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5화
554화-천진항 (2)
곧게 치솟은 죽음의 일격이 거한을 꿰뚫었지만,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 위에 아무도 없었다.
“문율!”
“웬일이야?”
“이번엔 양보하마!”
“좋지~.”
배의 선두.
스스로 발판을 자처하는 주현운의 모습에 느긋하게 웃은 문율은 주현운이 내민 손을 발판으로 삼아 그대로 위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거한이 있는 높이까지 올라간 문율은 허공에 뜬 상태로 몸을 흔들었다.
마치 파도에 몸을 맡기듯이.
바람에 몸을 맡긴다.
“된다.”
자연스럽게 몸을 가누는 데 성공한 문율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기이하군.]
그런 문율의 검을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언월도로 막아 낸 거한은 가만히 상대를 바라봤다.
[무인인가? 기이한 기술을 쓰는군.]
“아, 이거요? 전에 어떤 누님을 보고 배운 건데, 괜찮죠?”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순 없었지만, 허공에 떠 있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다만, 보통 느리게 움직이는 경우 아예 허공에 떠오르지 않는 것만 못하지만…….
캉! 캉! 캉!
“성격이 급하시네요.”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쳐 낸 문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검을 까딱였다.
느려서 손쉬운 표적이 된다?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막아 낼 능력이 된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주현운 대신 거한 앞에 선 문율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움직임으로 거한의 공격을 전부 받아 냈다.
쾅! 쾅!
점점 거칠어지는 공격에 폭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문율은 여전히 평온을 잃지 않고 공격을 받아 냈다.
그리고 그사이 배는 점점 항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가면 속에서 눈동자 대신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일그러졌다.
[귀찮게 하는군.]
“제가 할 일을 하는 거죠. 어쩔 수 있나요.”
[어린 나이에 경악스러울 정도의 성취다.]
“헤헤, 칭찬 고맙네요.”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이 인간,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가?
대화가 썩 잘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문율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거한의 몸에서 기세가 폭발적으로 솟구치고 죽음을 담은 것 같은 기운이 일렁였지만, 문율은 더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아, 이거.”
[처음에도 말했을 것이다.]
미소 짓는 문율을 겨눈 언월도의 끝이 푸른 화염으로 일렁인다.
[시간을 끌지 않을 거라고.]
선언과 동시에 일렁이는 화염이 참격이 되어 문율을 덮친다.
여태까지 창을 휘둘러 공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품은 참격에 문율의 몸을 띄우던 바람이 흔들리며 그 균형이 위태로워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식간에 다가온 위협적인 죽음을 코앞에 두고, 문율은 짙어졌던 미소를 터트렸다.
“더 이상은 무리네요. 무해 대사.”
비틀린 미소가 섞인 중얼거림과 동시에, 문율을 휘감은 바람이 변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닮아 색이 변한 것처럼 검게 물들었고.
콰가가가가각!!
칠흑의 바람을 휘감은 검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화염의 참격을 막아 내고 베어 냈다.
[……네놈?]
그 전진이 막히다 못해 끝내 반으로 갈라진 참격의 뒤로 놀란 거한이 물음을 토했지만, 문율은 거기에 답해 줄 마음이 없었다.
참는 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제 끝났으니까.
광기 어린 웃음이 바다가 떠나가라 울리고, 이제는 완전히 칠흑으로 물든 바람을 휘감은 문율이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한 걸음.
어느새 허공으로 검을 집어 던지고, 비어 버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한다.
짝!
스님들이 보면 예의가 없다고 할 정도로 강한 소리를 내는 합장과 동시에.
허공을 회전하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가볍게 십수(十手)부터 시작하지.”
완전히 분위기가 바뀐 문율이 날카로운 눈매로 합장한 손을 풀었다.
한 손은 허리춤에, 한 손은 앞으로 내밀어 검지와 엄지로 원을 그리는 수인을.
부처의 그것과 같은 행동을 취하는 문율의 동작이 끝나는 순간.
[흐읍!]
단숨에 원월도를 휘두른 거한은 자신의 앞을 가로지른 참격에 눈을 부릅떴다.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의문도 잠시.
