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556화-북경 (1)
“으그그그! 힘들다아~.”
“얘도 참.”
천진항(天津港)의 어느 객잔.
아예 객잔 전체를 통째로 빌린 설란 일행은 그곳 1층에 모여 있었다.
한껏 늘어져 탁자에 뺨을 문대고 있는 연화의 모습에 미소 짓던 소윤혜가 그녀의 뺨을 쿡쿡 찔렀다.
“지칠 만했지. 우리가 베어 낼 틈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네 덕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언니들이 있어서 깰 수 있었어요. 어찌나 독했는지…….”
고작 몇 시진 전, 술법으로 만들어진 영역에서 탈출하기 위해 연화는 억지로 공간을 비틀었다.
설천위처럼 공간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의 술법을 봐 온 만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다행히 성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 정도?
설천위는 무지막지한 영력을 자랑하니 영력이 고갈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연화는 괴연천식(傀然天食)을 사용해야 겨우 설천위를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다.
당연히 뛰어난 술사가 막대한 제물과 자기 자신까지 바쳐 만들어 낸 영역을 강제로 비틀어 버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영력의 소모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섬세함이 동반되지 않으면 비트는 과정에서 영력이 고갈되어 쓰러져 버릴 테니까.
심지어 적의 술수에 당해 영적인 타격을 입었던 연화에겐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모두가 모인 이런 자리에서 한껏 늘어져도 다른 이들이 이해해 줄 정도로.
“단주님이라면 걸린 순간 그대로 찢어 버리셨겠지만요.”
“걔랑은 비교하지 마렴. 정신 건강에 해로울 테니.”
술사가 자신의 역량을 설천위와 비교하는 건 무인이 주현운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주현운은 만지는 순간 거의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웬만한 무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그 핵심을 꿰뚫었고, 두 번 보면 바로 따라 할 수 있었으며, 세 번 보면 그것을 개량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
그런 주현운보다 더한 것이 술사 설천위였으니, 섣불리 비교했다간 자신이 마치 벼룩보다 못한 존재처럼 느껴질 거다.
“자자, 연화는 조금 더 쉬게 놔두고 회의를 시작하죠.”
늘어진 연화와 소윤혜의 대화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이들은 설란의 목소리에 표정을 바꿨다.
미리 가져온 지도를 탁자의 중앙에 펼친 설란은 몇 군데에 깃발을 꽂았다.
“우리가 사전에 파악한 적들의 움직임은 이렇습니다. 황실의 주요 군대가 황도를 둘러싼 형태죠.”
“싸워야 할 외적들이 많은데, 이리도 많은 병사들이 황궁에 발이 묶여 있으니…….”
혀를 차는 우참정의 말에 운주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황궁에 병력이 너무 많이 묶여 있어서 변방에서는 인원 부족을 격하게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서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소문이 이곳까지 들려올 정도였으니, 이대로 몇 년 지나면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끝없는 전투에 지쳐 가는데 배급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누군들 등을 돌리지 않겠는가.
침음을 삼키는 그들을 짧게 바라본 설란은 그들의 상념을 끊고 본론을 꺼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포위를 뚫는 거죠.”
황도를 감싼 병력은 끊임없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천라지망(天羅地網).
무림에서 무림공적을 쫓을 때 쓴다고 하는, 사람으로 엮어 낸 그물.
하늘과 땅을 뒤덮는 그물은 빠져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어 아주 악명 높은 무림의 전술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 황실의 그것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천라지망은 황실이 펼쳐 내는 것.
수만, 많게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해 정말로 그 일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그 안에 갇힌 이들을 압박하는 전술.
그게 바로 천라지망이다.
그리고 지금 황궁은 그 천라지망을 역으로 이용해 황궁 전체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백하게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천라지망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 펼쳐 내는 것이기에 절대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고, 달래고 윽박질러서 진형과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는 길게 잡아 2주 정도면 천라지망에 구멍이 뚫린다고 보고 있다.
아무리 강철 같은 무인들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체력과 정신력을 2주 이상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황궁에 쳐진 천라지망이 2주 정도의 기간 만에 흩어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일단 훈련된 강병이니 체력과 정신력 면에서 무인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고, 무엇보다 그들은 교대할 여력이 있었다.
병력을 순환시킬 수 있으니, 유지 시간의 한계가 무림인들이 펼치는 것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그것도 2, 3개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슬슬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젠 그들도 지칠 때가 됐죠.”
아직까진 천라지망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고 있지만, 지쳤을 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매일 몇 시진씩 경계를 서고 순찰을 도는데 지치지 않을 리가 있나.
광범위한 영역을 감시하기 위해 교대 주기도 빡빡해서 병사들의 피로가 극도로 쌓였을 시기다.
거기다.
“다행히 늦지 않았으니, 병력의 움직임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황보 가주를 믿는 수밖에 없겠군…….”
당초 별동대에 합류해 함께 황실로 향하려고 했던 황보중이었으나, 결국 그는 육로로 움직여 각지에서 모인 병력을 이끌기로 했다.
각지에서 모인 병력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은 배신하지 않고 일을 진행할 정도로 신뢰가 있어야 하며, 적들이 위협을 느끼고 병력과 고수를 움직일 정도의 존재감을 지녀야 한다.
패력단주와 황보세가의 가주라는 이름값이 있고, 황궁에서 억울하게 죽은 가솔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과 함께 뛰어난 무위를 가진 강자.
황보중보다 적절한 인재가 없어서 아니, 황보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황보중을 별동대에서 빼고 그쪽으로 보냈다.
