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7화
576화-천벌 (6)
설천위가 사용하는 술법, 흑관(黑棺)에는 무게가 없다.
이제는 관(棺)이라는 형태를 벗어난 지 오래된 이 술법의 뿌리는 원래 방어 술식이다.
벽을 만드는 방어 술식으로 입체적인 형태를 구축해 만들어 낸 술법.
그것이 바로 흑관이다.
실제로 영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평소와 같은 감각으로 흑도를 불러냈다가 무지막지한 크기에 다시 취소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무게의 제약이 없어 아무렇지 않게 휘두를 뻔했다.
정말 말 그대로 술법의 범주.
실체는 있지만, 무게는 없는 기이한 형태의 물건이 설천위가 만들어 내는 흑관이다.
그런데.
“에?”
그런 흑관에 천마에게서 배운 중력의 묘리를 담는다면 어떨까?
질량이 없으니 무게도 없다는 과학적인 사고는 제쳐 두고, 설천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흑관에 무게가 부여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늘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치켜든 연화는 헛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멎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게 뭐야.”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언가가 저 하늘의 태양을 가려 버린 결과라는 것을 깨달은 연화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뛰어난 감각이 그녀에게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저건.
“……단주님?”
이 인간이 만들어 낸 거라고.
고개를 돌려서, 팔짱을 끼고 있는 설천위를 바라본 연화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아무리 괴물 같은 양반이라도…….
‘이건 힘들지.’
평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황궁을 노려보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연화는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이쪽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럴 땐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연화가 입을 다문 사이, 하늘에 생겨난 거대한 그림자는 구름을 꿰뚫었다.
질량을 가진, 거대한 기둥이 그대로 구름을 꿰뚫고 땅으로 떨어진다.
말 그대로 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칠흑의 기둥은 이것이 제천대성이 내린 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절로 들 정도로 거대하고 장엄했다.
그리고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그 기둥이 떨어지는 공포만을 떠올리던 연화는 이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저 기둥이 단순히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다르다.
얼핏 보면 느리게 느껴질 정도로 저 하늘 까마득한 위에서부터 떨어지고 있는 기둥이었지만, 그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잠깐 넋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연화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이제 실질적인 위협으로 황궁에 강림했다.
쿠구구구구구!!
짓누른다.
거대한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압이 마치 그 밑에 있는 존재들이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불허하겠다는 듯 쏟아져 내렸다.
무형의 힘이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짓밟기 위해 떨어진다.
그리고.
화르르륵!
기둥에 붙은 새하얀 불이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 기세는 더욱 강렬해졌다.
그야말로 이 일대를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일격이 황궁의 머리 위에 도달하는 그 순간.
황궁의 하늘을 가르고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며 떨어지는 기둥을 향해 똑바로 돌진하는 세 개의 인영.
마치 검은 그림자로 가려진 것처럼 똑바로 보이지 않는 세 존재가 뛰어올라 기둥에 도달한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짐승의 발과 부정형의 주먹, 그리고 살점으로 기워진 손이 하늘을 막았다.
기둥의 경로를 틀어막고, 기둥을 깨부순다.
짐승의 발톱이 기둥을 갈라 금을 만들어 내고.
부정형의 주먹이 후려치는 것으로 그 균열을 확장시킨 뒤.
살점을 기워 만들어진 손이 기둥을 산산이 부수었다.
완벽에 가까운 연계.
그들이 서로 손발을 맞추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설천위는 미소와 함께 팔짱을 풀었다.
“감히!!”
분노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던 장막마저 치워 버리고 고함을 내지르는 사내와 마주한 설천위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지금 그거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부서졌으나, 사라진 건 아니었다.
웬만한 술법이라면 부서진 순간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진짜 말도 안 돼.”
설천위의 술법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부터 기둥의 형태로 만든 것이 아니라, 파편의 형태로 만든 것들을 합쳐 기둥을 형성한 것이기에.
어차피 부서질 것을 알고 만든 것이기에 기둥의 파편은 사라지지 않고 황궁 전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화염을 휘감은 채.
“네 이노오오옴!”
분노를 토해 내는 사내를 무시하고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그럼 튈까?”
“네?”
“이 상황에서 저 셋을 상대하는 건 나라도 무리거든. 거기다…….”
이렇게 대놓고 깽판을 부릴 수 있는 이유.
히죽 웃으며 뒤를 돌아본 설천위는 화를 토해 내는 것과 달리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셋을 보며 연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쟤들이 진짜로 눈 돌아가기 전에 어서 튀자고.”
“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야 뭐든 좋지!
고개를 끄덕인 연화가 설천위에게 달라붙자,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전이문을 열었다.
“그럼 바이바이~!”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의 눈빛을 만끽하며 손을 흔든 설천위는 그대로 전이문을 통과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설천위.
동시에 패융까지 연기가 되어 흩어져 황궁의 하늘을 비우자, 보통 때와 같이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원 모양의 구름들이 있다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보통 때와 다름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까득!
하늘에 떠 있는 사내, 구복의 속은 그런 맑은 하늘조차 노랗게 보일 정도로 뒤집혀 있었다.
* * *
“아우!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왔네…….”
“그럼 당연히 살아서 돌아오지 죽어서 돌아올까?”
후들거리는 다리로 의자에 늘어지는 연화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꺼내 왔다.
요 사흘, 연화를 수련시키면서 생활하다 보니 이런 풍경이 꽤 익숙해졌다.
