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0화
579화-전면전 (3)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군요.”
“허허, 처자의 그 말투는 참으로 어색하군.”
“처자라고 하기엔 너무 늙어 버린 노괴 아닙니까?”
“무례하기까지 하네요.”
담을 넘어 들어온 주제에 당당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언여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분의 권속이니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 드려야겠군요.”
“그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면 참 예의 없어 보인다는 거 아나?”
지금 언여휘의 생김새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이쪽은 노인과 중년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예의 없어 보이는 게 누구겠는가?
소백진의 덤덤한 도발에도 언여휘는 차분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그런 태도가 무례하다는 겁니다. 예의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죠?”
단숨에 하늘로 치솟은 발이 그대로 떨어진다.
신법으로 도약해 단숨에 자리를 이탈해 양쪽으로 찢어진 소백진과 현태중은 각자의 역할대로 움직였다.
현태중은 언여휘에게 달려들고, 소백진은 인왕의 다리에 있는 오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먼저 단숨에 치솟은 현태중은 발아래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흑관을 밟으며 언여휘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건 참 편하군.”
설천위의 힘을 조금 나눠 받은 것만으로 공중에서 이처럼 자유로워지다니.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렇게 허공으로 치솟은 현태중은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언여휘.
부드러운 몸짓으로 현태중의 검을 피해 내는 언여휘는 다른 분신들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피하는 것에 이어 아예 거리를 좁혀 파고드는 언여휘의 행동에 살짝 놀란 현태중이 검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짧게 손과 손이 얽히는 부딪침이 지나가고, 다시금 거리를 벌린 언여휘가 현태중의 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능력이 많은 낭군님이시군요. 아랫것들에게 이런 것도 베풀어 주시고.”
“……역시 예의가 없다는 말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어른한테 못 하는 말이 없는데?
물론 실제 나이는 저쪽이 더 많겠지만.
자신의 딸이 죽지 않고 컸다면 그보다도 어렸을 외모의 적에게 아랫것 취급을 받는 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언여휘의 언행에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던 현태중은 검을 늘어트린 채 부드럽게 웃었다.
기분이 나빠졌던 것을 털어 내고.
잡념을 털어 내고.
순수하게.
“그럼 즐겨 보세.”
노닐어 보자.
선유적월검(仙遊跡月劍)이라.
그것은 노니는 신선의 발자취를 좇아 만들어진 검로이니.
그 안에 살아가는 이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선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다가 그 끝에 도달하는 것이다.
신선을 따라가는 그 과정은 신묘하고, 기이하며, 몽환적이니.
수십 수백으로 불어나는 검격 속에서 언여휘는 열심히 몸을 비틀었다.
그런 언여휘를 향해 끊임없이 검격을 쏟 아내던 현태중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지는 순간.
촤악!
언여휘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수십 수백의 검로 속에서도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검.
언여휘의 이목을 완전히 속이며 완성된 그 일격에 현태중은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은 심검(心劍)이라 불리는 경지에 도달한 일격이었으며, 현태중이 살아생전에 그토록 갈구했으나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의 검이었으니까.
* * *
“허허, 벌써 시작했구먼.”
현태중의 기세가 기이하게 일렁이는 것을 느낀 소백진은 웃으며 자세를 고쳤다.
현태중이 언여휘를 붙잡고 있는 동안, 자신은 이 괴물 같은 다리를 벤다.
근육이 어마어마하게 붙어서 만약 서서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면 허벅지 근육 때문에 무릎이 안 보일 것 같은 다리.
근육의 크기만 보면 진짜 인왕의 다리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상관인가.”
머릿속에 떠오른 실없는 의문을 털어 버린 채 소백진은 자세를 고쳤다.
현태중은 한참을 싸워야겠지만, 이쪽은 금방 끝날 거다.
애초에 무공의 특성이 그러하니까.
이쪽은 빠르게 끝내 주는 것이 미덕인 무학을 익혔으니,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호흡을 고르고, 도를 천천히 꺼내든 순간.
“……이건 좀 불쾌하군.”
저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백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던가?”
준비한 것을 꺼내려 하는 순간에는 방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사는 도리인 것을…….
물론, 그러다가 목 날아가는 게 일상이니 사파에서는 전혀 챙겨 주지 않는 도리이지만.
생각해 보면 정파에서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열심히 준비한 성의를 봐서 끝까지 봐 주긴 해야…….
“급하구나.”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파고든 창에 가볍게 물러난 소백진은 그대로 도를 휘둘렀다.
깔끔하게 휘둘러진 도가 단숨에 창대를 가른다.
창에게 죽음을 선사한 소백진은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몸을 내밀었다.
[윽?!]
창이 잘려 버린 것에 당황한 적이 다급하게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옮기는 순간.
이미 궤도를 틀어 휘둘러진 소백진의 도가 그대로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자신의 두 번째 죽음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검을 뽑은 육체가 검을 온전히 뽑은 뒤에야 쓰러진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옛날 관의 녹을 받아먹었던 사람으로서 소백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장수들의 모습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들의 죽음이 이리도 모욕을 받을 줄이야.”
[헛소리 집어치워라!]
소백진의 말을 무시하고 장수 하나가 소백진의 일격을 한껏 경계하며 돌진했다.
한 번만 제대로 막으면 이긴다는 생각으로 달려드는, 그야말로.
“어리석구나.”
어리석음의 극치.
너무나도 허망하게 목을 내어준 장수가 땅바닥을 구른다.
죽음에서 억지로 일어났던 육체가 다시 죽음을 맞이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욕망에 빠져 죄를 새롭게 죄를 짓는 이들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구나.”
