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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85화 (585/624)

제585화

584화-망아의 짐승 (2)

흑관으로 사방을 가린 설천위는 게슴츠레한 백유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철백이 무슨 상황인지 알았으니 된 거지…….”

“천위, 대체 어떻게 현경에 오른 거야?”

“……약발?”

백호의 피가 섞인 영약의 약발이 좋았나 보지…….

살짝 시무룩해진 설천위는 더 이상, 이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설천위의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더 놀려 줄까 하던 백유는 섬뜩한 기세에 장난을 멈췄다.

말없이 이쪽을 노려보는 철백과 마주한 백유는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철백이 아니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으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철백을 똑바로 바라본 백유는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했다.

분명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저 눈은 멀쩡했지만…….

“아직 잠이 덜 깼나?”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니, 느낌이 그래. 쟤 아직 제대로 안 깨어난 거 아니야?”

직감.

오로지 그것에 의지한 말이었지만, 설천위는 그런 백유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가능성이 없진 않아.”

지금 철백의 상황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아마 언여휘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 터.

그리고 이 상황에서 핵심은 철백의 자아를 재우는 거다.

철백의 자아를 꺾을 수 없으니, 아예 재워서 내면 깊이 처박는 방법을 사용했겠지.

보통의 경우 그것조차 힘들겠지만, 언여휘라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닐 거다.

특히, 철백이 납치당한 시점에서 이미 무언가 놈들의 수작에 걸려 있었다는 소리이니 그것을 이용해 오로지 의식을 잘라 내서 재우기만 하는 거라면?

무적에 가까운 철백의 방어를 뚫을 수도 있다.

……게임에서는 아예 시도조차 없는 방법이기에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다.

설마 의식을 육체와 격리시켜 가두는 것으로 육체를 조종할 줄이야.

다만, 그렇기에 의아한 점이 있었다.

아무리 철백의 의식을 깊이 가라앉혔다고 해도 철백의 육체다.

어지간한 혼으로는 육체를 조종하기는커녕 빈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

그리고 설천위가 짐작하는 걸 언여휘가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당연히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혼을 구해 철백의 몸에 넣었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 철백은 저렇게 움직이고 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생각이 이어질수록 백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혼이 제대로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철백의 육체를 이 정도 수준으로 제어한다고?

심지어 철백에게는 본래 없는 회복 능력까지 제공하면서?

상대가 제대로 깨어나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무엇보다.

“타임 어택이 걸렸네.”

철백의 몸을 차지한 혼이 온전히 깨어나면 철백의 자아를 되찾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놈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철백의 정신을 깨우고 육체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준다.

생각을 정리한 설천위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자,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백유가 웃음을 흘렸다.

“천위, 또 이상한 말을 쓰네.”

“시간제한이 걸렸다는 소리야.”

“흐응? 그래?”

“네 말대로 놈이 아직 안 깨어난 것 같아. 온전히 깨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그래.”

설천위의 대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백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춘 철백이 몸을 웅크렸다.

태산처럼 거대한 기세가 백유를 압박했으나, 백유는 헤픈 웃음을 흘리며 설천위를 향해 손짓했다.

“천위, 그거 부탁해.”

“그거? ……아.”

그거라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백유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거 없지.”

딱!

설천위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함께 흑관으로 막아 놓은 세상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자욱하게 끼는 먹구름.

그 먹구름에 설천위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끝에서 출발한 섬광이 벼락이 되어 먹구름에 파고든다.

이윽고.

쿠릉! 쿠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먹구름은 거대한 뇌운이 되어 번개를 품고 번쩍이기 시작했다.

“역시! 언제 봐도 좋다니까!”

그 먹구름의 모습에 옛날 검은 짐승 놈을 짓밟았던 기억을 떠올린 백유는 특유의 미소를 입꼬리에 띠고 단검을 집어넣었다.

두 번째 스승님께는 죄송하지만, 이 싸움에서 단검은 조금 맛이 없었다.

번쩍이는 뇌운 아래로 양팔을 늘어트린 백유는 허공을 걸어 철백을 향해 나아갔다.

몸을 웅크린 채 그런 그녀를 마주 보고 있던 철백이 더욱 몸을 낮추는 순간.

쾅!!

폭음과 함께 강인한 다리로 자리를 박찬 철백의 주먹이 단숨에 백유를 꿰뚫었다.

직선으로 이어진 주먹.

꽂히는 순간, 뼈가 부러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배에 사람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릴 법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으나.

“꺄핫!”

칠흑의 뇌전을 휘감은 백유는 당연하다는 듯이 철백의 등 위로 올라가 칠흑의 뇌전과 대비되는 그 새하얀 손으로 철백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날 만질 수 있는 건 천위뿐이야. 우리 제부?”

뚜드드득!

거칠게 그대로 철백의 턱을 잡고 목을 돌려 버린 백유는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허공을 선회하는 백유의 흔적을 따라 뇌전이 일렁인다.

완전한 뇌전과의 융합.

흑뢰천역(黑雷闡域).

최상위 술사가 만들어 낸 뇌전의 영역에서 백유가 흑뢰를 발동시키는 것으로 완성되는 합체기.

그것을 발동한 상태의 백유는 자신의 본래 경지를 가볍게 뛰어넘는 힘을 발휘했다.

물론.

“꺄하하하하!!”

타들어 가는 육체의 통증은 더욱더 강해졌지만, 안타깝게도 백유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통증은 곧 육체의 소모이기에 체력의 한계도 더 빨리 찾아오겠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뒤에는 천위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전력을 다해 날뛰어서 이 상황을 정리하는 거다.

