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8화
557화-북경 (2)
“……도착했다.”
야심한 밤.
성벽을 넘어 도시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 연화는 작게 환호했다.
그런 연화를 보고 살며시 웃은 설란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고생했어. 여기까지 도착한 건 다 연화, 네 덕분이야.”
“헤헤.”
“성벽을 이렇게 쉽게 넘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
“황궁을 둘러싼 성벽은 다르겠지만요.”
“그렇겠지.”
수도 북경.
황궁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 나라의 수도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대도시다.
다만, 그렇기에 둘러싼 성벽의 보안에는 한계가 있었고 연화의 술법으로 별문제 없이 잠입할 수 있었다.
“일단 은신처로 가시죠.”
“그래.”
오랜만에 돌아온 북경의 모습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유예린은 사전에 황보중에게 들어 둔 은신처로 일행을 이끌었다.
운주와 고 호위가 알고 있는 안가도 있었지만, 그쪽보다는 황보세가의 안가가 더 안전할 듯해서 그곳을 은신처로 삼기로 한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일행을 이끈 유예린은 금세 안가로 보이는 건물에 도착했다.
조용한 건물.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문으로 다가간 유예린은 별다른 말 없이 문을 두드렸다.
짧게 다섯 번.
미리 약속해 놓은 신호대로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정말 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도(拳道).”
“철의(鐵義).”
사전에 정한 암구호로 유예린이 즉시 대답하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치밀한 기관진식 같은 것 없이 평범하게 열리는 문.
“들어오시지요.”
평범한 모습의 노인이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적당한 크기의 집은 작은 마당이 딸린 평범한 주택이었다.
일을 은퇴한 노인이 거주할 법한, 조용하고 깔끔한 집.
“이곳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여자와 남자를 나눠 방을 안내해 준 노인은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사라졌다.
“이불이다!”
방에 놓인 침대를 발견한 연화가 눈을 빛내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포근하게 감싸는 이불.
고급품은 아니지만, 깨끗한 이불은 적당히 부드러워 쌓인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침대는 두 개니 조금 좁아도 둘이서 자야겠네요.”
“그럼 제가 소 언니랑!”
“너, 내가 작아서 고른 거지?”
덩치로 보면 너랑 나는 떨어져야지.
침대 위에서 손을 흔드는 연화의 이마에 딱밤을 때린 소윤혜는 반대쪽 침대 밑에 자신의 짐을 내려놨다.
“후우, 그래도 여긴 안 들킨 것 같네.”
“예. 감시하는 기척도 없고…….”
설란이 말끝을 흐리며 연화를 바라보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법적인 감시도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겠어.
연화의 술법을 이용해 이동하느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거기다 이동 속도도 느려서 거의 열흘 정도 걸렸으니, 제아무리 무인이라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다른 이들과 달리 운주의 피로는 상당히 심해서 휴식은 반드시 필요했다.
“일단, 하루 이틀 정도는 휴식을 취하고 한동안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으기로 하자.”
“네.”
“패력단주님이 제때 도착하셨다면 슬슬 움직임이 있어야 할 때니, 그쪽으로 집중해 줘.”
“옙!”
당차게 대답하는 연화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설란과 유예린은 그런 연화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가장 정보를 잘 얻어 올 수 있는 인물이 연화였으니까.
북경.
화려한 불빛이 넘실거리는 이 번화한 도시에도 죽음은 존재했으니.
* * *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한 설란 일행은 곧바로 활동을 개시했다.
다만, 활동이라고 해도 정보 수집이 먼저였기에 일행은 전부 기척을 감추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집중했다.
연화는 떠도는 혼들을 잡아 심문하고 다녔지만.
여하튼, 그렇게 정보 수집에 열중하길 이틀째.
일행은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패력단주님 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황궁의 병력이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전투가 있었다는 소문조차 없는 걸 보니 아예 도착을 못 했을 가능성이 크겠네.”
“그렇게 봐야겠죠.”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그나마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연화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병영을 드나드는 혼을 데려다가 탐문했는데, 지금 황궁을 둘러싼 천라지망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적이 나타나 병력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병사들은 현재의 상황을 잘 모른다는 거야?”
“네. 천라지망을 대체 왜 펼쳤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더라고요.”
즉, 대부분의 병사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아예 모른다는 소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베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일행의 마음은 절로 무거워졌지만, 빠르게 마음의 무게를 털어 냈다.
무죄의 타인을 챙기려다가 되레 아군이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본말전도다.
설령 죄가 없더라도 적이라면 벤다.
최악을 고를 수 없기에 차악을 고른다.
최선(最善) 따위는 아예 없는 것이 전장 아니던가.
죽음 앞에서 선(善) 따위 없다.
깔끔하게 마음의 무게를 털어 낸 이들은 곧바로 회의에 돌입했다.
“그럼,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좋겠어.”
“지금 이대로 황궁에 돌입하는 건 너무 무모하니까요.”
“동생이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우리들만으로는 힘들겠지.”
설란의 말에 나머지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천위를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운주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천위는 당연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능력을 보여 줬으니까.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걔도 바쁜 거겠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이대로 현상 유지. 휴식을 취하면서 정보 수집. 이걸로 가자. 흔적은 최대한 없애고.”
“네.”
별다른 소득 없이 의견 교환을 마친 이들은 각자 할 일을 위해 빠르게 흩어졌다.
그런 일행 사이에서 조용히 나와 작은 마당에 쭈그려 앉은 연화는 마당에 난 작은 꽃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말없이, 조용히 꽃을 만지던 연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랬죠.’
