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3화
572화-천벌 (2)
연화를 훈련시키며, 적이 만든 공간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설천위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에 철백은 없네.”
“괜찮다더니…….”
“괜찮긴 할 텐데. 그래도 찾긴 해야지.”
장난스럽게 웃는 연화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려 준 설천위는 영력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없는 건 확인했으니 나가자. 네 괴연천식도 그 정도 채웠으면 충분하겠지.”
“네? 하지만 아직…….”
꽤 여유가 남았는데요?
그런 연화의 의문에 설천위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따로 채울 게 있으니까 남겨 놓자고.”
웃으면서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은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가자.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으니.”
“적들은 정리 안 하나요?”
이대로 두면 계속해서 민간인들의 피해가 발생할 텐데…….
심지어 적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테니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민간인들을 더 적극적으로 건드릴 확률이 높았다.
여유가 있다면 정리하는 게…….
“괜찮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연화의 걱정에 웃으며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온 설천위는 공간이 닫힌 걸 확인하곤 주위를 둘러봤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이 보인다.
“아까 했던 말 기억하나?”
“어떤 거요?”
축생의 유정을 처리할 땐 확실하게 혼을 파괴해야 한다는 거?
상대가 너무 강하면 차라리 육체를 제압하고 제대로 된 술법을 펼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거?
괴연천식을 이용한 힘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기초 술법도 갈고닦으라는 거?
고작 두 시진(약 4시간) 정도만 돌아다녔을 뿐이지만, 안에서 일어났던 전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연히 설천위의 평가도 많았고 그만큼 조언도 많이 해 줬으니, 저리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설천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던 연화는 웃으며 걸어가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별건 아니고, 적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
“으음……. 아, 이러는 게 좋다는 거요? 이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살아가는 게 더 좋다고 했던 말이요?”
“그래, 그거.”
연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대로에 서서 그녀를 돌아봤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철회다.”
“네?”
“상황이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은 것 같거든.”
철백이라면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그렇다고 철백이 힘들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하영에겐 괜찮다고 했으면서도 연화를 데리고 적의 영역에 다시 들어갔던 이유이기도 하고.
다만,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철백이 적의 술수에 넘어가 적이 되거나 죽을 걱정은 없다는 소리이기에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언여휘, 그 잡것이 있는 것 같거든.”
걔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철백이 버티기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포기해야 할 것이 생겼다.
“은밀하게 가다간 철백이 숨넘어가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지.”
이건 경고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섣불리 움직일 생각 따윈 하지 말라는 경고.
나는, 너희가 알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경고.
설천위의 등에서부터 검은 일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힘이 너무나도 불길해서 지켜보던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가가선 안 된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저 바라보는 것 자체가 힘겨운, 그런 불길함.
공포.
그것에서 느낀 감정이 공포임을 확신한 연화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까득!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물러나지 않는다.
나를 해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사람이 뿜어내는 기세조차 버티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겨 내겠는가.
연화가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더하며 악으로 버티는 사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설천위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놀라서 정지해 버린 사람들.
그들의 사고가 상황을 따라잡기도 전에 설천위라는 ‘상황’이 변화했다.
[크르르르르르르.]
검은 일렁임은 형체를 이루고, 그 형체는 이윽고 용이 되니.
설천위에게서 흘러나온 용은 칠흑의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한 줌만 한 연기에서 성인 남성 셋이 팔을 벌려도 다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의 두께를 가진 용이 되어 하늘을 뒤덮는다.
세상에 내려앉는 것은 절대적인 위압.
짓누르고, 또 짓누르는 것.
[크롸라라라라라라!!]
흑룡의 포효와 함께 황궁을 품은 수도가 크게 뒤흔들린다.
뒷짐을 쥔 채 패융의 꼬리에 올라선 설천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오는 연화를 발견하곤 미소 지었다.
“훌륭해.”
“흥, 이 정도는 얼마든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당차게 대답하는 연화를 패융의 꼬리에 태운 설천위는 그대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희의 계획대로 황궁으로 잠입할 생각이었어. 황보중, 그 양반이 이끄는 병력이 황실의 병력을 줄여 준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니까.”
“……그렇죠.”
가슴속에 떠오른 의문을 삼킨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연화의 조금 늦은 대답에도 설천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점에 올랐다.
패융의 머리 위에 올라선 설천위는 저 멀리 보이는 황궁을 바라봤다.
워낙 높게 지반을 쌓아 올려서 조금 고개를 내리는 것만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황궁.
그 가장 높은 건물에 있을 누군가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생각이 바뀐 포인트는 두 가지.”
“포인트요?”
“지점이라고 생각해.”
“단주님은 가끔 이상한 말을 써요.”
이해하기 어렵게.
툴툴대는 연화를 무시한 채 설천위는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철백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언여휘가 이곳에 있다.”
“으음, 철 대협도 버티기 힘들 거라는 뜻인가요?”
“아니, 버틸 거야. 단, 시간을 너무 끌면 그 녀석이 너무 힘들어질 거라는 소리지.”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녀석에게는 꽤 중요한 요소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화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넘긴 설천위는 발아래 보이는 거리를 내려다봤다.
“아무튼 두 번째, 내가 계획을 수정할 생각을 하게 된 건 이 영역과 적들의 상태 때문이야.”
덤덤하게 발아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설천위는 말을 이었다.
