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555화-천진항 (3)
파바박!
무시무시한 기세로 솟구치는 촉수들 사이를 달린 청랑은 거의 동선을 틀지 않고 직진하듯이 내달렸다.
솟구치는 촉수들을 베어 넘기는 유예린과 설란 덕에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달려 나간 청랑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항구의 상공까지 도달했다.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문율을 이미 지나쳤고, 이제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는 항구의 모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황량함만이 남은 항구의 모습.
이 세상이 멸망하면 이런 모습일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항구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예린은 급격히 가까워지는 바닥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착지한 청랑이 주위를 살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끈질기네.”
바다에서 솟구친 촉수는 항구 위까지 따라와 그들을 덮쳤다.
베어 내고, 쳐 내고.
순식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하는 항구의 정경에 설란은 오히려 안도했다.
만약 이곳이 영역이 아니라 실제 항구였다면, 피하거나 흘리는 선택지는 없었을 테니까.
심지어 베어 낸다고 하더라도 주변의 피해를 고려하면 그 선택의 폭이 매우 좁았을 거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에 안도하는 설란과 달리, 유예린은 온 신경을 촉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괴이라고 해도 그 형태는 자연의 것을 본뜬 경우가 많다.
바다에서 촉수를 이렇게 뻗는 동물은 몇 종류 있지만, 다리의 개수가 이렇게 많은 건…….
역시 팔초어(八稍魚)가 가장 유력하다.
문제는 팔초어는 이름 그대로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것인데, 지금까지 베어 낸 다리의 개수만 해도 열이 넘는다.
설란이 베어 낸 것까지 합치면 더 하겠지.
그렇다면 다리의 개수가 과할 정도 많거나 아니면 재생하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괴이를 상대로 상식을 접목시키려 하지 마라.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유예린은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양손에 쥔 검을 세웠다.
촉수가 계속해서 올라온다면, 계속해서 베어 낸다.
너무 많아서 힘들어질 것 같으면, 단숨에 돌파해서 본체를 친다.
본체가 없는 거라면 퇴각한다.
깊게 생각해선 안 된다.
오로지 보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해 직관에 따라 움직인다.
그게 무인이 괴이를 상대할 때 취해야 할 기본이다.
상식에 사로잡혀 거짓된 약점을 찾지 말 것.
“언니.”
“왜 그러니?”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청랑의 등에서 내리는 유예린을 잠시 바라본 설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런다면 말리지 않으마.
게다가 자신보다 강한 올케이니 막는 것은 좋지 못했다.
그러니.
“부탁하마.”
“네.”
유예린에게 뒤를 맡긴 설란은 그대로 청랑을 타고 달렸다.
등 뒤에서 촉수들이 썰려 나가 그 파편이 항구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설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거니까.
그렇게 홀로 청랑의 뒤에 탄 설란은 청랑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이동하고 이동해서 항구에서 꽤 멀리 떨어진 장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청랑은 발을 멈췄다.
[컹!]
“여기니?”
[컹!]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청랑의 모습에 목덜미를 쓸어 준 설란은 조심스럽게 청랑의 등에서 내렸다.
“그럼 너만 믿으마.”
상대는 아마 높은 확률로 괴이.
자신보다는 청랑이 더 뛰어난 전력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설란은 청랑의 옆에 붙어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대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고요한 적막만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 적막을 희미한 발소리로 헤쳐 나가며 조심스럽게 장원으로 진입한 설란은 날카롭게 감각을 곤두세운 채 검을 쥐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설란이 정원의 바닥을 다진 돌을 밟은 순간.
철컥!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청랑이 움직였다.
단숨에 설란의 목덜미를 물어서 내달린 청랑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직후, 바닥에서 솟구치는 창.
“……이게 대체?”
장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에, 이젠 기관진식까지?
이게 과연 한 존재의 영역(靈域)이 맞나?
설천위라고 해도 영역을 펼칠 때 그 효과와 종류를 제한하거늘 대체 어떤 괴물이기에 이런 다재다능한 대처가 가능한 거지?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 공격에 입술을 깨문 설란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냉철함을 장점으로 초생단의 부단주 자리를 지켜 온 자신이다.
이럴 때 장점을 살리지 않으면 언제 살리겠는가.
“부탁하마.”
[컹!]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설란은 청랑의 등에 엎드리듯이 바짝 붙어서 허공을 걷는 청랑을 따라 움직였다.
넓은 정원을 지나 가장 먼저 나온 건물에 도착한 순간.
파바바박!
“흡!”
문을 뚫고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설란은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청랑의 앞으로 검막을 만들어 낸 설란은 쏟아지는 화살을 다 쳐 낸 뒤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밟아서 움직이는 게 아닌 것 같구나.”
진짜 기관진식은 무게가 더해지는 것으로 발동하지만, 괴이가 만들어 낸 기관진식은 그런 흉내만 냈을 뿐 누군가가 그곳에 진입한 것만으로도 발동하는 건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설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청랑의 뒤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밟아서 발동하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청랑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게 맞았다.
“위험해지면 위로 뛰어오르거라. 네 꼬리를 붙잡고 따라가마.”
[컹!]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한 설란은 알았다는 듯 짖는 청랑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실내.
설란이 걷는 발소리만이 희미하게 퍼지는 그곳에서 설란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가슴이…….’
답답하다.
다만, 그 답답함의 종류가 달랐다.
이건 압박감이 아니라…….
‘슬픔?’
감정의 영역에서 가슴이 답답했다.
정말로 슬프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죽음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기이한 감각에 의아해하면서도 설란은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나아갔다.