자신이 할 일을 정한 백유는 돌아간 목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되돌린 철백과 주먹을 마주했다.

쩡!!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철백의 주먹과 백유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정말 더럽게 단단하네!”

어깨가 조금 빠졌나?

다른 상대라면 주먹을 넘어 팔과 어깨, 심장까지 전부 뇌전으로 태워 버렸을 텐데.

반발력에 자신의 주먹만 튕겨 나온 것을 확인한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며 근육을 움직여 어깨를 맞췄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으나, 싸울 때마다 뇌전에 몸이 먹히고 있는 백유에겐 별 감흥도 없는 통증이었다.

단숨에 자세를 낮춘 백유의 몸이 흩어진다.

뇌전을 휘감고 말 그대로 흩어져 버린 백유의 빈자리를 잠시 응시했던 철백이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쾅!!

이번엔 주먹을 맞부딪치지 않고 피해 낸 백유는 뺨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의 파괴력에 얼얼해진 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근육 한번 두껍네!”

철백의 가슴에 닿은 손에서 뻗어 나온 뇌전이 단숨에 철백을 집어삼킨다.

칠흑의 뇌전.

그 철백의 육체로 타들어 가는 냄새를 만들어 낸 뇌전이 그대로 철백을 무너트리나 했으나, 백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움직인 철백의 주먹이 백유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휘유~, 쉽지 않네?”

가뜩이나 육체가 강해서 사람 따위는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화력을 조금 타고 말았어요, 로 끝내는 주제에 그 정도의 상처는 단숨에 회복하는 회복력이라…….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를 만들어 놨네. 그렇지?”

“철백은 원래 상대하기 더럽게 까다로운 녀석이야.”

백유의 말에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단숨에 땅을 박찬 백유가 방어 따위 도외시한 채 그대로 철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연히 그런 백유를 막기 위해 무릎을 차올리던 철백은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꽈아아아악!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일지도 모르는 겹치고 겹쳐진 흑관이 그의 사지를 묶고 있었으니까.

사지가 움직이지 않아 움찔거리는 것에 그친 철백의 발악은 코앞에 도달한 백유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무방비.

그런 철백의 턱 아래서 입꼬리를 비튼 백유의 주먹이 단숨에 철백의 명치를 꿰뚫는다.

쾅!!

사람이 사람을 친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과 함께 철백의 몸이 휘어질 듯 꺾인다.

사지를 결박한 흑관마저 비명을 지르며 수십 개가 부서져 나가는 엄청난 충격.

그 무지막지한 위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수십 개의 흑관을 더해 철백의 움직임을 막는다.

웬 정체 모를 놈에게 뺏기긴 했으나, 철백의 육체는 고작 이 정도의 충격에 쓰러질 육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콰드득!

그것을 증명하듯 오른손에 힘을 집중한 철백이 그대로 오른팔을 휘감고 있던 흑관들을 으스러트려 버렸다.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흑관을 팔에 붙인 채 철백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다.

철백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으며 깊숙이 들어가 있던 백유는 자신의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마주하곤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풍압에 피부가 터지고 찢어졌으며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후우.”

겨우 한 끗 차이.

아주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다면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상처와 함께 거리를 벌린 백유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철백을 바라봤다.

조금 전의 일격.

“……천위, 아무래도 슬슬 여유가 없어진 것 같은데?”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어느새 백유의 곁에 다가와 그 뺨에 약을 바르고 자신이 만든 실과 바늘로 상처를 꿰매던 설천위는 응급처치를 끝낸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내지른 뒤, 다시 자세를 고치고 그대로 서 있는 철백.

왜 후속 공격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어진 정도가 아닌 모양이야.”

공격적인 자세를 풀고 천천히 양팔을 내리는 철백을 확인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완전히 똑바로 서서 평온한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한 철백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나는 망아(忘我)의 짐승.]

낮게 울리는, 철백의 목소리보다도 더 낮고 불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액(災厄)이 도래했노라. 인간들이여.]

쾅!!

가볍게 손을 뻗은 철백의 손끝에 있던 흑관이 터져 나간다.

아무렇지 않게 설천위가 만들어 낸 벽을 무너트려 버린 철백, 아니 망아의 짐승이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쩌저저저적!

세상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 * *

쿵.

심장이 뛴다.

무엇 때문인가.

요동치다 못해 울렁이는 가슴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처음인가요?”

설천위가 만들어 놓은 수련 감옥.

그곳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뜬 서하영은 익숙한 창을 손에 쥐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움직임.

그렇게 밖으로 나온 서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피와 죽음의 냄새.

지독하고 지독해서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지옥을 끝내고자 이곳에 온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철 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테니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목표를 정리하고 눈을 뜬 서하영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시야에 감탄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창에 바람을 담던 그녀의 무학이 이제 신법(身法)으로까지 확장되어 그녀의 몸은 바람을 품은 것처럼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객잔의 지붕보다 위.

높은 곳에서 한눈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곳에 올랐던 서하영은 이내 한 곳을 향해 두 눈을 고정했다.

부서져 흩어지는 설천위의 흑관.

주먹만 하게 뚫린 그 구멍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광오하고 비틀린 미소.

“어떤…….”

꽉!

창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춘다.

극한까지 단련된 상태에서 경지를 뛰어넘으며 환골탈태까지 거쳐서 더욱 두껍고 단단해진 허벅지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개잡놈이!!”

눈이 돌아간 서하영은 바람이 되어 제도의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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