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8화
587화-망아의 짐승 (5)
구복의 주먹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그 순간, 허공에 선을 그려 낸 설천위는 그대로 양팔을 모았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 검지와 검지, 엄지와 엄지가 맞닿아 원을 만들어 낸다.
쾅!!
동시에 도달한 주먹이 설천위의 안면을 후려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거, 조급하기는.”
구복의 주먹 앞.
반투명하게 빛나는 흑관이 반짝이며, 구복의 주먹을 막아 내고 있었다.
평소에 설천위가 숨 쉬듯 펼치는 흑관이 아닌, 극도로 정제된 영력으로 빚어 내 강도를 월등하게 높인 흑관.
흑수정과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것은 술사로서의 역량이 한층 올라선 설천위가 진짜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온 기술 중 하나다.
그래.
기술 중 하나다.
“시작하자고?”
설천위의 손이 허공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구복의 몸이 솟구쳤다.
단숨에 뛰어오른 구복을 따라 칠흑의 가시가 솟구쳤다.
양옆에서 솟아오르는 가시들을 피해 온몸을 비틀며 허공에 솟구친 구복의 모습이 손가락 정도로 작아졌을 때쯤.
“독하네.”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가 손을 휘저었다.
치솟는 구복을 따라 생성되어 긴 이중 나선의 기둥을 만들어 낸 칠흑의 가시들이 뒤엉켜 휘몰아친다.
“어림없는 짓을!”
그대로 채찍처럼 움직여 자신을 휘감는 칠흑의 기둥을 양손으로 붙잡은 구복이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마치 거대한 식물을 뽑아내듯 두 기둥을 뽑아내 버린 구복이 양팔을 휘저어 둘을 그대로 허공에서 충돌시켰다.
그러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파편 아래에서 설천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양팔을 움직였다.
다시금 솟구치는 칠흑의 가시들.
이제는 가시라는 단순한 형태를 벗어나 도와 검의 형태가 드문드문 섞이기 시작한 그것들이 허공에 떠 있는 구복을 압박했다.
다만.
“귀찮은 짓을 벌이는구나!”
구복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붙이들을 전부 몸으로 받아 내며 단숨에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허공을 밟고 가속한 구복의 몸이 순식간에 다시금 철백의 흑관에 도달한다.
“짐승이라 그런가. 속내가 너무 뻔히 보이는데.”
흑관에 도달해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조롱과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구복은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흑관 위로 올라온 칠흑의 가시를 겨우 피해 내며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부숴 버린 구복은 허공에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후 구복이 이번엔 말없이 설천위를 노려봤고, 그런 구복의 시선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술법을 준비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리하지 않고 대기한 상태에서 틈을 노리고 있던 서하영의 질문에 설천위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철백의 몸에 들어간 녀석이 생각보다 더 거물인 모양이야.”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이야.
설천위가 경계하던, 영역을 넘어선 셋 중 하나.
아마 혈주와 같은 영역에 도달해 있는 괴물.
그런 괴물 중 하나가 직접 움직인다는 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아직 의식은 시작도 안 했는데, 움직였다라…….’
제대로 된 힘을 찾기도 전에 자신 앞에 나타난 상대의 태도에 설천위는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언여휘나 눈앞의 존재와 같은 수준의 적을 만나려면 한참은 더 들쑤셔서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기 직전까진 가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신(神)의 영역에 도달했던 혹은 도달하고자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괴물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들이다.
보통의 인간은 상상도 하기 힘든 자아(自我)를 가진 존재들.
부하들 몇 죽는다고 움직일 녀석들이 아니란 소리다.
그 부하들조차 이 거대한 계획의 제물로 써먹는 놈들이 바로 그들이니, 이 제도에 펼쳐 놓은 놈들의 수작이 반 이상 거덜이 나면 그때서야 슬금슬금 기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지만, 나쁘지 않아.’