그 탓에 별동대는 화경급 고수 하나의 전력이 빠졌지만, 그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필요한 인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패력단주님이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면 적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전투가 벌어지겠군.”
“예. 전투가 벌어지고 적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모으게 될 겁니다.”
천라지망에 구멍을 뚫는 가장 기초적인 전술.
넓게 퍼진 이들의 한 점을 찔러 주변에 있는 이들을 그곳으로 쏠리게 하는 거다.
그러면 당연히 빈틈이 생기고, 그곳을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미끼 역할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 황보중이 그 역할을 맡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때를 맞추는 겁니다.”
“으음…….”
이 계획의 핵심은 황보중의 병력이 적들을 꾀어내면 그 틈을 찔러서 별동대가 통과하는 거다.
그리고 때를 맞추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선택해야 합니다.”
짧게 호흡을 끊은 설란은 똑바로 운주를 바라봤다.
“기다리시겠습니까? 움직이시겠습니까?”
* * *
“후우, 오늘도 끝났구먼.”
“아으, 이젠 발에 감각도 없으이.”
야영지.
대충 천을 깔아 놓은 바닥에 주저앉은 병사들은 신발을 벗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혹사를 당한 발에 조금 숨통이 트인다.
산길을 오가기 위해 튼튼한 신을 신은 탓에 땀이 차서 퉁퉁 불어 버린 발의 피부가 허옇게 떠 있었다.
“이놈의 똥개 훈련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퉁퉁 불어 버린 발을 손바람으로 말리며 투덜거리는 병사의 옆에서 동료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할 정도로 빡빡하게 짜인 일정에 혹사당한 몸은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가면 열흘 안에 완전히 퍼질 듯했다.
“이건 뭐, 순찰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
“의미가 왜 없어?”
“아니, 이 발로 적을 만나면 어떻게 쫓아가? 이 난리를 치는 걸 보면 무조건 무림인일 텐데, 쫓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겠네.”
“그거야 윗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알아서 할 일은 무슨? 놓치면 잘려 나가는 건 우리 목이겠지.”
불만으로 가득한 병사의 투덜거림에 옆에서 함께 발을 식히던 동료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런 걱정을 하는 건 비단 옆에 있는 동료만이 아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정찰에 실수해서 뚫리는 순간, 책임자는 욕을 먹고 실무자는 목이 잘리는 것이 이 나라 군대의 현실 아니던가.
더럽고 치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항의하면 그땐 확실하게 목이 날아갈 테니까.
제발 적들이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오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그게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쌓여 가는 불안감을 억지로 삼킨 병사는 발을 말리며 휴식을 취했다.
“음?”
흘러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던 병사는 묘한 느낌에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저쪽에서 뭔가 움직이지 않았나?”
“토끼라도 있나 보지.”
“토끼치고는 수풀이 크게 움직인 것 같았는데…….”
“그럼 바람 아닌가? 아, 난 몰라. 못 움직여.”
드러누운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동료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병사는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다가 순간 멈칫했다.
만약 적이라면?
들키면 공격해 올 테고, 그럼 자신은 죽겠지?
그런데 여기서 무시하면?
적이 정확하게 어디를 통과해 지나갔는지 확신하지 못할 테니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 들짐승이겠지, 뭐.”
무엇보다 적이라는 증거도 딱히 없지 않은가?
억지로 합리화한 병사는 찝찝한 마음을 털어 내고 등을 바닥에 붙였다.
이대로.
“시원하네.”
바람이나 쐬면서 시간을 보내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았다.
* * *
‘미안하네.’
‘괜찮아요.’
‘역시 순찰이 끝난 뒤의 틈을 노리길 잘했네요.’
‘저 병사는 머리가 잘 돌아가서 멈춘 것 같긴 하지만.’
병사들이 머물고 있는 야영지의 지척.
연화의 술법으로 기척을 감춘 일행은 은밀하게 산을 넘고 있었다.
조금 전엔 살짝 균형을 잃은 운주 때문에 기척이 드러나긴 했지만,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산을 돌아다니는 강도 높은 순찰을 끝낸 병사들은 지친 나머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껏 늘어져 불어 터진 발을 바람에 말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해서 그들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여러모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럼 계속 가죠.’
‘부탁할게.’
연화의 술법을 이용해 움직이는 일행은 소윤혜, 주현운, 문율, 설란, 유예린, 연화 그리고 운주였다.
기다리느냐, 움직이느냐.
설란이 제시한 선택지에서 운주는 움직이는 것을 택했고, 그 결과 병력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잠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병력을 움직인 이유에는 천라지망에 구멍을 뚫는 것뿐만 아니라 황궁에 몰려 있는 병력을 흩트려 놓으려는 것도 있었으니까.
황궁의 지척까지 접근한 후 황보중이 이끄는 병력을 기다려도 늦지 않았다.
그들 병력을 상황에 맞춰 유리하게 써먹으려면 적의 정보를 상세하게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운주는 가만히 기다린다는 선택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병력의 연락을 기다리고, 그들이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병력과 병력의 충돌로 이어진다.
즉, 다량의 희생자가 나오는 전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전투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운주는 움직이기로 마음먹었고,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호위인 형왕까지 천진항에 두고 왔다.
자신을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일행을 바라보며, 운주는 하나 남은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목적은 놈들에게서 황궁을 되찾고, 이 나라를 위협하는 놈들을 밀어내는 것.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방관하다 못해 장려하고 있는 탐욕스런 돼지들의 목을 잘라 효수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나라로 바로 세우는 것.
최소한의 피를 흘리고 이 세상을 바로잡는 것.
‘과인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옥으로 발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