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4화
573화-천벌 (3)
“상의도 없이 이런 짓을…….”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뜬금없이 세상이 흔들려 밖으로 뛰쳐나온 유예린과 일행은 하늘에 떠 있는 흑룡의 모습에 눈을 감았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설천위가 일을 벌였음을 깨달은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 정도는 쉰다더니, 이게 무슨…….”
서하영의 탄식에 피식 웃은 유예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쉬게 하고, 자기는 일할 생각이었던 것 아니겠니?”
“나가는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괘씸해요.”
우리가 할 일까지 자기가 다 하겠다는 거 아니야.
괜히 이 악물고 강해진 줄 아나.
섭섭함이 느껴지는 서하영의 대답에 유예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사흘이라고 정한 걸 보면 끝까지 혼자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구나.”
“그건 또 그러네요.”
유예린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한숨과 함께 저 멀리 있는 흑룡을 바라봤다.
“괜히 무리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말로는 철백이 괜찮을 거라고 떠들던 양반이지만,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이면서 철백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철백을 위해 이렇게 요란하게 사태를 키웠을 가능성도 있고.
“무리가 아니게 만들어야죠.”
그런 짐작이 담긴 서하영의 말에 옆에 있던 주현운이 입을 열었다.
“형님이 저렇게 행동한 것이 무리한 게 아니게 만들어야죠. 우리가.”
“그러네.”
주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가 웃으며 도를 두들겼다.
“그 방법은 각자 깨닫고 있을 테니까.”
그녀의 한마디에 일행들의 공기가 순간 굳었지만, 이내 빠르게 풀렸다.
목숨을 건 전투.
설천위가 끌어모은 재능의 총집합인 일행 중에서 전투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 인간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설천위를 두 눈으로 보고 아무런 변화도 없을 수 없었다.
존재만으로 공간을 비틀어 버리는 괴물을 지척에서 목도하고, 깨달음의 실마리 하나 얻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은 설천위의 일행 중엔 없었으니까.
각자의 깨달음.
그것을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은 사흘.
“사흘이면 충분하지.”
저 용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자신들 또한 하늘에 닿으리라.
* * *
“진짜, 지독할 정도의 괴물이네.”
황궁의 비처.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킨 언여휘는 혀를 내두르며 일어섰다.
“완전히 흡수했네. 혈주라는 괴물을. 이젠 진짜 괴물이라고 불러야겠어.”
공간을 통째로 찢어발기는 설천위의 모습을 떠올린 언여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즉에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었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다. 그렇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가볍게 물음을 던진 언여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섭섭했다.
“아우, 정말! 너까지 이럴 거니?”
앙탈이 섞인 목소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언여휘는 단숨에 손을 내질렀다.
푹!!
질척한 무언가에 손이 박히는 순간, 그대로 밀어 넣는다.
쿵! 쿵!
심장이 뛰는 박동을 느끼며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던 언여휘는 더욱더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너도 독하구나.”
가슴에 박힌 말뚝을 통해 언여휘의 손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음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던 철백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정면을 바라보던 철백의 시선이 내려와 자신의 가슴께에서 팔을 뻗고 있는 언여휘를 응시했다.
일말의 두려움도, 고통도, 망설임도 없는 눈동자.
사로잡혀 있는 이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눈동자로 언여휘를 내려다보며, 철백은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다.”
덤덤하게.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 철백은 그대로 다시 시선을 올렸다.
그런 철백의 반응에 언여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여태까진 시간 낭비만 했을 뿐이니까.
철백의 몸에 어떻게든 축생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말뚝을 박아 넣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순간부터 철백은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고, 말뚝이 그 이상 박히는 일도 없었다.
강철이 부러지지 않는다는 건 우민들의 착각일 뿐이거늘.
눈앞에 있는 인간은 정말로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강철처럼 절대로 꺾이지 않는 육체와 정신으로.
“……재미없어.”
그런 철백의 반응에 결국 포기한 쪽은 언여휘였다.
“그냥 죽일래.”
이용할 수 없다면 죽인다.
철백의 목이라도 들고 가면 설천위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언여휘가 살기를 일으킨 순간.
“무리다.”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철백이 다시 언여휘를 내려다봤다.
“시간 낭비가 이어지겠군.”
저 멀리, 강렬하게 느껴지는 흑룡의 기척을 느끼며 철백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그리 급하게 움직일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흔들리지 않는 정신과 별개로, 약간이나마 있었던 조급함을 털어 낸 철백은 여유를 가지고 준비했다.
친구와 마주하는 그때를 위해서.
* * *
“장난 아니네요…….”
수도의 이면에 있던 공간을 통째로 부숴 버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존재들까지 모조리 섬멸해 버린 설천위의 능력에 연화는 놀라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건 진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패융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기세를 가라앉히는 설천위를 바라보던 연화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괜히 이해하려고 힘 빼지 말자.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연화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가볍게 손을 털어 낸 설천위는 발 앞에 발판을 만들어 냈다.
“내려가자.”
“네?”
지금 이 상태로 내려가겠다고?
“얘는요?”
