둘만이 남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빼앗겼으니까.
인간은 항거할 수 없는 재액에 맞서 신앙심을 품었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던 존재들은 그들의 신앙심을 대가로 기꺼이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었다.
인간들에게 재앙에 대처할 지식을 전수하는 것으로 공포의 확산을 막고, 기꺼이 몸을 일으켜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들을 직접 짓밟아 봉인했다.
신화시대의 싸움.
온 세상에 퍼진 짐승의 뿌리이자 머리인 구복은 세상을 뒤엎는 재앙이 되었으나, 끝내 그 또한 패배해 버렸다.
모든 것을 빼앗긴 형제들이 더럽고 추악한 신들이 만들어 낸 연옥에 갇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겨우 건져 낸 것이 가뭄의 재액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자신의 진명조차 사라져 버린, 망아의 짐승.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형제였고, 설령 연옥이 열리더라도 이제는 자신을 되찾을 수 없게 된 가엾은 형제.
그런 형제가.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지금 사라졌다.
축생의 곤옥과 합일을 택한 구복은 자신을 꿰뚫는 설천위의 가시를 느꼈다.
거침없이 눈을 노리고 파고든 가시가 안구를 꿰뚫어 머리를 관통했다.
그 외에도 허벅지, 팔, 가슴, 복부, 어깨 등등.
수많은 곳에 가시가 꿰뚫렸지만.
[이미 늦었다.]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팠다.
저 인간의 정신에 밀려 결국 사라져 버린 형제의 존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형제의 영력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태초부터 함께해 왔던 형제가.
이제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던 형제가.
이제…….
……없다.
육체는 형태를 잃고,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던 자아는 스스로를 놓아 버린다.
그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끝에 이뤄 낼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나는 재액이니.]
세상을 향한 절망뿐이다.
구복이 스스로를 놓아 버린 순간, 기어코 합일이 끝난 축생의 곤옥에서 터져 나온 갈색의 빛이 구복을 집어삼켰다.
육도(六道)는 신(神)조차 쉽사리 넘볼 수 없는 세상 그 자체를 이루는 힘.
그것과의 완전한 합일은 나를 잃고 세상이 되는 것과 같다.
풍성하게 돋아난 털이 몸 전체를 휘감고, 발끝으로 삐져나온 발톱에선 예기가 일렁인다.
그리고…….
“……저거 맞아?”
설천위의 가시에 찔려 구멍이 숭숭 뚫렸던 육체는 순식간에 복구되고 범과 늑대를 섞어 놓은 외형의 몸과 머리는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려 오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풍겼다.
무엇보다.
“……짐승도 아니지 않나, 저건?”
백유의 물음대로, 사지에서 끝났어야 할 팔다리가 거듭해서 돋아나는 구복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의 팔다리가 아닌, 짐승의 팔다리가 뒤섞여 자라났음에도 거부감이 상당해 서하영은 이미 눈살을 찡그린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철백이나 살펴줘.”
다만, 혐오감과 별개로 그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위험성은 설천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겨우 적의 술수에서 벗어나 쇠약해진 철백을 서하영과 백유에게 맡기고 설천위는 구복의 앞에 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을 썼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아직까지 괴성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늘려 나가는 구복에게 몇 번이나 공격을 시도했으나, 잡아먹혔다.
흑관으로 만들어 낸 가시도, 흑도로 만들어 낸 참격도.
꿰뚫고, 베는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영력을 이용한 공격도 거의 통하지 않았다.
마치 일반인이 멧돼지를 만나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아무리 휘둘러도 짐승의 가죽 하나 뚫지 못하는 그런 절망감이 찾아왔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끼는 무력감에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어느새 거리를 상당히 벌린 동료들을 확인하곤 양손을 모았다.
“뭐, 좋아.”
이제는 대답도 없는 걸 넘어서서 그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는 적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놈이 무엇을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놈을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
그리고.
