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67화 (567/624)

제567화

566화-축생의 유정 (6)

[이놈 하나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구나.]

“아뇨. 저희가 부족한 탓이죠.”

설천위를 보며 쯧쯧 혀를 차는 천마의 모습에 유예린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일을 키워 놓고 휑하니 사라졌던 놈의 잘못이지. 옹호해 줄 거 없다.]

설천위를 탓하며 혀를 차는 천마였지만, 유예린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단주님의 상태가 왜 이래요?”

[영약을 먹고 명상에 들더니, 몇 주째 이 모양이다.]

설천위의 옆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화의 물음에 천마가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몇 주째요?”

몇 주째 이런 상태라는 말에 유예린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리 무인이 깨달음을 얻으면 며칠씩 몰아의 경지에 빠진다고 해도 주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무인도 결국 사람이기에 장시간에 걸친 몰아의 경지는 몸을 축내기 마련이다.

식음을 전폐한 채 명상에만 빠져들었으니, 몸이 정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몸 상태를 걱정하는 거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게다. 이렇게 되기 전에 입에 넣은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천마의 대답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유예린의 눈동자에 깃든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제가 불렀을 땐 아예 반응이 없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화의 물음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 이 아이가 불러서 그런 걸까?”

[왕!]

연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자신의 가슴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청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설 공자를 부른 건 이 아이였으니까.”

[아, 그거라면 별거 아니니라.]

“예?”

[청랑에게는 천위를 강제로 소환할 수 있는 술식이 새겨져 있느니라.]

“강제로요?”

[그래, 꽤나 오랜 시간 준비해서 네게 청랑을 넘겨줄 때쯤에 겨우 완성했었지.]

“그게 무슨…….”

천마의 말에 당황한 유예린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청랑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유예린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랑을 안아 들었다.

“과연, 유 언니는 자기가 죽어도 설 공자를 부를 사람이 아니니, 위험한 순간에 이 아이가 판단해서 부를 수 있게 준비해 뒀군요?”

[그래. 예린이, 너는 자신에게 과할 정도로 가혹하니 말이다. 설령 끝내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망설이다가 때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게지.]

거기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것까지 대비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이문을 여는 방식으로 술식을 짜 놓기까지 했으니.

설천위도 어지간한 사랑꾼이었다.

“흐응?”

설천위가 뜬금없이 불려 온 진상을 알게 된 서하영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유예린에게 다가갔다.

“누군 좋겠어요? 사랑하는 낭군님의 배려가 너무 절절해서?”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둬. 철 소협도 크게 다르지 않잖니?”

“그 곰탱이는 뭔가 분위기가 부족해요. 정성? 아니, 뭐랄까 감동? 아무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서 설레게 만드는 재주는 영…….”

철백의 이야기를 하던 서하영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없네?”

적의 영역에 들어온 이들 중 대부분이 모인 지금.

“이 양반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철백만 이곳에 없었다.

* * *

[기아아아아아아!!]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는 존재를 양손으로 찢어발긴 철백은 몸에 튀는 피를 은빛의 기류로 흩어 버리고 또다시 전진했다.

불굴의 육체.

불굴의 정신.

이 두 가지로 무장한 철백은 그야말로 꺾이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강철처럼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덤벼드는 적이 있다면 부수고.

도망치는 적이 있다면 찢는다.

부수고, 찢는 아주 간단한 행동만으로 피의 길을 만들어 낸 철백은 공포를 모르던 적들에게조차 진정한 공포를 아로새겨 주었다.

거기다.

[히아아아가가각!]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겁먹은 존재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진다.

존재 자체를 짓누르는,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눈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압도적인 기세에 철백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왔구나.’

너무나도 익숙한, 친구의 등장을 알리는 그 기세에 흥분하면서도 철백의 머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자신은 적의 힘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

상황이 어떻든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고, 실제로 적들의 수준을 보면 자신의 실력으로 충분히 제 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적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설천위.

이렇게 공간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기세를 뿜어내면서도 정작 설천위 본인은 이곳으로 오지 않고 있었다.

이건 꽤나 중대한 문제였다.

설천위의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로 뒤로 물러나서 구경하는 걸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즉, 이곳으로 즉시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일 수도 있고, 이곳 말고 다른 곳에 더 강한 적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철백은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설천위가 이곳에 없는 것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설천위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

‘최대한 적의 전력을 깎는다. 그것도 힘들어지는 때가 오면 정보만이라도 최대한 가지고 돌아간다.’

지금 당장 후퇴해 설천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만, 안타깝게도 철백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꺾이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육체와 정신은 고작 이 정도의 위험에 내뺄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게 만들었으므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굳게 믿는 철백은 그야말로 태산처럼 모든 것을 짓밟고 나아갔다.

달려드는 악귀들은 물론, 반쪽짜리 축생의 유생들조차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트리며 전진했다.

그렇게 적들을 찾고, 박살 내고, 찾고, 박살 내고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철백은 처음으로 적을 찾은 순간 망설였다.

직감.

이 순간,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직감이 철백의 발을 붙들었다.

그리고.

“흡!”

단숨에 전신의 근육을 조이고, 양팔로 몸통을 가리는 순간.

쩡!!

마치 온 세상이 깨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철백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열 채의 집을 부수고 밀려난 철백의 두 발이 만들어 낸 긴 고랑 끝.

[이걸 견뎌?]

놀란 표정의 장수가 철백을 보며 창을 어깨에 걸쳤다.

[환관 놈들이 징징거려서 왔더니만……. 상황이 말이 아니군.]

절그럭거리는 갑주를 몸에 걸친 장수의 덩치는 철백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했다.