“아주 빠져서 말이야, 단주를 부려 먹기나 하고.”
“그렇지만 너무 힘들잖아요오.”
탁자에 턱을 올린 채 뭉그적거리는 연화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빨리 먹고 쉬기나 해. 너도 슬슬 시작해야지.”
“네. 네……?”
시작?
뭘 시작해?
“저 혼자 따로 뭘 하나요?”
“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들 다 수련하고 있는데, 너도 해야지.”
“……여태까지 했던 건 수련이 아닌가요?”
“그거야 바쁜 단주의 일을 도운 거지. 네 수련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어디 있었어?”
“잠입, 전투, 단주님 옆에서 기세 버티기……?”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딱히 수련은 아니지.”
그게 뭔 개소……. 흠흠.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잘 삼켜 낸 연화는 한숨을 참으며 물었다.
“그럼, 저도 한 사흘 정도 수련하나요?”
“얘가 빠져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하루 이틀이면 깨어날 텐데, 너도 그 정도에 깨어나야지.”
“아하.”
그럼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가?
“뭐,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설천위까지 그렇게 말하자, 살짝 안심한 연화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한 시진 정도 늘어져서 운주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그럼 시작하자.”
“눼…….”
꿀 같은 휴식을 끊어 내고 자신을 불러낸 설천위의 모습에 입술이 살짝 튀어나온 연화는 날카로운 설천위의 눈빛에 재빨리 튀어나온 입술을 넣었다.
“그래서 저는 무슨 수련을 하나요?”
조금 빡세게 기세 버티기?
아니면…… 음.
딱히 감이 안 잡히는데?
자신이 받게 될 수련이 뭔지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화를 보던 설천위는 자비롭게 웃었다.
“자, 가부좌 틀고.”
“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네.”
차분하게 가라앉은 연화의 숨소리를 들으며 설천위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파편을 나눠 줄 거야.”
“네.”
“잘못해서 먹히면 죽으니까 절대로 지면 안 된다.”
“네…… 네?”
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떠서 반문하려던 연화는 강렬하게 몸을 뒤흔드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눈을 떠서 반발한다는 생각 따윈 순식간에 잊게 하는, 그야말로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럼, 하루 정도 기다려 줄 테니 빨리 처리하고 나오도록.”
내면세계로 강제로 빨려 들어가는 와중에 들려온 설천위의 목소리에 연화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미친…….’
……단주 놈아.
* * *
고오오오오!
허공에 떠올라 깊은 명상에 들어간 연화에게서 조심스럽게 물러난 설천위는 생각보다 더 멀쩡한 연화의 상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재능 하나는 끝내주네.”
[네 녀석만큼은 아니다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재능은 충분히 되는 아이다.]
나야 뭐 스킬의 도움도 받고 있으니까.
손휘의 평가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손휘에게 연화의 감시를 맡겼다.
만약에 일이 틀어지더라도 손휘가 설천위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리라.
“그럼, 우리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좀 해 볼까요?”
몸을 돌려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운주에게 다가간 설천위는 자신을 바라보는 올곧은 눈빛에 빙긋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결말을 원하십니까?”
저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데.
덤덤한 설천위의 물음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운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장수.
하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도와주다가 죽은 노장이고.
하나는 커 버린 자신을 지키다가 죽은 장수다.
자신의 목숨은 이들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이곳까지 흘러왔다.
저 높은 황궁에서 일반 백성들이 사는 이곳까지.
짐승들이 다니는 산길까지.
한쪽 팔을 잃고 세상을 떠돌았던 황제는 예전처럼 자신을 지켜 주는 장수들을 충분히 눈에 담은 뒤에야, 설천위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괴물.
그가 당장 몇 시진 전에 저지른 짓을 모를 수 없었다.
수도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객잔에서조차 그 거대한 기둥은 똑똑히 보였으니까.
이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의 백성이되, 자신이 그 머리에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또 하나의 신이다.
어쩌면 황궁에서 피를 쥐어짜고 있는 그 괴물들과 같은 영역에 도달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혀가 마르고 입술이 갈라지는 것 같았으나,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과인은 올바른 결말을 원하오.”
“올바르다 하시면, 폐하께서 옥좌에 다시 오르는 결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옳다면 그리해야겠지.”
그것이 옳다면.
자신이 옥좌에 오르는 것이 꼭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없는 황제의 대답에 설천위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시선을 받아 내며, 황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올바르게 살았던 이가 올바른 대우를 받고, 죄를 지은 이가 죄에 합당한 벌을 치르고, 성실함으로 삶을 살아온 이가 그 성실함에 보답받을 수 있는 세상.”
자신이 품고 있던 속내를 뱉어 내며, 황제는 이젠 떨림 없는 눈동자로 설천위를 마주했다.
“내가 바라는 결말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오. 내가 옥좌에 오르는 것은 그것을 위한 시작에 불과할 뿐.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아, 거기까지면 충분해요.”
망설임 없이 황위를 넘길 기세인 황제의 말을 끊은 설천위는 웃으며 황제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신 같은 분이라면, 얼마든지 밀어 드릴 수 있겠네요.”
왜 육도의 세계가 꿈도 희망도 없었는지 궁금했는데, 이 양반이 죽어 버리는 세상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는 생소한 느낌에 황제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쿵!
“이런.”
밖에서 울리는 거대한 울림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제대로 화가 났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