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6화
575화-천벌 (5)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황궁의 한 건물. 그곳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노인이 호통을 치자, 그 밑에 있던 이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저 분노가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순간, 누구의 목이 날아갈지 몰랐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하늘에 나타난 흑룡뿐만 아니라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괴인까지…….”
“도저히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부하들의 목소리에 기어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닥쳐라! 네놈들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무슨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냐!”
“하, 하오나…….”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분노로 수염을 부들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노인이 자신의 옆에 있던 칼을 뽑아 들자, 분위기는 단숨에 흉흉해졌다.
“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다른 방법을 고안해 오겠습니다!”
검을 제대로 휘두를 힘이나 남아 있을지 걱정되는 노인이 분노를 터트렸음에도 부하들은 바로 자신의 목 앞에 칼을 들이민 것처럼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리고.
“어머, 어머, 그런 흉흉한 물건은 치워 주시와요. 소녀, 무섭습니다.”
그런 노인의 곁에서 몸을 바짝 붙인 여인이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노인의 손을 휘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에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던 손이 진정되었다.
이윽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칼끝.
칼을 쥔 손을 타고 올라온 여인의 손길이 노인의 턱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대체 어떤 모지리가 대인의 심기를 이리 불편하게 만들었는지요?”
“저, 저 쓸모없는 것들이니라…….”
혼이 나간 것처럼 여인의 손에 뺨을 비비는 노인이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자신의 앞에 있던 자를 가리켰다.
“어머, 그렇군요? 저 사람이 대인을 불쾌하게 만든 못된 사람이란 말이지요?”
“제, 제가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여인의 부드러운 시선을 마주한 부하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려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땅을 엉금엉금 짚으며 그대로 물러나던 사내가 빌다 못해 아예 등을 돌려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는 순간.
“어머 어머, 추하기는.”
어느새 그의 위에 올라탄 여인의 발이 사내의 등을 짓눌렀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목숨을 구걸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여인은 입술을 핥았다.
“그건 대인께서 정하실 일 아니겠니?”
미소와 함께 몸을 돌린 여인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움찔거리는 노인을 가리켰다.
“저 대인께 빌어 보는 게 어떻겠니?”
“제발, 제발…….”
“쯧.”
이미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어버린 상대의 모습에 여인은 그만 흥이 식었다는 듯 혀를 찼다.
이놈이 저 냄새나는 노인에게 매달렸으면, 더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흥이 식어 버린 아쉬움에 여인은 귀찮다는 듯 발을 눌렀다.
사내의 등이 아니라 목에.
뿌득!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오줌을 지린 사내의 사체에서 떨어진 여인은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대인, 냄새가 나니 다른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소녀, 조금 뜨겁습니다.”
“뜨거워? 허허, 그럼 가야지. 암, 가야 하고말고.”
여인의 노골적인 유혹에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조금 전의 분노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 여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흑…… 흑…….”
“까윽…….”
눈물을 삼키며 몸을 비트는 부하들의 몸에서 붉은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여인에 의해 새겨진 문양.
나이 들어 쇠퇴한 노인의 정력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는 부하들의 몸에 이런 문양을 새겼다.
체력과 수명이 빠져나가는 고통에 부하들이 몸부림치는 사이, 노인은 여인의 품에 안겨 스스로의 욕망을 토해 내고 있었다.
다른 이의 생명을 갈취하면서까지 쾌락을 즐기는 노인은 본디 풍채가 좋았다.
고작 2년.
인자한 성품에 박학다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부한 지식과 높은 식견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정책을 고민하던 노인이 완전히 망가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 * *
“식욕, 생존 욕구, 성욕 등등……. 의외로 인간은 본능 단계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하늘.
흑관으로 만든 바닥 위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는 설천위의 말에 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돈은 왜죠?”
그건 딱히 본능 단계에서 추구하는 건 아니지 않나?
황궁으로 들어가는 물건들을 강탈하기 시작한 지 이틀.
처음에는 산 제물부터 시작해 빠르게 종류를 넓혀 갔다.
미색을 갖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궤짝을 가득 채우는 금괴, 기이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식재료 등등.
수많은 것들이 황궁으로 들어가려다가 설천위와 연화의 손에 막혀 버렸다.
단순히 금괴와 식재료를 옮기는 마부들은 기절시켰고, 사람을 옮기던 마부들의 경우 딱히 그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죽은 자도 있을 것이고, 산 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한 배려는 딱 거기까지였다.
무지하다고 해서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돈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살 수 있거든.”
연화의 물음에 대답한 설천위는 씁쓸함을 담은 얼굴로 웃었다.
“황궁의 권력으로도 구할 수 없는 걸 돈으로 구할 수 있지. 권력의 또 다른 형태가 금력이야.”
“그러면…….”
“금을 갈구하는 것들은 처음에는 권력을 갈구했다가 정신이 나가면서 수단으로 추구한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린 꼴이지.”
한 마디로 망가졌다고 할 수 있지.
뭐, 저기에 있는 인간들 전부가 망가진 상태지만.
연화는 강탈만 담당했지만, 연화와 패융이 일하는 사이 황궁 곳곳을 살피던 설천위는 참 못 볼 꼴을 많이 봐 버렸다.
어린 연화에게는 보여 주는 게 죄책감이 들 정도로 끔찍하고 더러운 꼴들을.
연화도 무림인이니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참 엿 같네.’
사람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역겨운 광경들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겠지.
한숨과 함께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광경들을 깨끗이 날려 버린 설천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하루에서 이틀.
그 정도의 시간만 더 기다린 뒤에 본격적으로 황궁을 공격할 거다.