몇 번이나 기관진식을 흉내 낸 함정에 위기를 겪었지만, 청랑의 도움과 설란의 능숙한 대응으로 별다른 상처 없이 둘은 가장 깊숙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쿵! 쿵! 쿵!
큼지막한 문 앞에 선 설란은 심장이 마구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감정이 격해진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이곳이 단순한 부자의 장원이 아니라 관청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런 관청 중에서도 가장 깊고 넓은 건물.
즉, 재판이 행해지는 재판정이다.
그곳의 문 앞에서 이토록 가슴이 뛴다는 것.
“……후우우.”
호흡을 토해 내며 문고리를 붙잡은 설란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까득.
그 안에 펼쳐진 풍경에 설란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몇 개씩 존재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가장 큰 웅덩이에 소년과 청년 사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알몸이었으나, 그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안쓰러움.
붉은 피로 일렁이는 그 육체는 명백히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억지로 이어 붙인 듯 비틀려 있는 형체는 그것이 정상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혈교의 혈귀. 아니, 그것조차 아닌 무언가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인간성을 버린 존재들이 만들어 낸 악몽이다.
이 존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그것을 가늠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순간 어지러워지는 정신에 설란의 몸이 휘청거렸다.
[컹! 컹!]
다급하게 짖는 청랑의 울음소리에 설란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매몰되어 무너질 뻔하다니.
이게 무슨 추태…….
“설마……!”
순간, 연화의 상태가 떠오른 설란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만약 이것이 영력에 의해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거라면?
이 영역에 들어온 순간, 이 안에서 생성되는 모든 감정이 연화에게 집중된 거라면?
예상치 못한 감정의 해일에 연화가 무너지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연화라서 쓰러지는 것 정도에 그쳤지 다른 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설란은 또 다른 가정에 도달했다.
‘없을 수가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자아가 없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정확하게 연화에게만 힘을 집중할 수 있었을까?
아니,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판단을 내릴 이유가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
이 괴물도.
바다에서 날뛰는 괴이도.
공간 전체를 집어삼킨 영역도.
그렇다면.
“여길 정리하면 나오지 않을 수 없겠지.”
들고 있던 검에 검기를 두른 설란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가슴에서 계속해서 끓어오르는 슬픔의 감정을 끊어 내고, 단장(斷腸)의 고통을 감내하며 검을 휘둘렀다.
감정을 죽이고 눈 앞에 펼쳐진 참극에 결말을 맺어 주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피의 웅덩이가 망가지고,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아이들의 시체가 청랑의 화염에 불타 재가 된다.
베고, 태우고.
그것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 설란은 이내 그 끝에 도달했다.
“……정신병자들.”
어디선가 숨어서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이곳을 절반 이상 무너트려도 나타나지 않음에 품었던 의문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피의 웅덩이에 잠겨 있는 괴물의 아래.
스스로 팔을 끊어 그 괴물과 이어져 있던 인간이 피 웅덩이 속에서 눈을 떴다.
“네놈들은 실패할 것이다.”
갈라진 목소리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란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검 끝이 자신의 심장을 향한 것을 보고도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는 사내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지옥은 끝나지 않는다.”
“아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끝날 거다.”
조소를 품은 그 한마디에 설란은 망설임 없이 검을 꽂았다.
심장이 꿰뚫려 사내의 숨이 끊어진다.
이윽고 괴물의 목마저 베어 내고, 청랑의 화염으로 태워 버린 설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자.”
적의 중심을 처리했으니 이 문제는 금세 해결될 거다.
상대는 그 자신이 죽어도 이 공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그 아이만 깨어나면, 금세 해결될 일이지.”
* * *
천진항.
물류의 이동으로 북적거리는 항구.
본래라면 활기로 가득 찼어야 할 항구였지만, 사실 근래 천진항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계속 늘어나는 실종자, 연이어 들리는 좋지 않은 소문.
이제는 집 안에 가만히 있던 자들도 실종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바닷사람이라며 호탕하게 외치던 어부들마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일을 나와서 최대한 빠르게 할 일을 마치고 재빨리 귀가하는 하루하루.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따라가기는커녕 함께 밥을 먹지도 않는 삭막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어서 천진항은 북적거리지만,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은 항구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생업을 이어 나가던 어느 날.
쿵!!
“뭐, 뭐야?!”
“갑자기 배가!”
“해신이 노하셨다!”
“망령들의 배가 항구에 도달했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아아, 천지신명이시여!”
갑작스레 항구에 나타난 배에 모두가 놀라 혼란에 빠진 상황.
공포에 질린 이들이 아우성을 떨던 그때.
쿵!!
“히이익!”
허공에서 떨어진 거대한 장수와 그 장수의 몸을 밟고 선 청년의 등장에 기어코 기절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그리고.
“육백팔십이까지 버텼나. 나쁘지 않네.”
지친 기색임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문율의 중얼거림에 깃든 은은한 살기에 몇 사람이 더 기절하고 말았다.
“문율, 민간인들 사이에서 살기를 뿜지 마세요.”
그런 문율을, 흐트러짐이라곤 없는 자세로 다그친 유예린이 항구에 나타난 배를 향해 걸어갔다.
유예린이 배에 거의 도착할 때쯤.
“찢어 버렸지!”
“하하하하! 재미있었어!”
“나는 별로 재미없었어.”
소리치는 연화, 웃는 주현운, 한숨을 내쉬는 소윤혜를 발견한 유예린은 그만 고개를 저었다.
“언니 말대로 금방 해결됐네요.”
“내 동생이 인정한 재능이니까.”
그런 유예린의 뒤를 따라 나타난 설란은 피식 웃으며 배 위에서 손을 흔드는 연화를 바라봤다.
“내 동생 정도의 재능이라면, 이런 영역쯤이야 일도 아닌 게 당연하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