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1화
560화-북경 (5)
한 번의 깨달음.
그것으로 자신이 품고 있던 무학들을 완성해 낸 주현운은 그것을 결과물로 끄집어냈다.
무한한 경우의 수를 지닌 검의 베는 경로를 하나로 엮어 낸 검술을 만들어 내고.
찌른다는 하나의 길을 가진 얇은 세검을 무한한 경우의 수를 품은 세검으로 만들어 냈다.
그것은 결과였다.
수천, 수만, 수억의 무(武)를 하나로 엮어 만들어 낸 결과.
그 과정은 전부 날려 버리고, 결과만을 만들어 낸다.
적을 베었다는 결과, 적을 찔렀다는 결과, 적을 죽였다는 결과.
그렇기에 그것은 하늘의 뜻과 다를 바가 없었고.
[천무(天武)]
주현운은 그것에 ‘하늘의 무’라는 오만한 이름을 붙였다.
이번엔 검 대신 도를 쥔 주현운은 몸을 비틀며 땅을 박차는 적을 향해 맹렬히 도를 휘둘렀다.
이제는 베인다는 것을 알았는지 회피를 위해 몸을 비트는 적의 반응은 훌륭했으나, 육체만을 믿고 무(武)를 갈고닦지 않은 움직임은 그 한계가 뚜렷했다.
효율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카아아아악!]
비틀어진 경로를 그대로 따라와 자신을 베어 낸 도를 팔을 들어서 막아 낸 괴물은 기어코 팔이 잘려 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거기다.
[이상해! 이상하다고오오!!]
상처의 재생이 느려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수가 없는데.
대체 왜?
대체 어떻게?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사고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솟구친 분노가 몸을 움직이게 했다.
토해 낸다.
짐승은 감정을 토해 내는 것을 우선시하기에 짐승인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한 괴물이, 괴인이 아니라 괴물인 것은 그자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본질에 인간이 없기에, 이 괴물을 칭하는 말에 ‘인(人)’이라는 글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괴물을 바라보던 주현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결정한 순간, 이번엔 검도, 도도, 창도, 세검도 쥐지 않은 주현운은 손을 휘저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동작.
그리고.
[컥!]
너무나도 간단한 결과.
목이 베인 괴물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꼬꾸라진다.
흉하게 벌어진 목을 손으로 붙잡고 어떻게든 생을 이어 나가려 발악하는 짐승의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주현운은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짓뭉개진 괴물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부산물들이 땅을 적신다.
적의 죽음을 확인한 주현운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날카로워진 기감에 더 이상 잡히는 적은 없었다.
이 근방에는 적이 없다.
그것을 확신한 주현운은 동시에 새로운 사실 또한 확신했다.
“움직이자.”
“응?”
“여긴 위험해.”
지금 자신이 처리한 놈은 머리가 아니다.
고작해야 사냥개.
주인을 위해 먹이를 물어 가는 번견에 지나지 않았다.
저 너머,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불길함을 감지해 낸 주현운은 비틀거리는 소윤혜를 그대로 업었다.
“야! 야!”
허공섭물을 이용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업힌 소윤혜는 부끄러움에 작은 반항을 했지만, 끝내 주현운의 등에 몸을 맡겼다.
“바로 물러나요.”
소윤혜를 단단하게 붙잡은 주현운은 그대로 달려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슴을 간질이던 불길함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골목을 빠져나온 순간.
“찾았다!”
갑자기 달려오는 이를 확인하고 멈춰 섰다.
“어떻게 여길 알고?”
“그건 제가 더 궁금하네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두 분의 영력을 느낀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세요?!”
주현운을 타박하며 이리저리 두 사람을 살핀 연화는 부끄러움에 주현운의 등에 얼굴을 박은 소윤혜를 살피곤 안도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네요.”
“언니, 이리로 와요. 치료해야 하니까. 거기가 좋은 건 이해하겠지만…….”