이 정도로 대놓고 견제하고 공격했으니, 적들도 한껏 달아올랐겠지.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쓸어버리고 싶지만…….
‘무리겠지.’
황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언여휘의 기척 이외에도 두셋 정도, 지금의 설천위조차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마 혈주와 같은 수장급의 괴물들이겠지.
혈주의 혼을 온전히 흡수하면서 격이 급격하게 높아졌고, 백호의 피가 섞인 영약을 먹으며 육체의 환골탈태까지 끝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적이 됐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수장급 둘…… 아니, 셋 정도를 만나면 패배를 면할 길이 없으리라.
‘둘 정도는 어떻게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지만.’
그 정도로 강해졌다, 이거지.
음.
스스로의 빠른 성장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네.
그렇게 감탄하던 설천위는 문뜩 떠오른 것이 있어서 오랜만에 스킬창을 열었다.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제때 체크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
예전에 패기를 上下로 올리며 처음 봤던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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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습득 조건 충족(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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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전부 충족되어 있었다.
하나는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서, 나머지 하나는…….
“이것 참…….”
혼을 먹어 치우면서.
경지가 오르고 오른 혼원패공이 어느새 천이 넘는 숫자를 품었음을 알게 된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그리도 많은 죽음과 연을 맺었던가.
무림맹에서 활동하며 혈교나 혈사련 같은 곳의 종자들을 거침없이 죽이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죽였을 줄이야.
게임도 아니고 현실에서.
사람을 그토록 많이.
“참…….”
하나를 죽이면 살인자요,
열을 죽이면 살인마고,
백을 죽이면 악인이나,
천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그 말을 떠올린 설천위는 헛웃음과 함께 세 조건이 충족되어 얻은 스킬을 바라봤다.
“이거…… 내가 써도 되는 건가?”
진짜 잘 모르겠는데……?
잠시 스킬창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스킬창을 닫아 버렸다.
이미 스킬은 의미가 없는 지경에 도달했으니까.
스킬에 의존해 앞으로 나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몸에 달라붙는 것들이 좀 많아야지.
스킬은 자신을 보조해 주는 용도로 쓴다.
딱 거기까지다.
덕분에 인간답지 않은 놀라운 회복력도 손에 넣었고, 독에 대한 내성도 얻었으니 더 바라면 욕심이겠지.
잡념을 털어 낸 설천위는 스텟창은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섰다.
“뭐 하세요?”
“슬슬 토끼 굴을 제대로 들쑤셔 봐야지.”
하루에서 이틀.
이 정도 기다리는데 맞는 놀이는 이미 딱 정해 놨다.
“사람들이 하는 말 들어 봤어?”
“예? 뭐가요?”
“저 사람들이 이 패융을 보고 하는 말 들어 봤냐고?”
“……아뇨.”
옆에서 하루 종일 일만 했는데, 언제 들어 봐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서 운주랑 노닥거릴 시간도 부족한데…….
가늘어진 연화의 눈동자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천벌이란다.”
“네?”
“저 사람들이 이 녀석을 보고 하는 말. 황궁이 뒤숭숭해서 천벌이 내린 거란다.”
다들 무서워서 속삭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미 경지를 뛰어넘은 설천위가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럼 보여 줘야지. 천벌이란 게 뭔지.”
뭐, 별거 아니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가벼운 몸풀기 정도다.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설천위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요 이틀간,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들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면서.
“밑에 사람들만 움직여서야 되겠어? 윗사람들도 힘 좀 써야지?”
* * *
도발.
설천위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은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어린 황제에게 숙부라고 불렸던 사내.
거구의 덩치를 일으킨 사내는 평소라면 가지 않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집무실엔 없고, 그가 머무는 손님용 방에 있는 곳.
노대(露臺)로 나간 사내는 저 멀리 떠 있는 흑룡을 바라봤다.
무언가,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런 확신을 품고 흑룡을 노려보던 사내는 딱히 변화하지 않는 흑룡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무언가가 변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이…….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꺄하하하하하하! 천위! 우리 천위! 이 미쳐 버린 종자야~!]
궁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언여휘의 웃음에 그는 기어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짓이냐, 언여휘?”
아무리 황궁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꺄하하하! 구복(九復), 아직도 눈치 못 챘어? 황궁에서 좀 놀고먹더니 실력이 많이 녹슬었구나?]
조롱으로 가득 찬 웃음과 함께 언여휘의 인형이 허공에 나타났다.
[저거, 안 막으면 우리 죽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키는 언여휘.
그런 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대로 고개를 올린 구복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게?”
인간의 짓이라고?
황궁 위.
흘러가던 구름들을 찢어발기고 거대한 원을 만들어 낸 무언가가 미처 흩어지지 못한 구름을 휘감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이 거대한 황궁의 십분지 일은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두께의 기둥.
새하얀 화염에 휩싸인 기둥이 운석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방치하면 안 된다.
힘을 아끼기 위해 설천위가 날뛰던 것을 방관하고 있던 이들은 즉시 움직였다.
허공으로 떠오른 몸으로 그대로 힘을 증대시킨다.
짐승의 발과 부정형의 주먹, 살점으로 기워진 손이 하늘을 막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 폭음조차 길게 늘어지는 굉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 함께 압도적인 영력의 충격이 황궁 전체를 휩쓸었다.
기둥을 완전히 파괴했으나, 구복은 산산이 부서져 황궁으로 쏟아지는 새하얀 불꽃들을 보며 포효했다.
“감히!!”
이딴 식으로 힘을 소모하게 만들다니!
저 멀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설천위를 확인한 구복의 눈동자가 분노로 거세게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