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64화 (564/624)

제564화

563화-축생의 유정 (3)

뜬금없이 영역으로 끌려온 설란과 유예린, 연화는 침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연화가 문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방향을 알 수 있었기에 그쪽으로 움직였다.

연화가 문율에게 준 부적을 아직도 그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움직이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그렇게 차분히 움직이는 와중에도 연화는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지?’

영역이란 것은 아무렇게나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전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필수인데, 조금 전에 영역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연화는 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증거다.

적이 자신의 영역으로 단숨에 끌어들이는 것을 제때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는 뜻이니까.

이건 명백하게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도 못 챌 정도의 공간 이동이라니.

웬만한 강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강자라면…….

‘이렇게 귀찮게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왜 굳이 이렇게 귀찮게 영역으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그냥 병력이 모인 곳으로 빨아들인 다음에 그대로 쓱싹 하면 되는 건데.

이렇게 귀찮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이유가 없었다.

“조용하네.”

“그러게요.”

앞서 걸어가는 설란과 유예린의 대화에 연화는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의 말대로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거리의 생김새가 다른 것으로 보아 아까 있던 곳과는 다른 곳이 분명했다.

이렇게 완전히 옮길 수 있으면 대체 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해 한숨을 내쉰 연화는 기운을 차리기 위해 등을 쭉 폈다.

그리고.

“어?”

하늘을 확인한 순간, 연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란 언니.”

“왜 그러니?”

“아까 문 소협을 놓친 곳이 동남쪽이었나요?”

“동남쪽?”

연화의 물음에 잠시 고민한 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도 동남쪽이네요?”

그 말에 고개를 든 설란은 하늘의 별자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설란의 긍정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파악했어요.”

“파악해?”

“적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우리 앞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 * *

[틀어지고 있군.]

이면의 영역.

그곳에서 적들을 살피던 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번견은 죽었고, 위효(慰曉)는 웬 어린놈을 붙잡고 놀고 있다.

다른 놈들은 축생(畜生)의 유정(有情)이라는 말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이성이 흐린 놈들밖에 없다.

즉, 필요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지금 자신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시간도 더 필요했고.

[우공이 도와주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군.]

술사가 끼어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리지만, 그 술사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다.

술사도 그냥 육체적 능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인 일.

귀찮고 번거롭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를 움직이면서 존재는 자신의 육체를 꿈틀거렸다.

새까만 털이 전신을 덮고, 튀어나온 주둥이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거대한 늑대가 직립보행을 한 것 같은 모습의 존재, 오시(汚豺)는 땅을 박찼다.

단숨에 건물 위를 달리기 시작한 오시는 말 그대로 바람이 되어 공간을 갈랐다.

순식간에 늘어지는 주변 풍경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이내 목표물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인간.

자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인간을 향해 오시는 단숨에 허공을 박차고 떨어졌다.

인간이라면 인지하지도 못할 속도로 내리꽂힌 오시의 발톱이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자의 머리통을 찢어발기려는 그 순간.

“와 주면 고맙지.”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반발력에 오시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그대로 멈춰 선 오시는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인간, 반응이 좋군.]

“뭐, 별거 아니지.”

손을 털어 내며 자세를 고친 연화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시를 올려다봤다.

“재(災)에서도 최상급, 멸(滅)을 목전에 둔 수준. 얼추 맞지?”

[인간의 기준 따윈 모른다.]

허공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시를 바라보며, 연화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고작 번견에 불과한 존재가 주현운과 소윤혜를 몰아붙였다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災)만 해도 단주급의 술사가 아니라면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 괴물이다.

특히, 힘의 종류에 따라 부하 술사들이 펼치는 거대한 술식을 동반하지 않으면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괴물이 최소 하나.

거기다.

“저쪽에 있는 녀석도 당신 정도로 강한가?”

[위효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 욕망에 충실한 녀석이긴 하나, 그렇기에 힘만큼은 확실하지.]

오시의 긍정에 연화는 딱딱하게 굳으려는 표정을 억지로 폈다.

청랑도 함께 있으니 분명 괜찮을 거다.

핵심은 탈출하는 것.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거다.

목표는 도주.

상황은 좋지 않지만, 희망은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시작은.

“목 아프니까 슬슬 내려오지 않을래, 멍멍아?”

저 괴물을 저지하는 거다.

* * *

“이게 맞을까?”

“자신이 있어서 한 선택일 테니, 믿어 줘야죠.”

설란의 물음에 유예린은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도 입술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화를 그곳에 홀로 두고 오는 선택은 결코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왕!]

“그래,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될 일이야.”

문율을 데리고 탈출, 연화와 합류하면 어떻게든 이 영역을 빠져나갈 수 있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길은 열린다.

당장 주현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천위.’

자신의 연인을 부를 수도 있다.

연화가 몇 번이고 부르려다가 실패해서 솔직히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어찌 됐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건 희망적이다.

무엇보다.

“버틸 순 있어요.”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적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방어에 몰두하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무인과 악귀의 상성이란 게 그렇다.

