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3화
562화-축생의 유정 (2)
홀로 남은 문율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제자리에 서서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긴 하지만, 그의 직감이 외쳤다.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보면 단숨에 공간을 비틀어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들인 존재가 있을 테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건 딱히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움직이기로 결정한 문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허름한 건물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퍼지는 은은한 분 냄새.
진한 향수를 뿌린 여인이 지나가면 코를 잡고 미간을 찡그리겠지만, 이렇게 은은하게 퍼지는 분 냄새는 달큼함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마력이 지니고 있었다.
싫지 않은 달큼함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아가던 문율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취하는 듯한 감각.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며 자세를 고친 문율은 아까 전까지 허름했던 거리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몇 걸음 걸어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허름한 건물들이 단정하게 바뀌어 있었고 건물 사이사이 걸린 홍등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 공자님 어딜 그리 가시나요?”
“여기에 오시면 편안하게 쉬실 수 있을 터인데, 어떠신가요?”
목 아래와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은 여인들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문율을 유혹하듯 불렀다.
뽀얀 살결, 웃음 짓는 붉은 입술.
모든 것들이 남심을 뒤흔들었다.
“어머, 딱히 마음에 품은 여인도 없으신 것 같은데 하룻밤 달콤하게 놀다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노골적인 유혹.
옆에 붙어 있지 않음에도, 마치 옆에 바짝 붙어서 속삭이는 것 같은 여인들의 목소리에 문율은 손뼉을 마주쳤다.
“후우.”
이성을 향한 관심? 없진 않다.
문율도 남자인데, 설마 없겠는가.
좋다고 접근하는 여인들은 많았지만, 단지 그들에게 흥미가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유혹하는 여인의 말대로, 딱히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저런 유혹에 휩쓸린다고 죄책감 따윈 느낄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아미타불.”
너무나도 뻔한 유혹에 휩쓸릴 정도로 정신 수양이 얕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외는 불호와 함께 문율의 등 뒤로 여덟 개의 팔이 솟아난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손은 선명하게 형체를 이뤄 내었고, 문율은 호흡을 고름과 동시에.
[천수천살(千手千殺)]
망설임 없이 사방을 향해 공격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살려 주세요!”
건물을 마구 부수고, 홍등을 찢어발기는 손이 말 그대로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터져 나오는 비명.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여인들의 몸짓.
모든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자극했으나, 문율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모습에 냉혹함을 유지하지 못해 이런 함정에 빠졌으나, 냉정함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문율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 공간으로 끌어들인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쉽사리 넘어가진 않을…….
[흐응, 좋구나.]
순간,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문율은 반응했다.
치솟았던 팔이 단숨에 늘어나며 등 뒤의 존재를 노린다.
목, 심장, 간장, 폐 등등 급소만을 노리며 파고든 손들이 단숨에 적을 꿰뚫는다.
[어머, 거칠기는.]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몸에 닿는 순간 멈춰 버린 팔들을 통해 그 감촉을 느낀 문율은 당황했다.
부드러움.
여인의 살결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움에 문율의 천수(千手)가 잡아먹혔다.
[이리로 오렴.]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당긴 여인은 그대로 문율을 끌어안았다.
뒤통수부터 목, 등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부드러움에 순간 휘청거린 문율은 단숨에 그 손길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렸다.
“뭐 하는 놈이냐?”
[후후후, 놈이 아니라 년이란다. 방금 느꼈잖니?]
느끼긴 뭘 느껴.
여인의 도발적인 언행에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말을 내뱉을 뻔한 문율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해.’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상대는 명백한 강자였다.
고급스런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여인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무인들과는 다른 말랑말랑한 몸 선.
비현실적인 크기의 신체가 눈을 사로잡았다.
탄탄함이 아닌 부드러운 느낌의 건강하고 어여쁜 몸매는 남녀를 불구하고 한 번쯤 안겨 보고 싶은 매력을 지녔다.
접었다 펴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여인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문율에게 다가갔다.
[괜히 힘 빼지 말렴. 이 뒤에도 힘 뺄 일은 많으니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오는 여인을 경계하며, 문율은 천수를 꺼냈다.
“그건 거절하지. 아줌마와 어울리고픈 취미는 없어서.”
[어머? 그게 무슨 상스러운 말버릇이니?]
아줌마라니.
해선 안 될 말이 있는 건데.
입꼬리를 올린 여인은 가볍게 부채를 접으며 웃었다.
[혼나야겠구나?]
* * *
“문율이 납치당했어.”
다급하게 복귀한 설란은 즉시 문율의 소식을 알렸다.
연화의 언질로 미리 모여 있던 이들은 설란이 전한 소식에 즉각 반응했다.
“바로 움직이죠.”
“그래야지.”
“일단 진정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보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현운과 소윤혜를 다시 자리에 앉힌 유예린은 설란을 바라봤다.
“상황 설명 부탁해요.”
“음.”
유예린의 말에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한 설란은 빠르게 핵심만을 전했다.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오던 중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했고, 거한들을 향해 돌진하던 주현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뒤이어 설란도 주현운이 있던 곳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거한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예요.”
설란이 설명하는 사이, 그녀가 데려온 아이를 살핀 연화가 어느새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의심할까 봐 진짜 학대받던 아이를 미끼로 쓴 것 같아요.”
“이 정도 준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건가.”
적들이 드러내는 자신감에 일행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기에.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연화야, 네 잘못은 아니지. 적들의 기습이 뛰어났던 것뿐이야.”
