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9화
568화-축생의 유정 (8)
“후우.”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는 문 앞에 선 설천위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훤히 드러난 상체 근육이 꿈틀거린다.
붉은 피가 묻은 육체는 곳곳이 갈라져 그 피가 오롯이 적의 것만은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상처의 고통에 얼굴을 찡그려야 할 설천위는 정작 멀쩡한 표정이었지만.
[걷을 것인가.]
[수라의 길을.]
“그거 아까도 물어봤잖아.”
문의 양옆에 선 인왕들의 물음에 대충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쿵!
묵직하게 걸리는 문의 감촉과 함께 설천위는 천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쉽사리 열릴 생각이 없다는 듯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열리는 문.
묵직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기어코 완전히 열렸을 때.
“수라라…….”
문 너머의 광경을 목도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짜, 상상력이 빈곤하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새하얀 순백의 공간으로 발을 내디딘다.
찰박.
하얀색의 공간에 설천위의 발이 닿는 순간,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그 발걸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백의 세상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는 파문.
피로 만들어진 그 파문은 설천위가 걸어갈 때마다 끝도 없이 번져 나갔다.
고작 몇 걸음 만에 주위는 붉게 물들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시야엔 온통 붉은색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골적인 경고.
그 경고에도 설천위는 계속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닥에서 손이 올라왔다.
문에 도달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베고 짓밟았던 살업의 흔적들.
그것들이 재차 나타나 자신의 발목에 달라붙는 것을 억지로 뿌리치며, 설천위는 나아갔다.
군말 없이.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라의 길에서.
싸우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흐음.”
처음으로 걸음을 멈춘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단숨에 허리를 굽힌 설천위의 손이 대지를 꿰뚫는다.
붉은 피로 만들어진 바닥을 꿰뚫고, 그 아래에 있던 존재를 움켜쥔 설천위는 단숨에 상대를 쑥 뽑아냈다.
[어떻게?]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와 마주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리 수라의 길이라도 이렇게까지 붉기만 한 길은 너무 촌스럽잖냐? 그러니 모를 수가 있나. 무엇보다.”
장난스러운 설천위의 목소리에 여태껏 도망 다니며 설천위를 괴롭혔던 혈주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진짜 수라의 길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회색이야.”
* * *
허공에 떠 있는 장수의 지휘 아래 벌어지는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청랑이 합세했어도 유예린은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고, 문율은 둘을 상대로 힘겹게 버티고 있었으며, 연화와 설란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허공에 떠 있는 장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 빈말로도 상황이 유리하다고 할 순 없었다.
위에 떠 있는 존재가 직접 움직이는 순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이 균형은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버릴 테니까.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렇기에 청랑과 함께 부하 장수를 상대하면서도 유예린은 주위를 향한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
맨 처음 이쪽을 포위했던 병사들은 포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그 포위 밖에서 싸우고 있는 서하영도 썩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반대로 말하면, 저쪽에서 조금만 힘을 더하면 그대로 이쪽이 밀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상대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표정이…….’
마치 이 전투를 지고 싶다는 듯, 큰 절망과 그 아래 숨긴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 찬 눈빛은 상대가 원해서 이 전장에 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장수 출신의 사자(死者)를 술법으로 억지로 일으켜 부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눈앞의 장수는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부하 장수는 살기등등하게 이쪽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딱히 이 전투가 싫은 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위에 떠 있는 적만 다르다는 건가?
무엇이?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추측하던 유예린은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에 귀를 쫑긋했다.
[정벽! 뭐 하는 거냐! 빨리 끝내!]
짜증이 담긴 목소리.
허공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짜증만이 아니었다.
공포.
미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에 담긴 건 명백하게 공포였다.
그리고 지금 하늘에 떠 있는 장수를 재촉할 만한 존재가 공포를 느낄 원인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명상에 잠겨 있는 설천위를 바라본 유예린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적들이 경계하는 건 설천위다.
그런데 지금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장수는 이 전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전투에서 실패하기 위해서 상대가 취할 전략은 무엇일까?
간단했다.
‘천위를 기다리는 건가?’
설천위가 눈을 뜨길 기다린다.
정벽이라 불린 장수의 노림수를 읽어 낸 유예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노림수를 읽어 냈다고 해도 되는 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가정이고, 이쪽의 희망이 섞인 억측이다.
지금 이 순간, 상대가 억지로 시간을 끌면서까지 설천위를 기다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천위가 깨어나면 자신만 위험해질…….
‘설마?’
노리는 것이 자신의 소멸이라면?
절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상대와 눈을 마주친 유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또 헛소리! 빨리 처리하기나 하라고! 지금밖에 없으니까!]
다급하게 정벽을 재촉하는 목소리와 함께 기어코 정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쥔 큼지막한 언월도를 치켜든다.
그대로 내려찍을 기세로 천천히 힘을 모으는 정벽.
“전원……!”
그 낌새를 눈치챈 유예린이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정벽의 힘이 공간을 일렁였다.
공간째로 비틀리는 힘의 응집.
그것은 생전에 그가 아득한 영역에 도달했던 강자임을 여실히 증명해 줬다.
초인 중의 초인.
현경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의 일격이 준비되는 것을 확인한 유예린은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청랑이 장수를 막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저 일격을 막아 내기 위해서 땅을 박찼다.
정벽의 언월도가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그 언월도의 힘이 완벽에 이르러 대지를 향해 쏟아지려는 그 순간.
‘……웃어?’
정벽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목도한 유예린은 이를 악물고 검을 움직였고.
“그만! 그거 하면 다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감쌌다.