서로가 수준이 비슷하다면, 확실하게 끝내기 어려워진다.

한쪽이 버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면서 버틸 수 있다는 소리다.

‘……그게 적이 노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 문율을 구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게 우선이다.

적의 술수에 휘말리더라도 일단 지금 중요한 건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거니까.

‘천위.’

그 사람이 바라는 행복한 결말이란 건 분명 그런 것일 테니까.

주변에 있는 재능 넘치는 이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피와 땀을 흘려 가며 훈련에 매진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일 테니까.

피를 보는 것을 즐기지도 않는 사람이 적들에게 더 잔인하게, 더 잔혹하게 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일 테니까.

그러니.

“구합니다.”

이것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유예린의 확고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은 그녀를 따라 달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스쳐 지나가고, 두 사람은 어느새 자신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허공으로 치솟은 수십 개의 팔이 사방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율!”

단숨에 땅을 박찬 유예린은 순식간에 문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머? 여자는 취향이 아닌데?]

문율에게 달라붙어 그를 희롱하던 위효는 갑작스레 등장한 유예린과 설란을 보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단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을 뿐.

“누님들!”

유예린과 설란의 등장에 반응한 문율이 소리쳤다.

“도망쳐요!!”

절규와 같은 외침.

그리고.

쩡!!

“흡!!”

자신을 덮치는 천수를 막아 낸 유예린은 그대로 허름한 건물을 3채나 부수고 처박혔다.

“유 동생!”

그런 유예린의 모습에 놀란 설란이 소리치는 순간, 위효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호호호호, 내 치마폭에 들어온 남자를 뺏어 갈 생각이니? 어림도 없는 꿈을 꾸는구나.]

“조종하는 계열의 악귀입니다!”

이를 악문 문율의 외침에 설란은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최악이야……!’

축생의 악귀라고 해서 육탄전만을 예상했는데,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상대가 인간을 조종하는 종류의 능력을 지녔음을 확신한 설란은 즉시 반응했다.

적의 능력이 무엇을 매개로 움직이는지 모르는 지금, 무작정 접근하는 건 하책이었다.

“동생!”

“문 소협의 이야기는 들었어요.”

건물의 잔해에서 빠져나온 유예린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소검을 쥐었다.

“바뀌는 건 없습니다.”

문율을 데리고 도망친다.

적에게 조종당하고 있긴 하나 정신은 멀쩡한 걸 보면 아직 늦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 전의 일격은 명백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바로 일어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더 늦어지기 전에 빼내서 탈출합니다.”

[호호호호호! 무슨 당돌한 소리를 하는 거니?]

유예린을 비웃으며 부채를 접은 위효는 문율에게 달라붙어 그 턱을 쓸어냈다.

[이 아이는 이미 내 것이란다.]

콰가가가각!

위효의 웃음소리와 동시에 문율의 천수가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날뛰는 천수의 공세 속에서 유예린은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쾅!

천수 하나가 유예린을 터트린다.

[어머?]

그것이 환영임을 인지한 위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법의 기척은 없었는데?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다시 앞으로 나오는 유예린을 향해 문율의 천수가 쏘아졌다.

다시 한번 땅을 터트리는 강력한 일격이 꽂히고.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니?]

흩어진 흙의 잔해만이 남은 자리에 위효가 놀라운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비키세요. 아줌마.”

어느새 위효의 턱 끝까지 도달한 유예린의 소검이 그대로 위효의 목에 틀어박혔다.

* * *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몸 곳곳에서 흐르는 피가 질척하게 옷에 달라붙었다.

몸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화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할 생각인가? 어린 술사.]

“헷, 한참 더할 수 있어.”

……분명 이럴 땐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 였나?

언젠가 설천위와 했던 장난을 떠올린 연화는 실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집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아직 멀었구나.’

이제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설천위, 그 괴물 같은 양반은 못 이겨도 백화단주님 정도는 비벼 볼 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오만했던 것 같다.

“멍멍이 한 마리도 못 이길 줄은 몰랐는데…….”

[네가 부족한 게 아니다. 상대가 맞지 않을 뿐이지.]

“하, 말 하나는 잘하는 멍멍이네.”

오시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린 연화는 슬슬 꺼져 가기 시작하는 괴연천식(傀然天食)의 힘에 이를 악물었다.

괴연천식으로 부풀린 영력 없이 저 괴물을 얼마나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아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치명상을 피해서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출혈이 계속되면 설령 추가적인 치명상을 입지 않더라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가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대체 어떻게 해야…….

[음?]

순간 고개를 갸웃한 오시가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리는 그 반응에 발끈해야 정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연화 또한 오시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크허어어어어엉!]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비명.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귀건? 또 다른 침입자가 있는 건가?]

예상치 못한 아군의 죽음에 오시가 의문을 표하는 그 순간.

“에구, 우리 막내 얼굴이 피범벅이 됐네.”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촤아악!

자신의 손바닥이 갈라져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오시가 눈을 부릅뜨고.

“언니!”

창을 쥔 서하영이 연화를 감싼 채 웃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네? 우리 막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