허공에 정지했던 검을 떠올린 거한은 그제야 이 일격이 어떻게 나왔는지 깨달았다.
뒤이어 허공에 흩어지는 검은 연기와 바다를 향해 떨어지는 검을 보고, 그것이 일회성 공격임을 파악한 거한은 단숨에 자세를 고쳤다.
십수(十手)라고 했다.
그렇단 말은 열 번의 공격이 온다는 소리.
검을 놓친 뒤에 올 공격은 뻔하다.
주먹, 아니면 발차기.
단숨에 호흡을 정한 거한이 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준비하는 그 순간.
콰득!
어깨를 가른 도가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순간, 거한은 이젠 적도 숨기기를 포기했는지 완연하게 드러난 적의 공격 수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놈……?]
천수관음이라.
천 개의 손을 가진 부처처럼 등 뒤에서 연기로 된 손이 뻗어 나온 문율은 수인을 맺은 상태 그대로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해 대사의 수업을 너무 들어서 이런 형태로 굳어 버렸지. 뭐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고 있지만.”
좀 전까지의 둥글둥글하고 예의 바른 태도 따위 완전히 사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신랄한 말투만 남은 문율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신은 몇 수까지 버틸까?”
어느새 떨어지던 검을 쥐고 올라온 연기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참격을 날린다.
다급하게 그 공격을 막아 낸 거한이 뒤로 밀리는 순간, 연기로 만든 비수가 거한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치밀할 정도로 잘 짜여진 공격.
마치 여러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한 공격은 통상의 합격술을 아득히 뛰어넘은 위력을 자랑했다.
왜냐고?
지금 적은 손만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몸이 없으니 서로에게 방해될 동선은 거의 없었고, 그 결과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생겨나 적을 압박했다.
이기어검의 장점을 모아 만든 것 같은 기이한 합격술.
인간이 다룬다는 단점을 없애고, 무기만을 남기고 적을 섬멸하는 부처의 격노.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자비를 상징하는 천수(千手)에 살의만을 담아 완성된 절학.
완성된 것을 목도한 무해가 몰래 곡주를 마시며 한탄했던 문율의 독문절학.
[천수천살(千手千殺)]
광대무변의 살의가 거한을 압박했다.
* * *
“안 좋은 것만 보고 배워서는…….”
지독한 살의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며 혀를 찬 소윤혜는 무난하게 적을 압박하는 문율의 모습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애초에 신경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전력으로 밖으로 향하던 배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얼기설기 보강해서 쓰던 돛은 잠잠했고, 이를 악물고 밀던 주현운마저 손을 뗐다.
무엇보다.
“흐윽! 윽!”
과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연화의 모습은 명백히 이상했다.
거기다 문율의 전투를 더하면, 하나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영역을 만든 존재가 저 장수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이네요.”
유예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기습에 다급히 배를 뒤로 뺐지만, 적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에는 실패했다.
완전히 붙잡혔다는 증거다.
적의 손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영역을 펼친 존재가 문율 하나에게 저렇게 막힌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아무리 흑암지규군과의 싸움 이후로 특훈을 거쳐서 강해졌다고 해도 문율의 강함엔 한계가 명확했다.
“술사만 큰 타격을 입은 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네. 아무래도 거기에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 같은데…….”
설란의 말에 유예린과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주의 품에 안긴 연화가 끙끙대고 있고, 그런 둘을 지키기 위해 고 호위도 그쪽에 붙어 있는 상황에서 지금 움직일 만한 병력은 자신들이 고작이다.
“일단 가로막고 있는 벽을 베어 보자. 영역이라고 하지만, 물리적인 제약을 가하는 결계야. 힘을 가하면 뚫을 수도 있어.”
“시도해 보는 게 좋겠네요.”
설란의 말에 동의한 이들은 둘로 나뉘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배를 지키는 설란과 유예린.
결계를 베는 데 집중하는 소윤혜와 주현운.
그렇게 역할을 나눈 일행은 빠르게 흩어졌다.
기본 병력들은 남아서 운주와 쓰러진 연화를 호위하기로 했다.
“……이건 좋지 않은데요.”
돛대 위로 올라간 유예린은 주위를 살펴보고, 사람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항구의 모습을 확인했다.
“확실히 그러네.”
