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583화-망아의 짐승 (1)
자신의 흑도를 부숴 버린 상대를 확인한 순간, 설천위는 혼란에 빠졌다.
‘왜?’라는 의문 따위는 없었다.
철백이 자신을 배신할 리 없었으니까.
머릿속에 온전하게 차오르는 의문은 오로지 하나.
‘어떻게?’
철백은 육체를 단련함으로써 그 육체를 더욱 무적으로 만들어 주는 불굴의 정신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꺾이지 않는다는 허울뿐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경지였다.
괴이와 술법이 판을 치는 이 세계에서 당연히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을 가진 적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유예린의 팔을 잘랐던 위효가 있다.
문율과 설란을 조종한 것이 그런 종류의 능력이었다.
그녀의 경우 매혹이라는 형태로 능력을 사용했지만, 설란이 걸렸던 것처럼 수준의 차이가 있으면 능력의 형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설란이 여성에게 이성적 감정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녀를 조종한다는 결과만을 만들어 내면 되는 거니까.
다만, 상대가 비슷한 수준이라면 유예린처럼 조금 더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즉, 정신 간섭의 형태는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상대에겐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상대에게는 그 상성을 따질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이 미친 세계에는 현경급 이상의 강자에게도 정신 간섭을 펼칠 수 있는 괴물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번엔 없었어.’
설천위가 황궁을 공격했던 순간, 튀어나와서 막았던 존재는 셋.
설천위가 기감으로 파악했던 황궁의 강자 또한 셋이다.
현경급 이상의 강자에게 정신 간섭을 펼칠 수 있는 적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그런 수준의 정신 간섭이 가능한 적은 천희만락궁의 궁주가 연옥을 열어 완성되거나, 연옥에 갇혀 있던 신이 튀어나오는 경우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그런 괴물이 튀어나왔다고 해도.
‘철백한테 정신 간섭이 통할 리 없어.’
느려진 세상이 다시 가속하는 것과 함께 흩어진 파편을 뚫고 들어오는 철백의 주먹을 피해 설천위는 허리를 비틀었다.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주먹에 코와 뺨이 얼얼해진다.
풍압만으로 살이 아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
확실했다.
“철백!! 정신 차려!”
철백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만들어 낸 흑도를 휘두른다.
단숨에 철백의 옆구리와 가슴을 긁고 지나가는 흑도.
웬만한 강철 정도는 그냥 양단해 버릴 일격이었으나.
캉!
“……더럽게 단단하네.”
어림도 없이 튕겨 나왔다.
심지어, 평소의 철백보다도 더 단단해진 느낌.
얼얼한 손맛에 혀를 내두른 설천위는 말없이 다시 거리를 좁혀 오는 철백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자, 따라오지 않는 철백.
허공에 몸을 멈춘 설천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런 철백을 마주했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
이지를 상실한 기색은 없는 눈이다.
정신 간섭을 당한 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다면 유일하게 남는 선택지가 떠올랐다.
배신.
어떤 이유로?
서하영이 붙잡혔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지금도 술법이 확실하게 가동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
단숨에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허공을 박찬 철백이 다시금 설천위를 향해 돌진했다.
안면을 노리고 파고드는 주먹.
카가가가각!
흑도를 만들어 내서 도의 옆면으로 그 주먹을 받아 낸 설천위는 쇠가 쇠를 긁는 듯한 소음을 만들어 내며 주먹을 위로 튕겨 냈다.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주먹과 함께 허리를 숙인 설천위는 도를 비틀 듯 철백의 손을 튕겨 내고, 그대로 철백의 몸을 그었다.
또다시 금속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허망하게 빠져나온 흑도가 허공을 가른다.
“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아예 방어는 생각하지 않고 추가타를 준비한 철백의 주먹이 그대로 설천위에게 꽂혔다.
허리를 비틀어 내지른 주먹.
쩡! 쩡! 쩡!
공격이 실패한 순간, 흑관을 겹쳐 만들어 낸 방어막이 아작나는 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흡!”