다만, 머리가 몸에 비해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미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형을 지녔다는 것이 철백과의 차이점이었다.

[뭐, 좋아. 즐길 순 있는 녀석인 것 같으니, 나쁘지 않군.]

“후우.”

건물의 잔해에서 빠져나온 철백은 무너진 집들 너머에서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장수를 보며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뼈와 근육이 부딪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웬만한 성인 허리보다 두꺼운 철백의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철백이다.”

[온우.]

“거짓된 황제를 따르는 장수여.”

무너진 집들을 밟으며 전진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를 좁혀, 어느새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둔 채 멈춰 섰다.

“후회는 없나?”

[흐하하하하! 꽤나 특이한 녀석이네. 후회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고, 하물며 죽어서 이승을 떠도는 망자들 중 후회 없는 존재가 어디에 있겠나?]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온우는 어깨에 걸쳤던 창을 휘둘러 그 창끝을 바닥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단지, 그 후회조차 잊기 위해 발버둥을 칠 뿐이지.]

단숨에 땅을 박차는 온우의 돌진에 맞서 철백이 주먹을 내뻗었다.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창끝에 철백의 주먹이 적중한다.

쩡!!

[흐하하하! 괴물이구나!]

창끝과 주먹이 부딪쳤는데, 그것이 백중세를 이루는 것을 목도한 온우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창을 앞으로 당겼다.

순식간에 창을 내지를 수 있는 준비 자세로 돌아간 온우가 다시 창을 휘둘렀다.

보통의 창보다는 날이 긴 창은 언월도라고 부르기에는 날이 짧고 폭도 얇았지만, 무언가를 베는 일을 수행하기엔 충분한 날을 지니고 있었다.

목과 허리, 팔을 동시에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허초와 실초가 훌륭하게 뒤섞인, 그야말로 막아 내는 그 순간까지 무엇이 허초이고 실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성된 일격이었다.

기초에 기초를 더해, 응용을 만들어 낸 훌륭하기 그지없는 일격을.

“흡!!”

철백은 온몸으로 받아 냈다.

목과 허리를 꿰뚫은 창이 만들어 낸 충격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비틀어 그 충격을 전부 받아 낸 철백은 우직하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창이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따라가듯 철백의 몸이 온우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무식하네!]

아무리 철백이라고 해도 온우의 손보다 빠를 순 없었다.

결국, 창을 당겼다 내지르는 온우의 공격이 재차 철백을 덮쳤다.

동시에 가벼운 발놀림으로 다시금 거리를 벌리는 온우.

이대로 가면 무한히 공격에 당하기만 하다가 끝날 구도였다.

외공만을 익힌 무인과 내외공을 모두 훌륭하게 익힌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흔히 나타나는 구도.

외공만을 익히는 것은 약하다는 인식을 세상에 심어 준 훌륭한 예시였다.

내공을 익혔다는 것은 반응 속도와 동체 시력 등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속도전을 펼치면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사는 시간대가 다른 것처럼,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 그림이 나온다.

그러나.

콰득!!

철백이 익힌 것은 조잡한 외공 따위가 아니었다.

내공의 벽을 뛰어넘은 무공.

세간의 인식조차 뒤틀어 버릴 정도로 일정 영역을 넘어선 힘.

그것이 철백이 익힌 힘이고.

[괴물 놈……!]

그 힘은 괴물에게조차 통했다.

온우의 창끝을 붙잡은 철백은 쇠를 우그러뜨리면서 그대로 창을 잡아당겼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력이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즉시 창을 손에서 놓아 버린 온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방금, 분명하게 읽었다.’

휘두르는 창끝을 잡는 건 그저 눈이 좋아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완벽하게 창의 궤도를 읽어 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철백이 창의 달인과 함께 수련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저지른 실수였으나, 온우는 뒤늦게라도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구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든 온우는 대검에 가까울 정도로 크고 두꺼운 검신을 지닌 검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살짝 허리를 숙인 채 검을 어깨 뒤로 넘긴다.

그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즉시 깨달은 철백은 곧바로 근육을 부풀렸다.

정확히 말하면, 근육에 힘을 더했다.

힘을 주는 것만으로 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철백이 양손을 앞으로 휘두른 순간.

쩡!!

온우가 휘두른 검은 철백이 마주친 손바닥 사이에 정확히 붙들렸다.

[훌륭하다!]

체중을 실어 적을 단숨에 베어 버리는 형태의 참격.

노리는 것을 단숨에 갈라 버리는 참격이었으나, 소윤혜의 것처럼 목을 베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통째로 베어 내는 것.

사람만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말까지.

전장에서 낙마한 장수가 혼란스런 전투에서 말에 올라탄 적을 베기 위해 만들어 낸 일격이다.

그것을 칼날 잡기라는 형태로 잡아낸 철백에게 크게 감탄하면서도 온우는 즉시 움직였다.

들어 올린 그의 발이 철백의 복부를 가격한다.

난전.

낙마했고, 창조차 없다면 이제 남은 건 근접전밖에 없지 않은가?

하던 대로 근접전을 시도한 그 순간.

발끝이 부러진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온우는 깨달았다.

“크아아아아아압!!”

자신이 잘못 선택했음을.

눈앞에 있는 인간은, 아니 존재는 사람의 상식으로 근접전을 벌여서는 안 되는 괴물임을.

온우가 휘두른 검을 그대로 움켜쥐고 잡아당긴 철백은 빠르게 당겨 낸 오른손을 휘둘렀다.

[하!! 괴ㅁ……!]

끔찍한 굉음과 함께 온우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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