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586화-망아의 짐승 (4)
철백을 흑관 안에 가둬 버린 설천위는 몇 초간 흑관을 지그시 지켜봤다.
설천위의 진지한 모습에 가만히 바라보던 백유와 서하영도 설천위가 표정을 풀자, 한껏 조였던 긴장을 놓았다.
“됐나요?”
“어. 맡겨 두면 알아서 정리할 거야.”
망아의 짐승이 즉각 반응하지 않는 걸 봐선 철백이 내면세계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즉각 흑관을 찢어발기고 나왔을 테니까.
아무리 흑관이 단단해도 망아의 짐승 같은 존재가 날뛰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낼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니 일단은 안심해도 될 거다.
‘철백이 진다는 선택지는 없으니까.’
결코 꺾이지 않는 육체.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태산과도 같은 정신력이다.
망아의 짐승이 정확히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면세계에서의 싸움이라면 철백도 밀리지 않을 거다.
문제는.
“철백은 전력에서 제외하지.”
전투가 끝난 후에 철백이 멀쩡할 리 없다는 거다.
설천위나 연화라면 내면세계의 승리는 곧 포식으로 이어져 힘을 더하는 결과를 낳겠지만, 대개는 그 반대가 정상이다.
내면세계에서 큰 힘을 쓴 만큼 철백은 깨어나더라도 제대로 싸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철백의 전력은 일단 논외로 한다.
“흐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계집애도 사라졌는데.”
철백의 공격을 받아 내느라 뻐근해진 근육을 풀며 어깨를 으쓱이는 백유의 말에 설천위는 그제야 잊고 있던 인간을 떠올렸다.
“……짜증 나는 짓을 계획하고 있나 보군.”
언여휘.
영락한 신들 사이에 뒤섞여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인간.
아마 전력만 보면 가장 약하겠지만, 도저히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인물이다.
뭘 계획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질 않으니까.
애초에 언여휘가 이렇게까지 길게 버틸 줄 예상하지 못했다.
언여휘가 본체를 움직이지 않는 건 이미 한계까지 버티고 버틴 육체가 도저히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설천위가 전생에 보았던 대부분의 경우에 언여휘는 그런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조급하게 움직이다가 중간 보스 정도로 사라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악착같이 버텨서 황궁에까지 이어졌다.
예측할 수 없다.
천락위고진(天落萎呱陣)이라면 알고 있으나, 언여휘가 다른 것을 계획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니.
“일단 모든 걸 부수는 방향으로 가자고.”
모른다면 모조리 부숴 버리면 될 일이다.
황궁도, 제도 전체에 퍼져 있는 기물까지도.
싸그리.
전부 부순다.
그걸 위한 전면전이다.
* * *
“아미타불…….”
처연하게 외는 불호.
그 안에 담긴 슬픔과 함께 세상이 마구 요동친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흉터로 가득 찬, 굳게 쥔 주먹은 주름진 손과 어우러져 기이한 공포감을 선사했다.
가사 아래로 부풀어 오른 근육은 체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옷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근육의 위용을 뽐냈다.
장대한 육체가 움직이고.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일권(一拳).
그것에 담긴 것은 오로지 하나.
단단함.
주먹의 형태를 한 강기가 그저 덤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그대로 짓이기며 나아가는 주먹의 경로에 휩쓸린 모든 존재들이 종말을 맞이했다.
“아미타불…….”
육체를 지니고 있는 적들의 죽음 끝에 남은, 처참한 몰골의 사체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불존은 가사를 휘둘렀다.
품에서 일어난 바람이 피 냄새를 깨끗이 날려 보낸다.
이윽고 일어난 불법(佛法)의 화염이 부정에서 태어난 육체들을 불사른다.
따스해지는 주황색의 불꽃이 오로지 부정한 시체들만을 태우며 그 불꽃을 흩날린다.
주위에 있는 건물에 숨어 있는 이들의 기척을 느끼며 불존은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들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참회하며, 불존은 과거를 털어 냈다.
믿음이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
지금 이 순간, 부처의 법을 믿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것이다.
민가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의 앞에 도약한 불존은 단숨에 괴물의 머리를 짓이겼다.
화르륵!
머리를 잃어버린 육체가 불타오르는 것과 함께 불존은 다시금 움직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 것인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적의 숫자에 불존의 슬픔은 점차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해 가고 있었다.
* * *
“지독할 정도로 많군.”
뇌전으로 적 무리 하나를 태워 버린 사존은 근처에 있는 높은 전각의 지붕에 올랐다.
“단순히 끝이 없는 수준이 아니야.”
“그러게요.”
“자네는 왜 여기에 있나?”
“그야 맹주님께 명령을 받아서죠?”
“쯧,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는군.”
그게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용도 같은데.
혀를 차는 사존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귀령단주 모윤은 저 멀리 보이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진짜 괴물이네요.”
“실물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지 않나?”
“그때는 맹주님이 주인공이라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었죠.”
그때도 솔직히 술사로서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저 멀리 황궁의 하늘에 서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모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영역이 있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그런 상식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눈앞에서 보여 주는 수준이 아닌가.
거기다.
“저쪽도 대단하고요.”
“백화단주 말인가?”
“원화의 술이라니, 금단의 영역에 발을 걸친 술법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쓸 줄은 몰랐네요.”
저 멀리 보이는 성화린의 전투에 감탄하는 모윤을 보면서 고개를 저은 사존은 양팔에 뇌전을 휘감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하도록. 이각(二刻:약 30분)이다.”
손가락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부터 쓱 돌려 주위를 가늠한 사존의 신형이 번개가 되어 쏘아졌다.
