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2화
561화-축생의 유정 (1)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이긴 쉽지 않아요.”
문율의 물음에 대답한 연화는 아쉬움을 담은 채 고개를 저었다.
“먼저, 그곳에만 적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요.”
“……설마?”
“예. 북경은 넓고 당연히 그만큼 빈민가의 숫자도 많겠죠.”
“사방에 퍼진 빈민가 전부에 그런 놈들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는 소린가?”
“물론 빈민가 한 곳에 괴물 하나가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그 번견처럼 수족을 부리는 머리가 여럿이라는 소리구나.”
“아마도 그럴 거예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자신의 걱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주 공자와 소 언니가 들어간 영역이 그들이 펼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그게 무슨 소리야?”
자신들이 들어간 영역이 그놈들이 펼친 게 아니라니?
소윤혜의 물음에 연화는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간을 나눈 그 결계는 도저히 축생도의 존재가 펼쳤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깔끔했어요.”
자신도 그 안에 있는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마주했다면 바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영역이었다.
“공간을 다루는 존재가 있어요.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힘을 쓰는 놈인 것 같아요.”
“그런 적이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섣불리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말이구나.”
“네. 전 그렇게 판단했어요.”
흔들림 없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연화의 모습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중에 유일한 술사인 네 판단이 그렇다면 그 판단에 따르는 게 맞겠지. 문 소협.”
“……예.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요.”
명백하게 아쉬움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인 문율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일행의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자제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그럼 정리됐네요. 우리는 빈민가 주변을 조사합니다. 단, 위험하니 빈민가 안으로 진입하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세요.”
* * *
[침입자가 있었다더군.]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데.]
황궁 지척에 있는 작은 장원.
그곳에 모인 존재들을 앞에 둔 녹의의 환관은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두려움을 억지로 삼켰다.
“폐하께서 대업을 앞두고 조금의 변수도 허락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흐응, 폐하께서?]
비웃음이 담긴 대답이 돌아왔지만, 환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환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우리 아기는 왜 이렇게 벌벌 떨고 있을까?]
“흡!”
순식간에 자신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속삭이는 존재의 목소리에 환관이 공포로 두 눈을 부릅떴다.
“모, 모욕하지 마시오!”
그런 공포를 억누르고 억지로 입을 연 환관은 자신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어머, 가랑이 사이가 매끈하면 아기지. 아니니?]
모욕이라고 하기에도 심한 노골적인 조롱에 환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치욕, 그리고 공포로 단숨에 얼굴이 붉어진 환관이 몸을 부들부들 떠는 순간.
[그만해라. 귀찮은 건 질색이라던 것이 잘만 움직이는군.]
[그야 재미있으니까.]
순식간에 다시 탁자 앞으로 이동한 존재의 대답과 동시에 다리의 힘이 풀린 환관이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떠는 환관을 잠시 바라보던 존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내 관심을 껐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지?]
[나야 내 구역에 고개를 안 들이밀면 당장은 건드릴 생각이 없어.]
[안일하군.]
[여유로운 거라고 해 줘.]
[구맥(狗貊)이 죽었다.]
[그 번견이?]
[내 경고를 들었음에도 죽었지.]
[경고?]
경고라는 말에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뛰어난 술사가 있는 것 같더군. 나를 감지해 냈다.]
[우공(愚空)이 펼친 결계를 꿰뚫어 봤다고?]
우공(愚空)이 누군가.
전투력은 굴러다니는 악귀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지만, 공간을 뒤틀고 차단하는 힘만큼은 재(災) 등급 이상으로 알려진 악귀다.
무려 언여휘가 아끼는 악귀 중 하나이자, 이번 계획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 우공이 축생(畜生)의 유정(有情)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각자의 영역이었다.
철저하게 분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정체를 숨겨 외부에서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 또한 겸하고 있었는데…….
그런 우공의 결계를 감각만으로 뚫어 냈다는 건 상대가 비범한 술사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황궁에서 우려를 표하는 것도 당연하다. 놈들은 식사가 늦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히히, 돼지 놈들 아주 훌륭해.]
그래야 축생이지.
웃음을 터트린 존재는 몸을 일으켰다.
풍만한 육체가 매혹적으로 흔들린다.
[나는 나대로 움직이겠어.]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축생이니.]
상대의 대답에 입꼬리를 비튼 존재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 일행 중 수컷은 얼마나 되지?]
* * *
선공은 불가.
그 결정을 받아들인 문율은 다음 날, 지시대로 무리하지 않고 조사를 이어 나갔다.
다만, 함께 움직여야 할 주현운과 소윤혜는 각자의 사정으로 쉬고 있어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을 보죠.”
“예.”
딱딱한 표정과 눈빛.
그리고 어조마저 딱딱한 설란의 모습에도 문율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따랐다.
그런 문율을 잠시 눈에 담았던 설란도 이내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살폈다.
평상시의 문율을 생각하면 이런 딱딱한 태도는 불쌍하지만, 임무 수행 중엔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뿌리까지 침범한 습관이니까.
임무 중에는 그 누구보다 차갑고 냉철해진다.