연화의 자책에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인 주현운과 소윤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움직이기 전에 먼저 몇 가지 확인부터 하죠. 연화야.”
“네. 언니.”
“네가 나눠 준 부적, 그건 어떻게 된 거니?”
“아주 잠깐 반응이 있었다가 사라졌어요.”
“공간에 휩쓸리는 순간 왔던 반응이 끝이었나 보구나.”
“네. 완전히 단절된 것 같아요.”
너무 희미한 반응이었기에 바로 움직이지 않고 일행을 모은 뒤 설란을 기다린 것이 잘못이었다.
즉시 움직여서 찾았으면 차라리…….
다시금 자책으로 빠지려는 연화를 보고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 지금 중요한 건 문 소협을 구하는 일뿐이야.”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이 입을 열었다.
“일단 흔적을 쫓아야 하니, 연화와 내가 현장으로 가겠다.”
“저도 같이 가죠.”
“그럼 저희도…….”
“아니. 소 언니와 주 소협은 여기 남습니다.”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냉정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적들의 함정일 가능성도 있어요. 운 공자의 호위를 비우는 건 하책입니다. 조사를 위해 연화가 나가는 이상, 주 소협은 반드시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유예린의 지시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주현운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일대로 나뉘죠. 소 언니, 만약 적들의 기습이 있다면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대응해 주세요.”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요.”
무거운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소윤혜와 주현운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유예린은 설란과 연화를 데리고 곧바로 문율이 사라진 현장으로 이동했다.
야심한 밤.
이렇다 할 인기척도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밤의 도시에서.
“……이건, 걸렸군요.”
숨소리조차 사라진 거리에 결국 유예린과 설란, 연화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다루는 악귀,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악귀가 분명해요.”
딱딱하게 굳은 연화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침착하게 주위를 훑어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현장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공간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끌어들였다.
그것도 연화가 바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건…….
“느껴져요.”
“뭐가?”
“문 소협에게 줬던 부적의 기척이에요.”
연화의 말에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얻은 유예린은 소매에서 검을 꺼냈다.
“이면이네요.”
“이면?”
“이곳은 북경이되 북경이 아닌 곳.”
“아.”
유예린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외에는 말이 안 되네요.”
두 사람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던 설란은 이어지는 연화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끌려왔다는 소리예요. 이 도시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또 다른 공간으로 말이죠.”
또 다른 공간이라는 말에 설란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를?”
“네.”
설란의 놀람을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힘을 끌어올렸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만들어 낼 정도의 괴물이 저쪽에 있다는 소리죠.”
* * *
은밀한 어둠, 산의 정적을 틈타서 움직이는 기척이 산을 부산스럽게 흔들었다.
“이게 맞나 모르겠군.”
“어떡해요.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아직도 망설이는 철백과 어깨를 으쓱인 서하영은 산길을 내달렸다.
수도를 둘러싼 천라지망?
힘으로 뚫어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도 추적이 따라붙고 있지만, 뭐 도시로만 들어갈 수 있으면 장땡이지.
다만 상당히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반응이 생각보다 적었다.
마치 다른 곳으로 병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덕분에 별다른 무리 없이 천라지망을 뚫은 두 사람은 어느새 북경의 성벽을 코앞에 둘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고 있었다.
“팽가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음.”
팽가는 말 그대로 곪아 가던 중이었다.
몇몇 팽가 무인들이 반역자들에게 동조.
그런 결과를 가져온 관리.
혼란에 빠진 팽가.
그 사이를 파고든 악귀의 조작까지.
말 그대로 가문 하나가 곪아서 사라지고 있던 것을 창천단과 철백, 서하영이 막아 냈다.
상처를 째서 고름을 짜내고, 도려낼 건 도려내서 상처의 치유를 도왔다.
그 뒤의 회복은 알아서 할 일이지.
남궁선을 남겨 두고 왔으니, 그쪽은 별 탈 없이 잘 해결될 거다.
문제는…….
“황궁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역시 위험하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황보세가가 황실 문제와 얽혀 있음을 알게 된 철백과 서하영이었기에 팽가의 상황을 정리한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곧장 황실이 있는 북경으로 향했다.
중간에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번 더 확신했고…….
“지독하군.”
북경 시내에 도달한 순간, 확신은 분노로 바뀌었다.
“지독할 정도로 악취가 진동하네요.”
철백과 서하영.
설천위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이들이자 설천위가 가장 먼저 영적인 훈련을 시켰던 무인들.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현태중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영안을 개안했고.
그리고 천마와 혼들에게 수업을 들으며 스스로를 더욱 성장시켰다.
그들은 설천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술사를 제외하고 가장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저쪽인가?”
보통이 아닌 무(武)를 익혀 왔다.
내공이 없는 철백은 스스로의 영육을 단련하는 무학을.
창 이외의 무기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서하영은 창과 영육을 일치시키는 무학을 익혔다.
그리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며 그 과정에서 영적인 영향을 크게 받은 두 사람이었다.
특히, 철백은 영력이 완전히 자신의 육체와 일체화된, 통상의 무인과는 전혀 다른 초인이다.
[금강호령(金剛皓靈)]
은빛의 기류를 휘감은 철백의 손이 공간을 찢고 구멍을 뚫는다.
“이곳 같군.”
골목길을 열어 만들어 낸 또 다른 골목길로 철백과 서하영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