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574화-천벌 (4)
“일 처리 한번 화끈하시네요.”
“우물쭈물하다간 때를 놓칠 테니까.”
설천위 일행이 머무는 객잔. 그곳에서 느긋하게 앉아 밥을 먹던 설천위는 서하영의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에 피식 웃었다.
“그래서 뭐가 그리 불만인데?”
“아니 뭐, 저희한테 상의를 안 한 건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섭섭해서 그러죠.”
“뭐, 그렇지.”
“이 인간이?”
거기서 ‘그렇지’가 나와?
눈을 살벌하게 뜨는 서하영의 손이 창을 움켜쥐자, 설천위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그거 놓고 말해. 거, 밥 먹는데 살벌하게 하기는.”
“흥,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증명하고 싶은데요?”
“거참, 그런 거 필요 없대도.”
또다시 입술이 툭 튀어나오는 서하영의 모습에 이번엔 주위의 사람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누님, 꼭 증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 녀석쯤 되면 눈으로 본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음음.”
삼총사의 반응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그나마 한눈에 보이는 건 현운이 정도?”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장 강해진 건 주현운인데?
강해진 만큼 기도가 안정적으로 가라앉아서 지금의 주현운은 다른 사람들도 얼핏 보면 무공을 안 익혔나 착각할 정도다.
그런 주현운의 수준이 잘 보이고, 나머지는 안 보인다는 건 어떻게 돼먹은 안목이야?
“그야,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것이 영…….”
“내가 증명하고 만다!”
놀리듯 젓가락을 까딱이는 설천위의 태도에 분노한 서하영이 창을 뽑았다.
“언니, 진정하세요!”
그런 서하영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달려든 연화가 재빨리 서하영을 끌어당겼다.
“아우! 다른 분들은 왜!”
안 말리세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미 살벌해진 공기에 슬쩍 눈동자를 돌린 연화는 깨달았다.
‘아, 전부 긁혔구나.’
설천위 앞에서야 약하지, 동년배를 넘어 무림 전체를 봐도 이름을 떨칠 강자들인데.
저런 식으로 도발하면 자존심이 긁힐 만도 하지.
나는 애초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돼 별 타격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구나.
음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자각한 연화는 슬그머니 서하영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괜찮소, 누이?’
‘응.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운주의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꾸해 준 연화는 운주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증명할 생각이 만땅인가 보네?”
“형님, 그쯤 하시는 게…….”
“에이, 최종 결전에 앞서서 할 건 해야지.”
말리려는 주현운에게 손을 내저은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손을 들었다.
“그럼 준비~!”
웃음과 함께 번쩍 들었던 손으로 탁자를 내려친다.
“땅!”
설천위가 탁자를 치는 소리와 함께.
“……어?”
별안간 서하영은 산 중턱에 서 있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순식간에 사람들을 집어삼킨 흑관의 모습에 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별거 아니야. 조금 수련에 도움을 주는 위험한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혈주와의 심상 술래잡기는 설천위에게도 꽤 큰 도움이 됐다.
그냥 무작정 돌아다닌 것 같지만, 혈주가 만들어 낸 내면의 내면, 또 다른 세계를 헤매면서 설천위도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들어 낸 흑관은 그런 깨달음의 산물이었다.
“……형님.”
“오, 이걸 반응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갇히는 와중에 홀로 흑관에서 탈출한 주현운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저만 살기를 품고 노렸잖아요.”
“반응이 무뎌졌나 검사 좀 해 봤지.”
아주 희미한, 감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살기였는데, 그걸 반응했으니 훌륭하다고 할 만했다.
역시.
“현경에 오른 보람이 있네.”
“그래도 아직은 형님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지만요.”
“한참 멀었지.”
주현운의 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고기로 젓가락을 집으며 웃었다.
“이번엔 피하지 마라.”
쿵!
주현운마저 흑관 속에 가둬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운주와 연화를 바라봤다.
“히끅.”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는 연화.
그런 연화의 손을 잡아 주는 운주를 지그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나랑 따로 수련할 거니까 저기에 안 들어가도 돼.”
“아, 휴……. 응? 다행인 건가?”
차라리 저 안에 들어가는 게 몸은 편하지 않을까?
설천위가 하는 지옥의 폭력, 아니 수련을 떠올린 연화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해졌지만, 설천위는 이미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공자.”
설천위를 위해 음식을 챙겨 나오던 유예린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앞에 앉았다.
“왜 저는 안 하죠?”
왜?
그런 의문이 담긴 유예린의 시선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쓱 고개를 돌렸다.
“팔이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
“심상 세계에 들어가서 하는 훈련이라면 오히려 지금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심상 세계에서 굴러도 육체에 영향이 가…….”
“그래야 수련이 되죠. 당연하잖아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없어서 그래.”
“예?”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가 작은 걸 넘어 발음이 뭉개져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으니까.
“없어서 그렇다고.”
“없어서요? 뭐가요?”
“저 방식을 유 매한테는 사용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저한테만 사용을 못 한다고요?”
왜?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설천위의 뒤에서 나타난 천마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건 내가 설명해 주마.]
“아, 할배!”
[어허,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다른 때는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꼭 이럴 때만!
말리지 말라는 듯 스승님이라고 부르라는 천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아예 몸을 돌렸다.