그것이 그녀의 신념이고 방식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문율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해야 할 건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설란이 주위를 살필 때, 문율 또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만, 설란의 우려와 달리 문율은 그녀의 딱딱한 태도에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편함이 생기는 요소는 이번에 얻은 성취를 갈무리하고 있는 주현운과 부상을 입은 소윤혜에 대한 걱정 정도일까.
애초에 설란의 걱정은 그녀가 문율을 잘 모르기에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율은 전투 중에 성격이 변하는 게 아니었다.
분노에 휩싸이거나 전투의 흥분에 빠지면 말이 짧아지는 건 단지 상대에게 예의를 챙길 여유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어제 있었던 회의에서도 친분이 있고 자신보다 어린 연화에게는 말을 편하게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높이지 않았던가.
전투에 몰입할 때와 아닐 때의 차이를 보고 그를 이중인격이라고 여기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애초에 설천위가 무해에게 문율을 맡긴 이유가 뭐였던가.
그런 꼴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투에 미쳐서 사람이 변해 버리는, 그리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변해 버린 성격과 본래의 성격을 둘 다 가진 미치광이가 되지 않도록 무해에게 문율을 맡긴 거였다.
그리고 문율은 훌륭하게 교육을 이수해 냈고…….
“아앙?”
“형님!”
“이 자식들이 눈깔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으가가가가각!”
훌륭한 광인, 아니 무인이 됐다.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왈패의 손목을 단숨에 꺾어 제압한 문율은 살기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꺼져.”
“옙!”
“으아아아!”
도망치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문율은 시비의 원인이 된 설란을 바라봤다.
“부단주님, 얼굴을 면사로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십 대 후반.
일반적인 여인들의 관점에서는 물론 여무인들을 기준으로 봐도 결혼 적령기를 한참 지난 설란은 자신의 외모를 과소평가했다.
남자들은 젊은 여자를 좋아할 거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 가리셔야 합니다.”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문율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사내들끼리 모였을 때 떠드는 얘기를 들어 보면 여인의 나이 따윈 하등 쓸모없는 기준이었다.
대부분이 자기 어머니랑 친구 먹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고 했지.
물론, 그 전에 엄청나게 예뻐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설란은 무인 특유의 생명력으로 외모 또한 젊게 유지하고 있어서 이십 대 초반의 여인과 다를 게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매력을 지닌 여성이라는 소리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와 행실 때문에 주변의 남자들이 감히 들이대지 못해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연화와 오는 길에 일부러 면사를 안 해서 들이대는 남자들과 시비가 붙어서 시선을 끌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무래도 본인 말고 연화의 미모 때문에 그랬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하는 표정으로 걸어가는 설란을 대신해 노점에서 면사를 구매한 문율이 그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걸 착용하시죠.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면 좋지 않습니다.”
“외모로 따지면 문 소협이 더할 것 같은데요?”
“전 기척을 줄이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얜 화경급 고수지?
문율의 대답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 설란은 순순히 면사를 착용했다.
그렇게 시선이 쏠리는 것을 줄이고 걸어가기 시작한 문율과 설란은 별다른 성과 없이 빈민가 주변을 돌아다녔다.
설란이 얼굴을 드러냈을 땐 생각 없는 왈패들이라도 꼬였는데, 그녀가 얼굴을 가리니 그런 시비조차 사라져 아무런 충돌 없이 조사가 끝났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네요.”
“일단은 물러나죠.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 같으니.”
“그러네요. 꽤나 멀리 온 것 같기도 하고.”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그 주변을 도는 형태로 조사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멀리 와 버렸다.
두 사람의 신법이면 금세 돌아갈 수 있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밤늦게까지 조사를 진행하는 건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설란은 복귀를 결정했고, 두 사람은 굳이 신법을 쓰지 않고 움직였다.
무리해서 빨리 돌아갈 필요도 없거니와 가는 길에 뭔가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달이 완전히 뜨기 전에는 도착할 거다.
그렇게 판단한 설란과 문율은 그렇게 왔던 길을 더듬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빈민가를 지나고, 그 사이에 있는 상점가를 지나고, 주택가를 지나고.
그렇게 거리를 걸어가던 바로 그때.
“음?”
빈민가 근처, 상점가와 이어지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싸우는 듯한 소리.
무시할까 끼어들까 고민하던 그때.
“살려 주세요!”
다급하게 뛰쳐나오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설란과 문율은 당연하다는 듯 움직였다.
멍으로 가득한, 삐쩍 마른 몸.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그 모습을 보고도 끼어들지 말지 고민에 빠질 정도로 설란과 문율은 냉혹하지 못했다.
“이년! 어딜 가는, 꺽!”
다급하게 뛰어오는 거한의 목을 그대로 가격해 쓰러트린 문율은 뒤따라오는 덩치들을 일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란의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떠는 여자아이.
그리고.
“후우.”
눌러 놨던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문율은 주먹을 쥐었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문율이 거한들 사이에서 다시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이 아작 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거한들.
눈 깜짝할 새에 적들을 정리한 문율은 가볍게 주먹을 털어 내며 설란에게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고 했다.
“……방심했네.”
빈민가가 아니라서 안심했나.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설란과 여자아이의 모습에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문율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이 없는 폐가가 늘어선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분내라.”
은은하게 퍼진 여인의 분내를 맡으며, 문율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