몇 장이나 밀려나 겨우 멈춰 선 설천위는 얼얼해진 옆구리에 미간을 찡그리면서 손을 털었다.
“더럽게 아프네.”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금이 간 흑도를 버리고 새롭게 만들어 낸 설천위는 어깨에 흑도를 걸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데…….”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철백을 지그시 응시하던 설천위는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조종을 당하고 있어서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신 간섭에 당해 조종되고 있는 거라면 보통 눈이 맛이 가는 경우가 많다.
게임에서도 그 부분은 착실하게 짚어 줄 정도로 두드러지는 특성이기도 하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
조종당하는 이의 마음이 온전할 리가 없으니, 당연히 눈이 맛이 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의 철백은 말이 없다 뿐이지 눈빛 자체는 생생했다.
다만, 그 눈빛도 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흐음.”
기이한 감각에 턱을 쓸면서 고민하던 설천위는 철백이 다시금 자세를 잡자,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던 생각을 끊어 냈다.
어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철백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면 차릴 때까지 두들겨 패 주면 될 일이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자문자답과 함께 다시금 땅을 박찬 설천위가 철백을 향해 돌진했다.
흑도를 내지르자 상대의 주먹이 파고든다.
때리려는 자와 베려는 자.
문제는 때리려는 자는 때리지 못하고 있고, 베려는 자는 베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
무(武)에 대한 자질은 부족하지만 노력과 고통, 아니 근성이란 것으로 그 부족함을 메운 설천위는 명색이 현경급 고수다.
순수하게 무(武)로만 현경에 오른 강자와 비교하면 기술적인 부분에서 모자람이 없을 순 없겠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근접전에 약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비교 대상이 너무 강하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기에 설천위는 철백의 공격을 모두 피하거나 흘려 내는 것으로 정타를 맞는 걸 완벽히 차단했다.
문제는 약하진 않지만 강하지도 않은 것이 공격에도 통하는 말이라 설천위의 도가 철백을 베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렇기에 두 사람의 전투는 숨이 막힐 듯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구체적으로 설천위에게만 숨이 막힐 듯한 방향으로.
철백은 그냥 몸으로 공격을 받아 내도 상관없지만, 설천위는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위험해지는 싸움이었다.
그야말로 치열하게 몸을 비틀며 이어 나가는 전투는 점점 더 설천위에게 불리해지는 것 같았지만…….
“미안, 조금 늦었네.”
서걱!
백유의 등장과 함께 설천위의 숨통이 트였다.
“저쪽 다리가 끈질겨서.”
“후우, 문제없어. 뭔지 모르겠지만, 정신 차릴 때까지 쥐어패 주면 될 일이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오는 백유를 향해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슬쩍 시선을 돌려 인왕사해를 살폈다.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다리의 모습.
소백진이 상대할 때도 보기 흉할 정도로 크게 갈라졌던 상처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뭐, 아이가 장난으로 대충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꿈틀거리지도 않는 것이 제대로 마무리까지 하고 온 모양이다.
[허허, 몰라보게 강해졌구먼그래.]
[역시 젊음인가.]
자신이 맡은 일을 다 끝낸 탓에 다시 혼령 상태로 돌아온 소백진과 현태중의 감탄에 백유가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죠.”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백유 덕에 분위기가 살짝 화사해졌으나, 철백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 화사함은 깔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저거 맞아?”
백유가 들어오면서 목과 어깨 사이에 만들었던 참격.
살가죽은 물론이고 근육까지 가르고 들어갔던 공격이었는데, 그 상처가 깔끔하게 나아 있었다.
고작 농담 몇 마디 던지는 사이에.
“이상한데.”
그렇기에 설천위는 위화감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꼈다.
철백은 꺾이지 않는 철인이지 끝없이 재생하는 불사가 아니었다.
저런 과한 재생력은 명백히 철백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렇다면?
“일단.”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것을 끊어 내고, 설천위는 움직이는 걸 선택했다.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쾅!!
철백이 이미 코앞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제압하자.”
철백의 주먹을 흘려 낸 직후 다시금 파고드는 설천위.