그런 설천위의 반응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천위의 옆자리에 앉은 천마가 입을 열었다.
[이놈이 만든 저 수련은 심상 세계의 심층에 적을 만들어 수련하는 방식이란다. 그 안에는 이것저것 지독한 것들이 깃들지.]
살의, 죽음, 강자 등등.
설천위가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심상 세계의 심층에 도달한 이들에게 고난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고난은 충분히 죽음에 이를 수 있고, 마음이 꺾이면 얻는 것 없이 상처만 남아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물론 꺾이지 않고 이겨 냈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설천위는 친구들을 심상 세계로 보냈다.
하지만.
[믿음과 별개로 그냥 하기 힘든 것이 있지. 예를 들자면…….]
“연인을 사지로 내모는 것 같은 일이요?”
[정답이다.]
연화의 대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결론을 말했다.
[즉, 천위는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 수 없어서 저 술법을 너에게 펼칠 수 없는 게다. 심리적인 요인이 강하니, 억지로 펼친다고 한들 네게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지.]
“그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어색한 표정을 짓은 유예린은 이내 들뜨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준비한 게 있다.]
유예린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잘 부탁해요.”
[오냐.]
설천위의 인사와 함께 영역이 열렸다.
순식간에 천마와 둘만 남은 유예린은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강 위에 서서 천마와 마주 봤다.
“……이건?”
“천위 녀석이 네 수련을 도울 수 없으니, 특별히 내가 움직이기로 했다.”
가볍게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은 천마가 웃으며 검을 그었다.
장난스럽게 그은 일격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꺼낸 유예린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어 낸 순간.
콰가가가가각!!
유예린의 뒤로 잘려 나간 강이 파도가 되어 치솟았다.
무형의 참격.
그것에 담긴 이치를 깨달은 유예린은 눈을 부릅떴다.
“……은(隱)!”
“자주 쓰지는 않았으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을 상대로 몇 번 쓴 적이 있느니라.”
놀라는 유예린을 보고 허허롭게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린 천마가 아예 검을 검집에 넣는 순간.
콰가가가가가각!
다시 한번 몰아친 참격을 겨우 받아 낸 유예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쓰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 잘 보고 배워 가면 될 게다.”
이걸 보고 배우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유예린은 눈을 크게 떴지만, 천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네 검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끝내는 거로 하자꾸나. 사흘이 지나도 끝나지 않으면 너는 나와 계속 여기에서 수련할 거다.”
“예?”
“네가 약한 상태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죽으면, 천위가 무슨 상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유예린의 반문에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 천마는 어느새 다시금 쥔 검을 겨눴다.
“차라리 능력이 될 때까지 이곳에 붙잡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 * *
일행 전부를 각자의 수련장으로 몰아넣은 설천위는 느긋하게 밥을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날에서야 움직였다.
그런 설천위를 따라 나온 연화는 홀로 객잔을 지키고 있을 운주를 떠올리며 불안해했지만, 설천위를 믿고 불안감을 억눌렀다.
그런 연화의 마음을 눈치챈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우린 저기로 갈 거야.”
설천위가 가리킨 곳.
그 손가락 끝을 확인한 순간, 연화의 눈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예? 지금요? 왜요?”
다른 사람들은 다 수련하고 있지 않나?
당황한 연화가 되묻자, 설천위는 빙긋 웃었다.
“그야, 짜증 나니까?”
* * *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궁의 외문을 통과했다.
이대로 한동안 나아가면 내문에 도달할 것이고, 마중 나온 환관에게 마차의 내용물을 전달하면 끝.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마부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힐끗힐끗 주위를 살피면서도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는 애써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을 무시했다.
몇 번이고 황실을 드나들면서 큰돈을 벌었다.
당연히 위험한 일이란 걸 모르지 않았고, 자신이 옮기는 마차 안의 내용물도 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되니까.
또, 자신이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면서도 마부는 절대 마차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하지만, 조금 빠른 속도로 마차를 끌고 가던 마부는 내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작게 숨을 돌렸다.
그래도 일의 끝이 보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크르르르르.]
순간,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마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히, 히이익!”
주변 사람들이 천벌이라 소리쳤던 흑룡.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겁먹은 다른 이들과 달리, 마부는 이번에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타난 지 꼬박 하루가 됐는데 여전히 가만히 있었으니까.
심지어 일하겠다는 사람이 줄어서 의뢰인은 더 많은 돈을 불렀기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돈을 향한 욕망으로 고삐를 쥐었던 마부의 바지 사이가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왜냐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천지신명이시여! 살려, 살려 주……!”
하늘에 떠 있는 흑룡이 자신을 뚫어질 듯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저 멀리 부산스러워진 병사들의 움직임을 귀로 들으며.
“끄윽!”
숨이 끊어진 마부가 바닥을 뒹굴었다.
마부의 죽음과 함께 공포에 질려 날뛰던 말들이 도망치고, 덩그러니 남은 마차를 흑룡의 손이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멀어지는 흑룡.
순식간에 마차를 빼앗긴 병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고.
“전술의 기본이지. 보급을 끊어라.”
흑룡보다 더 위, 하늘에 앉아서 그것을 내려다보던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연화야, 그쪽으로도 간다.”
동료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적들의 숨통을 조여 놓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