이쪽과 철백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는 구복의 모습에 설천위는 솔직하게 기뻐했다.
마지막 순간에 셋이 동시에 나타나면 자신이 하나를 정리할 동안 나머지 둘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지금 하나를 처리할 수 있다면 현재로선 최선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물론, 과투자를 해서 힘을 과하게 소모하면 본말전도가 되겠지만…….
아직 의식을 제대로 실행하지도 않은, 연옥의 육체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 놈에게 질 이유가 없다.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때에도 조잡하게 육체를 끌어온 혈주 정도는 죽일 수 있었으니까.
놈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작.”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설천위의 말과 동시에 백유와 서하영이 양옆으로 갈라져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구복을 압박하는 두 사람.
그리고 구복을 견제하며 설천위가 미리 준비해 놨던 술법이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반투명한 칠흑의 갑주가 두 사람을 감싸고, 허공에 수많은 길이 만들어진다.
완벽에 가까운 지원.
거기에 더해 수백의 가시들이 구복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구복은 그 모든 공격에 반응…… 하지 않았다.
되레 눈을 감고 양팔을 꼬아 팔짱을 낀 채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섰다.
서하영의 창과 백유의 단검이 단숨에 놈의 목과 어깨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나는 금수의 왕이니.”
튕겨 나오는 날붙이들.
심지어 설천위가 만들어 낸 칠흑의 가시마저도 부러져 그 파편이 흩날렸다.
[스스로를 짐승이 아니라 착각하는 우매한 것들이여.]
길게 자라난 털이 금색으로 흩날린다.
호랑이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외모에 길게 늘어지는 장모.
[왕 앞에 고개를 조아려라.]
금수의 왕 구복(九復)이 세상을 뒤집었다.
* * *
“꺄하하하! 정신 나간 놈.”
구복이 권능을 발동시킨 걸 목격한 순간, 언여휘는 웃음을 터트렸다.
구복.
세상을 뒤집는 금수의 왕.
아홉 번 천지를 뒤집을 수 있는 그 존재는 용이되, 호랑이이기도 하며, 기린일 수도 있고, 거북일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늑대일 때도 있었고, 여우일 때도 있었으며, 토끼일 때도 있었다.
수많은 짐승으로 변하며 세상을 뒤엎는 괴물.
그 힘에 짓밟힌 살아 있는 것들의 피와 살이 대지를 가득 메우기 전에 신들에게 봉인된 괴물.
그런 괴물인 주제에 쓸데없이 정이 많았다.
제 형제를 챙기기 위해 저리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보면 딱 보이지 않는가.
물론.
“머저리 같아.”
결국 중요한 건 ‘나’이거늘, 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여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
구복이 하찮은 감정에 휩쓸려 일을 벌인다면, 그를 이용해 주면 될 뿐이다.
“흐흥.”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언여휘는 설천위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이 구복에게 달려드는 것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구복에게 달려드는 것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구복을 확인한 것이었지만.
[왕 앞에 고개를 조아려라.]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안에 담긴 힘을 확인한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는 응원해, 구복.”
네 그 애정을.
네 그 집착을.
짐승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네 행동을.
그러니.
“마음껏 해 봐!”
히죽히죽 웃는 언여휘의 몸이 세상에 뒤섞여 사라졌다.
* * *
[고개를 조아려라. 잡것들.]
영압(靈壓).
혼이 뿜어내는 그 기세는 중력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거대한 존재가 그 장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간이 뒤틀리고 그 영역 안에 있는 존재들이 휘말린다.
그리고 이 휘말림은 단순히 무력이 강하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의 격.
그것이 받쳐 주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는 것이 신(神)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가 뿜어내는 영압이다.
그렇기에 구복에게 돌진하던 백유와 서하영이 순간적으로 몸을 짓누르는 영압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그 순간.
“똥폼 잡기는.”
비웃음이 섞인 설천위의 목소리와 함께 백유와 서하영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졌다.
상쇄.