“제대로 해 보자고.”
설천위는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축생의 힘을 흡수한 신?
그게 뭐?
1의 힘으로 아득바득 싸우던 때에 10의 힘을 가진 육도를 흡수하면 열 배 넘게 강해지지만, 10의 힘을 다루는 지금 육도를 흡수해 봤자 고작 두 배 강해질 뿐이다.
강함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고, 힘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금 자신들의 단계에서 육도의 힘을 더하는 건 그다지 큰 메리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슴 앞으로 모은 손 사이에서 순백의 화염을 만들어 낸 설천위는 천천히 양팔을 벌렸다.
손의 궤적을 따라 생기는 화염의 선.
이윽고 다시금 모아서 위아래로 팔을 벌렸다.
이번에 생겨난 것은 얼음의 선.
완성된 선에서 떨어진 손이 원을 그린다.
오른손은 위에서 오른쪽으로.
왼손은 아래에서 왼쪽으로.
두 손의 위치가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을 때.
화염과 얼음이 뒤섞이고.
흑과 백이 뒤섞였다.
[음양지천(陰陽支天)]
세상이 백과 흑으로 물들고.
천지는 불과 얼음으로 빛나니.
“환영한다. 이 세상의 첫 번째 손님이야.”
스스로를 잃어버린 짐승의 왕은 하늘을 뒤엎는 괴물의 세상에 놓였다.
* * *
구복이 스스로를 축생에게 바쳐 버린 것을 보았을 때, 언여휘는 생각했다.
아, 성공했다.
가장 큰 골칫덩어리인 설천위를 구복이 해결해 주었으니 이 계획의 태반은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구나.
지금 밖에서 무지렁이들이 열심히 법구를 부수고 있었지만, 그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건 일부분일 뿐이니까.
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을 인지한 언여휘는 구복을 돕기 위해 복구하던 성인 형태의 인형을 놓아주었다.
마음에 드는 인형이었고, 또 꽤나 본래의 자신과 가까운 인형이라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니까.
그러니 과감하게 버린다.
버리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언여휘는 놀랍도록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일단 구복 쪽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설천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축생의 곤옥과 완전한 합일을 이룬 구복은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괴물이다.
물론 아주 높은 확률로 설천위가 승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복이 설천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건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설천위가 너무 괴물 같아서 승산이 있다고 점칠 수 있는 거지 대부분의 존재가 그를 상대했다면 승산이 없다고 봐도 되는 괴물이다.
그리고 그런 괴물이 날뛰는 순간, 이 황궁과 제도에는 오로지 파괴밖에 안 남을 거고.
그러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황궁 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그 녀석에게 연락하고.
저 멀리 제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비후에게 연락하고.
자신에게 팽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고 있는 우공도 부르고.
열심히 준비하고 쌓아 온 것들을 끌어모았다.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를 위해.
완벽한 자유.
완전한 자유.
“히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나’가 될 거다.
* * *
설천위가 자신의 영역에 축생과 합일한 구복을 가두고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제도에서는 여전히 축생의 유정들이 날뛰었고, 황궁에서는 죽은 장수 출신의 존재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설천위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백유에게 전해 들은 철백과 서하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군.”
대체 어디서 이렇게 끝도 없이 적이 튀어나오는 건지 의문이 들면서도 설천위가 여태껏 무림을 돌아다니며 모은 전력도 그에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만, 그렇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적의 무리를 보면서 철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순 없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 난 괜찮아.”
“무리하지 말라니까요.”
“난 괜찮…… 끅.”
“무리하지 말라니까.”
계속해서 일어나려는 철백의 가슴 부분을 손바닥으로 후려친 서하영은 움찔거린 철백을 다시 앉혔다.
“회복도 안 된 상태로 끼어들었다가 아까 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럴 일 없어.”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을 수도 있죠. 적 사이에는 그 언여휘가 아직도 멀쩡하게 섞여 있으니까요.”