“놔둘 거야. 사흘 동안 쭉.”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얼마나 긴지 모를 패융의 몸이 하늘에 이리저리 굽이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대로 수도 위를 뒹굴면 수도가 초토화되기까지 한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덩치를 사흘이나 허공에 띄워 놓겠다고?
연화의 눈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발에 발판을 만들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면 이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더 약삭빠른 녀석일세.”
이면 세계를 만들었던 악귀가 마지막에 탈출한 것을 떠올린 설천위는 턱을 쓸었다.
“조금 신경 써야 할 수도 있겠는데.”
* * *
[끄으으윽! 괴물 놈!]
황궁의 지하 감옥.
붕괴의 순간, 어떻게든 자신을 이동시킨 우공은 질척하고 퀴퀴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엄살이 심하군. 고작해야 다리를 잃었을 뿐 아닌가.]
[닥쳐! 그냥 잘린 게 아니라 그 괴물한테 잡아먹힌 거라고!!]
겨우 피해 낸 피의 송곳.
탈출의 순간, 다리를 꿰뚫렸지만 그때는 걱정하지 않았다.
우공도 결국 악귀였으니까.
다리가 잘린 것 정도야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가 그냥 잘린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단순 절단이 아니라, 그 부위의 혼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마치 거대한 범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그저 형체가 잘린 것을 넘어서서 혼이 아예 뜯겨 나간 이런 부상은 최악의 경우,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설령 회복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러기에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고.
휑하니 비어 버린 다리를 긴 천으로 묶어 가린 우공은 천천히 몸을 허공에 띄웠다.
[상황은?]
[개판을 쳐 놨지.]
우공의 물음에 감옥의 창문을 가리킨 온우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괴물을 상대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고.]
온우가 가리킨 창문 너머에 보이는, 하늘을 가득 메운 흑룡의 모습에 우공은 질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괴물 놈…….]
공포로 인해 떨려 오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킨 우공은 천천히 움직였다.
가볍게 철창을 지나 밖으로 나간 우공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에 있지?]
온우는 분명 철백이란 자를 잡아 온 공이 있지 않나?
포상을 받으면 받았지,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텐데?
[싫단다.]
[또 부질없는 반항을 했나 보군.]
온우의 대답에 바로 상황을 이해한 우공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그리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무능한 황제 아닌가? 그 무능함에 네 목이 날아가 이런 꼴이 됐는데, 왜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거냐?]
[무능? 무능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우공의 말에 자조적으로 웃은 온우는 축축한 감옥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웃었다.
[그럼에도 그분보다 더 무능했던 것은 나이니,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을 뿐이다.]
[쯧,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죽은 네놈을 살린 건 그분들이고, 그분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대체 무슨 죄가 된다는 거냐? 따르면 평온한 안식이 따라올 터인데.]
충심이라는 것과는 전혀 연이 없는 우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온우는 쓰게 웃었다.
[뭐,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라서.]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온우의 대답에 탄식하며 고개를 저은 우공은 이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우공.]
[뭐냐?]
[정 대장군님은 어디 가셨지?]
덤덤한 물음에 감옥을 나서려던 우공이 멈춰 섰다.
잠시 멈춰서 정벽이 적의 힘에 집어삼켜지던 광경을 떠올린 우공은 피어오르는 공포를 억누른 채 대답했다.
[죽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다는 듯 그대로 감옥을 나가 버리는 우공.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온우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일 처리를 똑바로 하지 못하는 거냐!”
황제의 집무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고성에 집무실의 분위기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황제의 집무실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목소리와 적나라한 욕설이 난무했다.
그런 다툼의 한가운데.
상석에 앉아 있는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주위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사방에서 고성을 지르는 노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덜덜 떠는 아이였지만, 이 자리에서 떠들고 있는 그 누구도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흉물스러운 것을 당장 치워야 하지 않겠소!”
“어허!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거늘 어찌 일을 그리 어렵게 하자는 말이오!”
“그러니까! 저것부터!”
지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악에 받친 소리만 울려 퍼지는 그곳에서 벌벌 떨던 아이는 결국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내의 소매를 붙잡았다.
“숙부님…….”
울먹이는 목소리.
그에 반응한 사내는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봤다.
차가운 그 시선에 아이가 움찔 놀랐지만, 숙부라 불린 사내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퍼걱!
고성을 지르던 빼빼 마른 노인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그 피와 뇌수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사방에 떨어진 살점이 얼굴에 붙은 자들도 있었으나, 그들 누구도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소리를 치거나 자리를 박차는 등 소란을 떨진 않았다.
“조용히들 하시오. 폐하께서 불편해하고 계시니.”
사내의 한마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폐하라고 불린 아이가 불편해하고 있다고 해서 아이의 눈치를 보는 이는 없었다.
하나같이 사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땅에 처박을 뿐.
순식간에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여전히 벌벌 떨고 있던 아이가 숙부라 불린 사내를 끌어당겨 속삭였다.
조용히 아이의 말을 듣던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허리를 펴고 소리쳤다.
“폐하께서 대업을 서두르길 바라고 계시니, 전원 제물의 양을 늘리시오.”
제물의 양을 늘리라는 말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사내도 신하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황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만 있었을 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아이와 사내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에서.
한층 편해진 아이는 당과를 꺼내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