지금 죽은 자와 같은 눈을 하고 있던 장수들이 머뭇거리고.
씁쓸함과 기대를 품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수들이 한 걸음 내딛는 것을 발견한 소백진은 안타까움을 도에 담아 그들을 겨눴다.
“이미 그 자격은 내게 없으나, 하다못해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내 그대들을 안식처로 보내 주리라.”
* * *
“……생각보다 꽤 격렬한데.”
소백진을 막기 위해 튀어나온 적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황궁에서 튀어나온 장수들만이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 악취를 풍기는 것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하수구에 숨어 살던 쥐들이 대량으로 거리에 나온 것처럼.
그들이 풍겨 대는 악취에 코끝을 찡그리며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이건 웬만하면 하기 싫었는데.”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는 악취.
객잔을 지키며, 그들을 처리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적이 왜 이런 병력을 푸는가.
“아무래도 그걸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얼마나 준비가 끝났지?
발동만을 남기고 있는 거라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발동까지 시간이 꽤 남은 거라면 차라리 지금 행동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고민했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종합해 적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필사적으로 유추해 냈다.
적들의 반응.
도시의 상태.
일행의 행적.
과거의 기억.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머리를 굴린 설천위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다. X바.”
진짜로 모르겠네.
만약 발동 직전이라면 왜 발동시키지 않지?
발동이 아직 멀었다면, 왜 이런 식으로 전력을 낭비하지?
왜?
어느 쪽이든 시원하게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최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선을.
차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악을.
차악을 선택할 수 없다면 최악을…… 은 아니고.
이건 너무 갔지.
아무튼.
“너희가 선택한 거다.”
상대의 수를 예측해 최선의 수를 고를 수 없다면,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겠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차라리 질러 버리는 게 더 낫다.
그렇게 결정한 설천위는 그 자리에 앉아서 손을 움직였다.
양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 그대로 벌린다.
두 손을 타고 흐르는 보라색의 기운이 형체를 이뤄 문을 만들어 내고.
그 문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 되어 완전히 형체를 갖췄다.
경지가 오르며, 상당히 아름답게 변한 문을 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면전. 까짓것 해 보자고.”
* * *
쿵!
[숨이 막히는군.]
제도의 외곽.
설천위를 경계하기 위해 그곳에 직접 발을 들이민 웅추는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피부를 따갑게 하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혀를 내둘렀다.
강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분도 육체를 되찾지 못하면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사실이었군.’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귀찮은 것들을 채찍질하며 대업을 이끌어 가시는 그분을 떠올린 웅추는 마음을 다잡았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나,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임무쯤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거기다.
‘놈도 그다지 여유는 없을 거다.’
지금 궁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인간 둘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저 괴물이 불러낸 식령이라고 했다.
그쪽에도 힘을 쏟고 있고, 언여휘가 틈틈이 움직이는 인왕의 발을 경계하고 있으니 오히려 본체는 약해졌을 터.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
그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 도시에 퍼지는 죽음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승리를 확신한 웅추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건 당신의 오만이군요.”
그리고 그런 웅추의 확신에 답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가차 없이 땅을 박찬 웅추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돌진했다.
짓뭉갠다.
그것만을 노리고 파고든 웅추의 거대한 손이 그대로 대상을 찍어 눌렀다.
인간의 몸체에 달린 곰의 팔.
닿는 순간, 그 발톱에 살이 찢기고 그 힘에 뼈가 으스러져야 정상일 일격이 상대를 덮쳤다.
그리고.
파직!
흩어졌다.
손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에, 아니 약간의 찌릿함만이 남은 것에 놀란 웅추가 두 눈을 크게 뜬 순간.
[드디어.]
기이한 환호로 차오른 목소리가 일렁였다.
조금 전과 달리 목에서 나온 육성이 아니라, 영력의 떨림으로 만들어 낸 목소리.
[끝을 맞이할 때가 왔구나.]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벼락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눈앞의 상대에게서 벼락이 쏟아져 나왔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의 형태에 그대로 노출된 웅추의 몸으로 수천 다발의 번개가 지나간다.
살과 가죽이 타고.
털이 그을려 사라지고.
내장조차 망가진다.
[커헉! 어, 떻게?]
육체의 강함이 전부이자 장점인 축생의 유생.
그중에서도 무려 온전한 이성을 손에 넣을 정도로 고위 개체인 웅추는 거리에서 잡것들에게 당한 위효 같은 졸개와는 격이 달랐다.
이미 완성된 존재.
그런데……!
[끄으으아아아아아아아!!!]
[부질없는 발악입니다.]
그런 웅추의 몸에 다시 한번 수천 다발의 벼락을 꽂아 넣은 백화단주가 웅추의 발악을 짓밟았다.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좋지 못한 냄새와 함께, 끝내 무너지는 웅추.
무릎을 꿇고 침을 흘리는 그 육체는 인간의 형태 따위 없는, 말 그대로 곰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처음부터 본체를 드러낸 상태였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진 않았겠죠.]
이미 한 번 벼락에 당해 방어가 뚫린 상태에서 뒤늦게 변한다고 한들, 이미 길이 뚫린 상황에서 재차 벼락이 내부를 헤집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축생의 유생.]
그 재생력까지 알고 있는 성화린은 다시금 벼락을 때려 박아 웅추의 혼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리고 원화(元化)의 술(術)을 풀고 다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간 성화린은 저 멀리 보이는 존재를 노려봤다.
말없이 언여휘를 노려보는 그녀의 뒤로 속속 백화단의 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의 병력이 황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