유예린의 말에 반대쪽에서 함께 상황을 살피던 설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항구 쪽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완전히 별개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저 항구까지 적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무인이 아니라면 그 끝을 제대로 보기도 힘들 정도로 넓은 공간이 적의 영역이라는 소리다.
이만한 공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적이 얼마나 강할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였다.
문율이 허공에 떠 있는 저 장수를 쓰러트리고 난 뒤에 항구에 접근해서 수색을 한다고 해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런 공간을 해체하고 분석해야 할 연화가 쓰러져 있으니까.
“아무래도 연화를 노리고 먼저 쓰러트린 것 같네.”
“그런 것 같군요.”
이대로 가면, 설령 저 장수를 쓰러트린다고 할지라도 이곳에 발이 묶이고 만다.
적이 얼마나 이 영역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지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병력들과 약속이 완전히 틀어지는 순간, 계획에 크나큰 차질이 빚어진다.
그리고.
“……배신자를 찾기엔 늦었겠지?”
“아마 창읍에 남은 자들 중에 있겠죠.”
“하아, 전부 단속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정보가 줄줄 샐 줄이야.”
아예 대놓고 시간을 끄는 이런 방식은 적이 이쪽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전략이다.
저 장수는 그럴 필요 없이 자신이 전부 쓸어버릴 작정이었던 것 같지만, 문율이 충분히 그를 상대하고 있는 걸 보면 단순한 오만이었던 것 같고.
진짜 문제는 숨어서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다.
유일한 술사를 단숨에 쓰러트리고, 대놓고 시간을 끌려고 작정한 녀석의 계획을 어떻게 분쇄해야…….
유예린과 설란이 고민에 빠진 사이, 소윤혜와 주현운이 결계를 공격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굉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 딱 봐도 보통이 아닌 수법을 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만약 결계가 뚫렸다면 바로 소리쳐서 알려 왔을 터.
두 사람의 공격으로도 특별한 수확이 없음을 짐작한 유예린의 고민이 깊어지는 그 순간.
[왕!]
유예린의 가슴 사이에서 튀어나온 청랑이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거렸다.
“위험하니 들어가 있으렴.”
[왕!]
가볍게 머리를 누르는 유예린의 손길에 싫다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든 청랑은 앞발을 움직여 기어코 유예린의 가슴팍에서 뛰쳐나왔다.
“위험하잖니!”
[왕!]
날카롭게 발톱을 세워 돛대에 매달린 채 손을 뻗는 유예린의 손길을 피해 돛대 위에 선 청랑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냄새를 맡던 청랑은 무언가를 찾았다는 듯 항구 쪽을 바라보며 격렬하게 짖기 시작했다.
[컹! 컹!]
“아무래도 찾은 모양이네요.”
“연화를 대신해서 찾아 주려는 거구나. 그럼 배를 돌려서 항구로 붙어야겠…….”
[컹!]
배를 돌리겠다는 설란의 말에 우렁차게 짖은 청랑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기겁한 유예린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화르르륵!
순백의 화염에 휩싸인 청랑의 몸이 단숨에 거대해지더니 네발에 화염을 휘감은 거대한 늑대로 화했다.
[크르르르르.]
귀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늠름하다 못해 위압적인 늑대의 모습이 된 청랑은 허공을 밟고 서서 꼬리로 유예린과 설란을 휘감아 자신의 등에 태웠다.
“……너 이렇게 커질 수 있었니?”
[컹!]
늠름해진 외형으로 또랑또랑하게 눈을 빛내는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예린은 작게 웃으며 청랑의 털을 붙잡았다.
“그럼 부탁하마. 안내해 주렴.”
[컹!]
유예린과 설란을 태운 청랑은 단숨에 허공을 박차 항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파바박!
자신의 위치가 들켰음을 직감한 것일까.
바다에서 솟구친 촉수들이 청랑을 덮쳤고.
“멈추지 말고 달리렴.”
청랑의 등 뒤에서 검을 뽑은 두 여인의 손에 치솟은 촉수들이 토막이 난 채 다시 바다를 향해 낙하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기오오오오오오오!!
바다에서 치솟은 수백의 촉수들이 본격적으로 청랑을 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