자연스럽게 닿은 손이 그녀의 팔을 감싸고, 단단한 가슴이 그녀의 등을 지탱했다.
고작 한 번의 손짓.
그 한 번의 손짓으로 떨어지던 정벽의 일격을 완벽하게 지워 버린 설천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랜만……인가?”
난 별로 오래 지난 것 같진 않은데.
* * *
순간, 전장의 공기가 일변했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의 등장에 의한 것임을 알아챈 이들 사이에서 반응은 둘로 갈렸다.
적은 당황을.
아군은 안도를.
[흡!]
당황한 장수들이 빠른 마무리를 위해 다급히 무기를 휘둘렀다.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유예린 일행에겐 상당히 위협적인 일격.
하지만.
[으윽?!]
허공에 나타난 검은 관에 그대로 손발이 묶여 버린 장수들이 땅을 뒹굴었다.
“……하하.”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헛웃음을 흘린 문율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규격 외라서 엄두도 안 나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입꼬리를 비튼 문율은 말과는 달리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인다.’
두 장수를 상대로 한 전투.
치열했지만, 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저쪽이 맞는 길 같아.”
허공에 고고하게 떠 있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문율의 눈동자 속에서 바다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문율이 새로운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는 사이, 설천위 덕에 전투가 끝난 설란과 연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문율과 달리, 억지로 다리에 힘을 줘 버티고 있던 두 사람은 허공에 떠 있는 설천위를 확인한 뒤에야 미소를 지었다.
“더럽게 오래 걸렸네요, 단주님.”
잠깐 다녀온다더니, 몇 달이 걸린 거야?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결국 땅에 주저앉은 연화는 자신의 옆에 앉은 설란을 보며 웃었다.
“그래도 끝났네요!”
진짜 피똥 쌀 것처럼 고생했으니까 한동안은 설천위에게 맡기고 쉬어야겠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고생 많이 했으니 봐줄게.”
기지개까지 켜는 연화의 뒤로 다가간 서하영은 연화의 머리를 토닥이며 웃었다.
“저 양반이 왔으니, 조금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그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안겨 주는 존재감.
외부 임무로 처음 만나, 산적을 상대하며 죽어라 발버둥 치던 옛 모습을 떠올린 서하영은 피식 웃었다.
“참 많이 컸…….”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산적들을 상대로 발버둥 치던 셋 중 하나.
“이 양반은 진짜 어디로 가서 안 돌아오는 거야?”
감감무소식인 철백을 떠올린 서하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 * *
“참 화려하게 일을 벌여 주고 있었네.”
유예린을 품에 안은 채 허공으로 떠오른 설천위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영역(靈域).
그것이 공간을 다루는 존재가 만들어 낸 영역임을 읽어 낸 설천위는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귀찮은 녀석이 하나 있네.”
공간을 다루는 악귀는 실질적인 무력은 귀(鬼)에 머물러도 그 위험도는 최소 재(災) 이상이다.
사용법에 따라, 도시 하나둘 정도는 쉽게 지워 버릴 수 있는 힘이니 당연했다.
“황도(皇都)에서 이 정도로 개판인 상황이라…….”
생각보다 더 안 좋은데?
주위를 둘러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벽을 쳐다봤다.
“그래서, 아저씨는 뭘 원하는데요?”
[부질없음이다.]
“흐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정벽과 눈을 마주친 설천위는 이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새끼들,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었네?”
역시 최종장은 황궁인 건가.
정벽의 상태를 간파한 설천위는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일단, 보는 눈부터 없애 볼까?”
딱!
가볍게 손을 튕긴 순간, 설천위를 중심으로 칠흑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일행과 정벽, 그 부하들까지 가둔 설천위는 허공에 만들어 낸 의자에 유예린을 앉힌 뒤, 조심스럽게 그녀를 밑으로 내려보냈다.
유예린이 안전하게 땅으로 착지한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털고 몸을 돌렸다.
“그래서, 조종당하고 있는 아저씨는 뭘 원하시길래 그러고 있는 걸까?”
[……부질없음이라.]
“과연, 말하는 것도 제약을 받고 있나.”
정벽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가볍게 허공을 박찼다.
그리고.
콰득!
단숨에 정벽의 가슴을 꿰뚫은 설천위는 튀어나온 손을 뽑았다.
강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터트리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럼 죽어야지.”
* * *
쿵! 쿵!
“후우우우.”
자신의 몸을 두들기는 충격을 받아 내며, 철백은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건물의 잔해밖에 남지 않은 공간에서 철백은 팔을 비틀었다.
[무리야.]
그런 철백의 움직임에 바닥에 누워 피를 토하던 온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꺾이지 않는다면 방향을 돌리면 되는 일이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서서히 재생시키며, 온우는 씁쓸함을 담아 웃었다.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신념과 충의를 가지고 생을 마감한 장수들을 역도들이 부릴 수 있는 방법에 무엇이 있겠는가.
세뇌?
지성을 마비시키면 강함은 쇠퇴한다.
그렇기에 황궁의 역도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축생(畜生)의 유정(有情).
육체를 만드는 것으로, 그 안에 담긴 본성을 제약하는 것.
자신들의 말만을 듣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 결과, 기이하게도 강한 충의와 신념을 지녔던 자일수록 육체는 굳건하고 강했으나 역도들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역도에게 동조하며 새로운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육체가 허술해 나약해졌다.
물론, 역도의 무리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정신이 이쪽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육체는 자신들의 명령을 들었으니까.
반항적인 강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철백의 가슴팍.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말뚝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