“그 안에 사천맹이 이 구역을 정리한다.”
번개보다 느린 까닭에 말소리가 뒤늦게 그 자리에 울려 퍼졌다.
* * *
무림맹의 전력과 사천맹의 전력.
거기에 설가의 전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제도 전체를 무인과 술사들이 휩쓸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함이 없을 순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도는 아주 크니까.
황궁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해 온 이 대도시는 고작 수천의 무인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거대한 도시다.
“꺄하! 진짜 괴물이라니까.”
물론, 그 수천의 무인들을 본인의 술법만으로 불러들인 설천위의 역량은 별개였지만.
황궁의 높은 건물, 그곳의 노대에 앉아 제도를 내려다보던 언여휘는 설천위의 대단함에 또다시 감탄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에 넣으려고 수작을 부렸음에도 전부 실패했던 괴물.
그걸 감안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로 성장할 줄이야.
제도 전체에 퍼져서 축생의 곤옥으로 만들어 낸 괴물들과 싸우는 무인과 술사들을 지켜보던 언여휘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화는 좀 풀렸어?”
“……진정됐다.”
언여휘가 고개를 돌린 노대 안쪽.
방 안에 널브러진 몇 구의 시체 속에는 언여휘의 인형들 또한 끼어 있었다.
“당신 동생이니 믿으라고. 설마 인간 따위한테 먹힐 리가 없잖아?”
“……그래,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군. 당연한 일을 잊었어.”
망아의 짐승이 설천위의 술법에 갇혀 버린 순간, 화를 억누르지 못한 구복이 뛰쳐나가려는 것을 겨우 막는 데 성공한 언여휘는 당과를 까딱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움직이면 일이 틀어져. 알잖아?”
“짜증 나는 사실이지만, 네 말이 맞다.”
언여휘의 지적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구복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계획은?”
“순조로워. 조금 방해가 있지만.”
“문제없군. 오히려 제물이 늘어난 점은 나쁘지 않군.”
언여휘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구복은 냉철한 눈빛으로 제도를 훑어봤다.
곳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하수도에서 올라온 혹은 지하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축생의 유정들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그것조차 계산의 범주 안에 있는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무인들이 나타나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여 준 덕에 공포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힘을 뽑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그냥 단순히 혼과 육체를 갈아 쥐어짜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영육(靈肉)이란 것은 정말로 효율이 좋은 자원이지만, 그것을 쥐어짜는 것은 결국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존재가 장기적으로 인간에게서 힘을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당연하게도 감정이다.
공포, 절망, 슬픔.
기쁨, 흥분, 행복.
음의 감정도, 양의 감정도 전부 힘으로 써먹을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존재들이 음의 에너지를 추구하는 건 그쪽이 더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선 많은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슬픔에 빠지는 데는 하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고통.
심적인 고통이든, 육체적인 고통이든.
어떤 것이라도 인간의 감정을 음으로 치우치게 만들기 좋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영적인 존재들은 무서운 존재로서 인간에게 다가가 그 감정을 먹어 치운다.
그리고 당연히 이 효율 좋은 방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봉쇄는?”
“철저하다. 위병들은 진즉에 바꿔 놨으니.”
“인간도 섞어서?”
“그래.”
구복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히죽 웃으며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으음, 꽤나 쌓이고 있네. 화려하게 날뛰어 준 덕이야.”
지금 제도에선 무림맹과 사천맹의 고수들은 물론 오존까지도 화려한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 내며 적을 마구 쓸어버리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고, 섬세한 조정이 필요한 일에 소모되는 심력까지 감수하며 적들을 광범위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반 백성에게 위안이 되는가?
당연히 아니었다.
그 힘이 어디를 향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겨를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건물을 뒤흔들 정도의 굉음을 토해 내며 도시를 마구 휩쓰는 무인들은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저들의 손이 언제 자신에게로 향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그들의 절망감을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공포심은 훌륭한 자원이 되어 계획의 기둥이 되어 줄 터였다.
“쥐어짜는 건 마지막 한순간으로 충분…… 응?”
순간 고개를 갸웃한 언여휘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철백을 흑관에 가두고 술법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설천위가 보인다.
언여휘가 느낀 것을 더 가까이에 있는 설천위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기에 그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설천위.
그 모습에 묘한 느낌을 받은 언여휘는 뒤늦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구복, 잠……!”
말리려는 순간, 이미 노대를 벗어나 허공을 박차는 구복의 뒷모습이 보인다.
늦었다.
그것을 깨달은 언여휘가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눈을 감았고.
“네 이노오오오옴!!”
허공을 박찬 구복의 신형이 단숨에 늘어져 설천위를 향해 쇄도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단숨에 도달한 구복이 철백을 가둔 흑관 위에 올라섰다.
철백의 거대한 덩치를 가둔 만큼 큼지막한 크기의 흑관 위에 올라탄 구복은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려 흑관에 내리꽂았다.
지금 당장 이 흑관을 부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 구복의 주먹이 내리꽂히는 순간.
“안 되지.”
그런 구복 앞에 나타난 설천위가 전력으로 발을 차올렸다.
구복의 머리를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처럼 그대로 후려친 올려 차기.
턱이 꺾여 목이 뒤로 젖혀진 구복이 이를 악물고 몸을 고정했다.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밀려나려는 육체를 붙잡고 그대로 고개를 본래의 위치로 되돌린다.
비틀린 근육을 쥐어짜서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구복을 둘러싼 공기가 비틀리고 그대로 설천위를 압박한다.
그리고.
그런 구복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손은 허공에 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