그런 설천위를 완전히 무시한 철백은 그대로 백유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목을 노리고 파고든 백유의 단검이 빠르게 치켜든 철백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간다.
베인 상처에서 솟아나는 피.
동맥을 벤 것도 아닌데, 저렇게 피가 솟구칠 수 있나.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설천위는 도를 내리그었다.
카가가가각!
여전히 베이지 않는 육체.
‘……단순히 검술의 차이인가?’
수련으로 현경에 오른 백유와 약발로 억지로 현경에 오른 자신의 차이인가?
그렇다면 술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며, 설천위는 몸을 비틀고 도를 휘둘렀다.
여전히 가운데서 발악하는 철백.
설천위와 백유의 합공을 맞아 철백의 몸에는 빠르게 상처가 늘어났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상처가 치유됐다.
흐르는 피조차 의미가 없는지 철백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일도 없었다.
그저 무식하게, 그저 한결같이.
“뭔가 이상한데?”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백유는 고개를 갸웃했고.
“천위, 이거 맞아?”
휘두르는 주먹이 빗나가고, 그렇게 생긴 틈에 설천위의 도가 파고든다.
약간이라도 의식하는 걸 실패한 순간, 백유의 단검이 어김없이 철백의 살을 갈랐다.
그리고.
“……왜 이렇게 허접해?”
백유의 물음에 설천위의 도가 우뚝 멈춰 섰다.
“뭐?”
쾅!!
“천위!”
의문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철백의 주먹에 가격당한 설천위의 몸이 날아갔다.
그대로 높은 건물의 지붕에 처박힌 설천위의 모습에 급히 발을 뺀 백유가 설천위에게 달려갔다.
설천위가 걸어 준, 그녀의 의지를 따라 발판을 만들어 주는 술법 덕에 무리 없이 설천위에게 도달한 백유가 잔해 속에 파묻힌 설천위를 끄집어내려는 순간.
“흐, 흐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잔해를 옆으로 치워 버린 설천위가 일어났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설천위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설천위의 행동에 백유도 머뭇거리고, 철백도 멈춘 그 순간.
[……혹시나 했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소백진과 현태중의 안타까운 목소리와 함께 웃음을 멈춘 설천위가 자신의 옆에 다가온 백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백유, 방금 뭐라고 했지?”
“응? 뭐? 아……. 허접하다고?”
“그래. 허접하다고?”
“응.”
설천위에게 큰 부상이 없는 걸 확인한 백유는 평소의 안색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너무 조잡해. 마치 대충 알고 있는 느낌으로 싸우는 것 같은?”
“그래? 그렇군.”
백유의 평가에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 몰랐을 줄이야.
바로 알아채지 못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
하나, 천마가 이곳에 없다.
둘, 백유는 본래의 철백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미안하다……. 설마 현경에 오른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우리가 널 과대평가했구나.]
셋, 소백진과 현태중은 아무리 그래도 현경이 된 설천위인데 자신들보다 안목이 좋겠지, 라고 생각했다.
……는 전부 핑계고.
사실 딱 하나다.
“이런, 개 같은…….”
부들거리며 이를 악문 설천위는 철백, 아니 철백의 몸을 조종하는 존재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철백은 외공을 주력으로 익혔으나, 무술의 깊이가 얕은 사람이 아니다.
평상시에는 굳이 쓸 필요가 없으니 쓰지 않는 것일 뿐.
설천위와 백유의 협공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마저 무식하게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무식하게 싸웠고, 몇 번이나 백유에게 상처를 입었다.
즉.
“누군데 철백을 흉내 내냐고?”
상대는 무학에 대한 깊이 없이, 단지 철백의 몸에 새겨진 육체의 기억만으로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현경이나 된 사람이…….]
[경이롭구나, 경이로워.]
설천위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그냥 현경에 올라서 할 만해진 줄 알았지…….
철백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내면에 깊게 억누르며, 설천위는 흑관으로 순식간에 사방을 점령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게 만들어 주지.”
“천위, 솔직히 좀 멋없어.”
명석한 두뇌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백유의 게슴츠레한 눈에 설천위는 눈을 감았다.
그만. 나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