괴이가 황궁을 먹어 치우고 제도 전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전투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이 인간이라니.
그 사실에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서하영은 주위를 살폈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은 한 객잔의 지붕 위.
4층짜리 객잔의 지붕이다 보니 도시의 전경이 꽤나 훤히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못 깨어나고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저희끼리 움직이죠.”
“음, 천위는?”
백유의 물음에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궁의 하늘 위.
설천위는 흑과 백으로 일렁이는 구 형태의 결계 안에 자신과 그 괴물을 통째로 가둬 버렸다.
“……우리가 걱정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없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걱정하는 게 의미가 없다.
현경에 오르고도 느껴지는 거리감에 서하영은 씁쓸하게 웃었고, 백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고 계집애가 없을 때 최대한 붙어 있어야 했는데…….”
“제가 언니한테 다 이를 거예요.”
“나도 어차피 자랑할 생각이었어.”
“네?”
“그야 서로 합의를 본 게 있으니까.”
합의?
뭘?
고개를 갸웃하던 서하영은 이내 빠르게 생각을 접고 결론을 내렸다.
“쓰레기 같은 양반…….”
저 멀리 최대의 적과 싸우고 있는 설천위의 인간성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내린 서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유예린 언니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이용해 외도를 이렇게 당당하게 허락받다니.
눈앞의 여자야 애초에 머리 어딘가가 어긋난 인간이니 그러려니 해도, 유예린 언니만 생각하면 설천위에 대한 미움이 샘솟았다.
아니, 진짜 어떻게 사람이…….
“흠흠, 그만! 천위도 다 나름대로…….”
“이 인간이?”
설천위를 옹호해 주려는 철백을 눈빛 하나로 제압한 서하영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사실 삼처사첩이 드문 것도 아니고, 능력 있는 인간이라면 꽤나 많은 편이니 설천위를 비난할 건 아니긴 했다.
물론, 여자와 남자의 가문이 엇비슷하면 남자가 당연히 여자의 눈치를 보며 처가 아니라 첩 정도를 들이는 데 그치지만…….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세상이 망하냐 아니냐의 기로에서 지금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설천위, 저 양반만 전장에 서면 너무 안도감이 들어서 자꾸 딴생각을 한단 말이지.
설천위가 들었으면 억울해할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를 다잡은 서하영은 기어코 일어난 철백을 보곤 창을 쥐었다.
“그럼, 일단…….”
저쪽 싸움에 합류하자.
서하영이 그렇게 말하려는 그 순간.
우웅!
세상이 요동쳤다.
황궁이 아닌 제도 전체에서 빛이 솟아오른다.
수많은 선의 형태로 솟구치는 빛.
그것이 술법의 발동임을 인지한 서하영이 눈을 부릅뜨고.
[기아아아아아아아!!]
세상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혼이 내는 최후의 단말마이니.
제도에 있던 수만의 목숨이 단숨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제물.
기어코 놈들이 이 제도 전체의 백성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하영이 이를 악무는 그 순간.
우뚝!
모든 것이 정지했다.
하늘을 향해 치솟던 혼들도.
세상을 짓누를 것처럼 쏟아지던 술법의 압박도.
그리고 그 뿌리.
황궁의 하늘 위.
어느새 사라진 구체가 있던 자리.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망가진 구복이었던 괴물이 괴성을 내지르는 그 순간.
“이 미친 양반이!!”
욕을 내지르던 서하영이 땅을 박찼고, 그녀보다 먼저 움직였던 백유와 철백이 괴물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쾅!!
괴물이 내지른 일격을 겨우 막아 내는 것과 동시에 한쪽 다리만을 굽힌 자세로 명상에 든 설천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버텨……!”
이 술법을 내가 해제할 때까지.
언여휘의 술수를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노리고 있던 설천위의 겨우 뜬 한쪽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