구복의 영압을 자신의 영압으로 지워 버린 설천위는 비틀린 주위의 영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본래의 그것처럼 안정된 것을 느끼며 양팔을 벌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힘을 쓴 거냐? 여태까지 쌓아 온 제물에서 무엇을 얼마나 바쳤지?”
혈주는 고작 한쪽 눈과 한쪽 팔을 되찾기 위해 수백의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고도 설천위에게 끝끝내 패배했고.
“감당할 수 있겠어?”
이 황궁에 얼마나 제물을 쌓아 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대로 된 연옥을 열지 못하고 찾을 수 있는 힘은 극히 제한적이다.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자신과 싸우겠다?
설천위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구복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털이 수북하게 올라온, 금색의 앞발을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애송이.]
덤덤한 눈빛으로 설천위를 내려다보며 구복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리그었다.
세상이 갈라진다.
고작 세 줄기.
구복의 발이 만들어 낸 세 줄기의 발톱 자국이 말 그대로 세상을 가로질렀다.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갈라 버릴 일격.
“어, 왜.”
쩡!!
그 일격을 받아 낸 설천위가 양팔을 펼친 채 웃었다.
쩌저적!
발톱과 부딪혔던 흑수정 형태의 흑관에 균열이 생겨나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설천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하게 막아 냈으니까.
놈이 끌어낸 힘은 고작 이 정도일 뿐이다.
확신을 얻은 순간, 그것은 곧 자신감으로 바뀌었고 자신감은 곧 뚜렷한 계획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지, 어떻게 상대를 처리할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수와 상대의 역량을 가늠해 수많은 방법을 떠올리며 설천위는 손을 펼쳤다.
시작점.
일단 놈을 몰아붙인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 이것은 최선에 가까운 선택이다.
그리 결심한 설천위가 손을 움직여 흑수정으로 이루어진 흑관을 쏟아 내고, 그것은 결계가 되어 사방을 감쌌다.
이대로 임시 영역을 만들어 단숨에 몰아붙인다.
서하영과 백유도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그렇게 판단한 설천위의 술법이 기어코 세상을 뒤덮으려는 그 순간.
[네놈만 협력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복의 한 마디와 함께 세상이 뒤틀렸다.
만들어지던 결계가 비틀리고, 앞으로 나아가던 백유와 서하영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지가 뒤바뀌어 버린 공간에 설천위가 급히 손을 쓰려는 순간.
“낭군님,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지척에서 치솟은 화염에 설천위는 즉시 물을 뿌렸다.
술법으로 만들어 낸 물과 화염이 부딪치며 자욱한 수증기를 토해 내고.
“이리 낭군님과 함께할 시간을 가지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짜증 나는 목소리에 거칠게 수증기를 거둬 낸 설천위는 드디어 목소리의 주인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헐벗은 성인 형태의 언여휘와 마주한 설천위의 얼굴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부끄러운 몰골을 보여 드렸군요.”
속살을 내보인 여인의 모습으로 붉은 미소와 함께 손으로 옷을 만들어 내는 언여휘.
그 미색만큼은 객관적으로 훌륭했기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어야 마땅할 풍경이었으나.
“언여휘.”
설천위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언여휘의 헛소리가 짜증 나서?
그야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그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몇이지?”
“몇이냐면…… 아, 그렇군요.”
설천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던 언여휘는 웃으며 한 손을 활짝 펼쳤다.
“오십, 정도이려나요? 이 몸은 성능이 좋은 대신에 수리 연비가 별로 좋지 못하답니다.”
드러난 속살, 고통으로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을 만들어 낸 천으로 가린 언여휘는 이미 격렬한 전투에 돌입한 백유와 서하영, 구복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은 이미 시작했는데, 조금 더 담소를 나누시겠습니까?”
부드러운 미소와 물음.
그리고.
“아니.”
단숨에 접근한 설천위의 흑도가 그대로 언여휘의 목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