집중력은 편안한 상태에서 온다고.
평정심이란 것은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라고.
설천위와의 수련 중에 몇 번이나 흥분하지 말라고 처맞았던, 아니 조언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연화는 손안에서 퍼지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영력을 펼친다.
은밀하게.
이 북경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적 술사들의 영력을 피해 은밀하게 힘을 뻗어 나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담아낸다.
동물, 식물, 혼, 사람.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공간 속에 선 연화는 단박에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눈을 감고 있음을.
자신의 혼은 눈을 떴지만, 육체는 눈을 감고 있음을.
그렇기에 볼 수 있는 게 있음을.
“……이건 새롭네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연화는 끝없이 펼쳐진 불꽃의 향연에 감탄했다.
작은 불꽃, 큰 불꽃.
파란색, 하얀색,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등등.
다양하기 그지없는 색의 불꽃이 끝없이 펼쳐져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렇게나 많은 불꽃이 있는데도 눈이 부시지 않음에 신기해하면서 연화는 손을 뻗었다.
가장 앞에 있는 초록색 불꽃에 손이 닿기도 전에, 그것이 자신이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꽃임을 깨달았다.
미약한, 태초에 가까운 형태로 존재하는 혼.
작지만 안정적으로 타오르는 불꽃.
이것이 자연의 불씨임을 직감한 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지우자.
초록색의 불꽃이 지워졌다.
초목이 사라졌고.
푸른색의 불꽃이 지워졌다.
동물이 사라졌고.
하얀색의 불꽃이 지워졌다.
사람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불꽃들은 그 색이 참으로 다양했다.
단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얀색과 초록색이 섞여 연두색이거나, 거기에 붉은색이 섞여 있거나 혹은 파란색이 섞여 있거나 했다.
여하튼 다양한 색들이 한데 섞여 불꽃의 색은 그저 다양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다채로웠다.
게다가 불꽃이 미약한 것도 있었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도 있었으며, 약해졌다 강해졌다 하면서 변하는 것도 있었다.
그 수많은 불꽃들을 눈에 담아 바라보던 연화는 저 멀리 보이는 불꽃에 호흡을 멈췄다.
붉은 불꽃.
타오르는 불꽃의 붉은색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 흐르는 피처럼 짙은 선홍색의 불꽃이 마치 주변의 불꽃을 먹어 치울 기세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허억!”
연화는 즉시 집중력을 깨트렸다.
억지로 몰아를 깨트린 연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연 누이!”
그 순간,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던 운주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고, 그 덕분에 연화는 겨우 쓰러지지 않고 손으로 땅을 짚고 버틸 수 있었다.
“있어.”
“뭐가 있단 말이오, 누이?”
“피를 먹어 치우는 놈. 인간이 아닌 괴물.”
호흡을 가다듬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연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움직여야 돼. 그놈이 나를 눈치채기 전에.”
놈을 인지한 순간 즉시 빠져나왔지만, 그 정도 되는 괴물이라면 자신이 감지한 순간 눈치챘을 가능성이 컸다.
이쪽을 추적하진 못하겠지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경계심은 크게 높아진다.
상대를 처리하려면, 놈이 이쪽의 정체를 정확하게 모르는 지금이 적기였다.
“잠깐 진정하시오. 누이, 갑자기 움직여야 한다니!”
다만, 그것을 모르는 운주는 일단 연화를 붙잡았다.
아니, 설령 사정을 전부 알았다고 해도 운주는 연화를 붙잡았을 거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않겠소?”
연화의 눈동자가 미묘한 공포로 떨리고 있었으니까.
마음에 공포가 심어진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설 소저와 유 소저는 아직 나가지 않았을 거요. 같이 가서 상황을 설명하는 게 낫겠소.”
* * *
“그래서 일단 나온 거야?”
“휴식을 겸해서?”
“……그래. 뭐, 나쁘진 않지.”
연인처럼 보이면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좋으니까.
주현운의 능청스러운 웃음에 고개를 저은 소윤혜는 그의 곁에 붙어서 거리를 거닐었다.
뭐, 사실 사람들 사이에 섞인다고 해도 애초에 기척을 줄여 섞이는 것이기에 연인 행세를 하든 안 하든 별 차이는 없었지만.
휴식을 겸해서 움직이는 거라면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
순식간에 꼬치를 챙기고 돈을 두고 온 주현운이 꼬치를 내밀었다.
“닭인가?”
“아마?”
“음, 나쁘지 않네.”
적당히 양념이 된 꼬치의 고기를 빼먹으며 소윤혜는 주현운과 함께 거리를 거닐었다.
크게 장난을 치거나 하진 못하지만, 오랜만에 단둘이서 오붓하게 걸으니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문율, 그 걔가 생각이 하얀 얘라 다행이지…….’
무공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함께 다니는 둘이 무슨 사이인지 신경 쓰지 않는 문율이 아니었다면 꽤나 어색한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었을지도.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던 소윤혜는 문득 익숙한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누이?”
그런 소윤혜의 모습에 두 걸음 정도 앞서 나갔던 주현운이 몸을 돌렸지만, 소윤혜는 그런 주현운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익숙한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음.
자신이 평생을 갈고닦아 온 그것.
자신의 도(刀)에 깃들어 있는 그것.
그것의 냄새가 바로 옆의 골목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훑어봐야 할 것 같은데.”
주현운에게 손짓한 소윤혜는 망설임 없이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연화가 느꼈던, 붉은 불꽃이 있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