“아, 아니거든?!”
유예린의 장난에 발끈한 소윤혜는 바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주현운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다가 겨우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물론.
“윽!”
그 즉시 정강이를 까인 주현운은 다리를 잡고 주저앉았지만.
사실 안 아플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힘을 풀어서 꽤나 아팠다.
“그래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안에서?”
골목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니 그야…….
짧게 생각을 이어 가던 주현운은 이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유예린에게 상처를 보이고 있던 소윤혜 또한 크게 놀랐다.
“설마?”
다급하게 뒤를 돌아본 주현운은 의식한 상태로 기감을 펼치고 나서야 연화의 말뜻을 이해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영역(靈域)이었다고?”
“영역에 들어갔던 걸 몰랐어요?”
“전혀.”
연화의 질문에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한 주현운은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야 처음에는 몰랐다고 치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눈치채지 못했어.’
연화의 말을 듣고 의식한 뒤에야 겨우 깨달았을 정도로 영역이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깔려 있었다는 소리다.
깨달음을 얻어서 벽을 넘지 못했다면, 연화의 말을 듣고도 바로 눈치챌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을 정도로.
“……위험한데.”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거잖아요.”
긴장하는 주현운의 어깨를 토닥인 연화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일단 도망치죠!”
구할 사람은 다 구했으니까!
* * *
“과연……. 음지에 숨어서 일을 벌이고 있었다는 건가.”
“영역까지 펼쳤으니 일반인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소문이 안 나는 게 당연해요.”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놈들이야 언제 실종돼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는 놈들이니 문제가 쉽사리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거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으니, 깊게 파헤치지 않고 넘어갔겠지.
“빈민가에서 겨우 살아가는 이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고 있다는 건가…….”
“삐쩍 마르고 힘이 없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과 혼은 훌륭한 제물이니까.”
운주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씁쓸하게 대답한 연화는 한숨과 함께 부적을 꺼냈다.
“일단, 다들 이거 나눠 가지세요.”
“이건?”
“주 공자의 얘기를 들어 보면 적이 우리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아요.”
주현운과 소윤혜를 마주한 순간, 적이 보인 반응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다르다.
조금 다르다는 것은 무언가가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기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는 소리다.
그것과 맞지 않으니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고.
즉.
“적은 저를 인지했어요. 제가 영(靈)을 탐지한 걸 눈치챈 게 분명해요.”
“그렇다는 말은 놈이 영적으로 뛰어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인가?”
“네. 술사거나 높은 수준의 악귀일 가능성이 커요.”
“그럼 이 부적은?”
“영적인 존재에게 공격을 받으면 제가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적이에요.”
일행에게 전부 부적을 나눠 준 연화는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적과 조우하면 싸우지 말고 물러나는 걸 우선시하세요. 적이 이곳에 축생을 뿌리고 있다면, 무인인 여러분들은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
철백이라면 몰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축생도의 괴물은 상성 면에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 공자가 벽을 뛰어넘어 적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축하해야 할 일인데, 그럴 여유도 없었네. 늦었지만 축하해.”
연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란의 미소에 주현운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그런 주현운의 곁에서 움찔거리는 소윤혜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어느새 자리에 앉은 연화는 자신의 옆에 있는 운주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움찔거리니?”
“뭐가 말이오?”
“주 공자라고 할 때마다 묘하게 움찔거리는 것 같던데…….”
“그런 적 없소.”
“흐음…….”
덤덤하게 고개를 젓는 운주의 반응에 턱을 쓸던 연화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럼 그런 거겠지.”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 연화는 쓸데없는 고민은 치우고 중요한 것에 집중했다.
“아무튼! 앞으로 돌아다닐 때는 그 부적을 반드시 가지고 다니세요! 저는 계속 이곳에 대기할 테니까요.”
“그것 말인데.”
“네!”
손을 든 문율은 평소의 순한 모습이 아닌 미묘하게 비틀린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친한 두 사람이 습격당한 사실에 크게 분노한 듯 보였다.