“하는 짓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설천위가 뻗은 손과 똑같은 거대한 손이 허공에 나타났다.
새빨간 손톱을 가진, 그것은 마치 악귀의 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흉악스러웠다.
그 손으로.
“전부 짓밟고 움직인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내가 가는 길이 그쪽이었거든.”
공간을 움켜쥐었다.
설천위가 주먹을 쥐는 것과 함께 허공을 움켜쥔 거대한 손이 손목을 비틀었다.
유리를 강제로 비틀어 내는 것 같은 귀에 거슬리는 굉음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꺄아아아아아!”
“천벌! 천벌이야!”
세상천지를 가득 채우는 굉음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뒤섞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누가 악역이고 누가 선역인지 모를 광경이 펼쳐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뜬 바로 그때.
[무식하기는.]
웃음이 섞인 언여휘의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정지했다.
설천위의 힘에 의해 강제로 짓밟히던 이면 세계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다.
아예 공간을 통째로 부수려던 설천위의 시도에도 놀랐지만, 단숨에 그걸 저지한 상대의 실력에도 놀란 연화는 눈을 더욱 크게 부릅떴다.
이게 진정 술법이라는 영역으로 불러도 되는 일인가.
그냥 자연현상, 아니 기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수준 아닌가?
경악한 연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랑곳하지도 않고, 자신의 술법을 저지한 언여휘의 힘을 가늠하던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도망칠 생각이 없나 보네?”
[설마 그렇겠니?]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에 피식 웃으면서 설천위는 주먹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런 설천위의 행동에 맞춰 공간을 짓밟고 억누르던 압력이 단숨에 해제됐다.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분투하던 우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 순간.
“어차피 도망치게 둘 생각 없으니까 상관없어.”
양팔을 벌린 설천위가 그대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포가 흩날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움켜쥔 설천위가 그대로 공간을 잡아당겼다.
쩌저저적!
공간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두 손이 공간을 으스러트린다.
[정말 부술 거야?]
살짝 당황한 언여휘의 물음이 들려왔지만, 설천위는 무시했다.
더욱 힘을 더해 공간을 비틀었다.
[이 공간을 무너트리면 희생이 장난 아닐 텐데?]
황도의 이면에 자리한 공간을 무너트린다는 건 우공의 영역을 붕괴시킨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 안에 갇혀 있는 실체를 가진 축생의 유정들이 현실로 나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대로 공간을 무너트리면 우공은 큰 타격을 입고 무력화될 것이고, 이면 세계에서 빠져나온 존재들에 의해 민간인들이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될 거다.
그것을 알기에 처음 공간을 짓밟는 힘이 약한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언여휘도 가볍게 응수해 막았다.
설천위가 이쪽의 수중에 있는 철백을 걱정해 위협하고 있는 거라고 여기며.
그런 귀여운 발악에 미소 지으며 대응했는데…….
[진짜로 부순다고?]
이건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우공이 축생의 능력으로 쌓은 힘마저 고갈시키며 힘겹게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언여휘가 그것을 직감한 순간.
쩡!!
여태까지와는 격이 다른, 그야말로 영혼을 강타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쪼개진 듯한 굉음과 함께 하늘이 뒤집혔다.
무너진 공간, 수도의 하늘에 떠 있던 또 다른 수도가 무너지며 파편이 되어 떨어진다.
동시에 그 사이로 떨어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연화와 설천위의 사냥에서 살아남은 축생의 유정들이 어떻게든 균형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땅에 도달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구 날뛰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나오리라.
그것을 직감한 연화가 조금이라도 처리하고자 움직이려는 순간.
[지켜보거라.]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천마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렸다.
[너희는 아직도 이 녀석을 상식의 범주에 두고 있는 것 같다만…….]
당황하는 연화를 보며 천마는 허허롭게 웃었다.
[이놈은 이미 저들의 영역에 도달했느니라.]
천마의 웃음과 함께 세상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쏟아지던 공간의 파편들이 일렁이며 붉은색의 무언가로 변했다.
피.
우공이 공간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제물 속에 담겨 있던 피를 일깨운 설천위가 그것들을 조종했다.
혈주(血主).
피의 주인이자, 생물의 생과 사를 가르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던 존재를 완전히 흡수한 순간부터.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새끼들아.”
설천위는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
파편 속에서 흘러나온 피가 송곳이 되어 쏟아지던 적들을 꿰뚫었다.
물리적 충격에 큰 면역을 가진 육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피의 송곳은 생명이며 곧 죽음이니.
그 안에 담긴 힘은 축생의 파편에서 흘러나온 힘을 받아 겨우 몸을 불렸던 잡것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모든 적들을 처리한 설천위는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로 패 까고, 제대로 붙어 보자고.”
황궁.
그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을 흘린 설천위는 사방에 흐르는 피의 힘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솔직히 말해서 확실하게 느껴지거든.”
흑암지규군을 흡수한 뒤에는 대지에 흐르는 용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지만, 너무 깊숙이 있어서 관심을 껐었다.
하지만, 혈주의 힘을 흡수한 뒤에 힘을 풀어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방에 흐르는 피의 흔적.
끝도 없이 펼쳐진 죽음과 절망의 흐름.
그것들을 온전히 눈으로 확인한 설천위는 은밀하게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며칠 뒤에 갈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그래서 설천위는 대놓고 협박하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