그런 문율의 살벌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대답한 연화는 눈을 반짝였다.
뭐라도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다는 기세를 보이는 연화를 향해 문율은 물음을 던졌다.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는 건 힘든 일인가?”
* * *
“으아아아아, 늘어진다…….”
붉은 하늘, 질척한 대지.
곳곳이 피로 얼룩진 바위에 몸을 누인 설천위는 한껏 늘어져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더럽게 힘드네.”
심상 세계.
혈주를 짓밟고 완전히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확신한 순간 찾아온 변화는 설천위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혈주가 남긴 것.
그것은 피의 기억이었다.
혈주(血主)라는 존재가 신화시대부터 존재하며 쌓아온 피의 기억.
대지로 스며든 죽음의 기억이자, 강에 섞여 흘러내린 생의 기억.
솟구치는 모든 것들은 죽음이었고, 적이었다.
과연 신(神)의 영역에 도달했던 존재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품고 있던 혼들과 완전히 괴리되어 홀로 남은 설천위는 그런 기억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억울한 한을 품고 죽은 농민의 기억을 베고.
살의를 품고 날뛰다가 죽은 무인을 베고.
복수심을 품고 전장에 뛰어든 병사를 베고.
세상을 손에 넣을 욕망을 품고 타인의 피를 대지에 흩뿌린 장수를 벴다.
베고, 또 벴다.
심상 세계에서 지치는 것은 정신뿐이었고, 설천위는 정신이 지치지 않았기에 정말 끝도 없이 싸웠다.
싸우고 또 싸워서.
“이제 끝날 때가 되지 않았냐?”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평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심상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니 밖에서도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길게 잡혀 있는 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평원을 전부 정리하고 늘어져 있던 설천위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제야 똑바로 서서 여태껏 이 살육의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존재와 마주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와 마주한 설천위는 상대의 무반응에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방구석 폐인이긴 했어도 그렇게 무뚝뚝하진 않았어, 새끼야.”
천희.
자신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의 반응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설천위는 뺨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이렇게 보니, 역시 좀 잘생긴…….”
[양심이라곤 없군.]
“야! 지금 타이밍에 그건 반칙이지!”
나름 잘생겼다고! 고백을 받거나 그런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괜찮게 생겼던…….
[이만한 죽음을 쌓아 올리고도 네 녀석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냐?]
“아, 외모 얘기가 아니었어?”
휴, 그럼 문제없지.
[장난을 치는군.]
능청스럽게 이마에 땀을 훔치는 척하는 설천위를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본 천희의 형상이 꿀렁거렸다.
그리고.
쏟아진다.
설천위가 여태까지 베었던 것들이.
살기 위해서 짓밟고 넘어왔던 것들이 쏟아져 초원을 다시금 채우기 시작했다.
[잔인, 잔혹. 그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네놈은 비정하게 피를 쌓아 왔다.]
“너, 혈주냐?”
[네놈은 선한 척하지만 고문으로 정보를 캐내길 주저하지 않았고,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비인도적인 실험조차 서슴지 않았지.]
“맞네, 이 새끼. 혈주 맞아. 뭐, 아님 말고.”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만 쏟아 내는 천희의 형상을 보며 혀를 찬 설천위는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도를 손에 쥐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살려고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버텨 왔지.”
당장 신의가 익힌 [천의무봉]만 해도 죄인의 사지를 잘랐다가 붙이는 잔인함의 끝을 달리는 실험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완성하지 못했을 거다.
무림에 살아서 무뎌졌고 이 세상에서는 제도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위이기는 했으나, 설천위는 일반인의 시선에서 보면 흉악한 범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이제 네가 쌓아 올린 피의 업을 짊어질 때가 왔다.]
천희의 형상을 한 존재의 경고에 설천위는 비웃음으로 답했다.
“어디 한번 해 보시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