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4화
553화-천진항 (1)
혈주를 짓밟아 그 머리를 부순 설천위는 발밑에서 스멀스멀 형체를 찾아가는 혈주의 모습에 혀를 찼다.
“더럽게 질기네.”
“흐하하하! 죽지 않지. 이미 죽은 몸이니까.”
“너, 어째 밖에서 봤을 때보다 웃음이 늘었다?”
“나는 본래 웃음이 많은 존재일세. 생명에서 태어났으니까.”
피는 고대로부터 곧 생명이니.
혈주는 생명의 원천에서 태어난 존재다.
본디 선신(善神)에 가까웠던 혈주가 연옥에 처박히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허나, 피는 곧 공포가 되었고 나 또한 그렇게 됐지.”
몸에 가득 찬 생명의 근원인 피는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가 된다.
피를 많이 흘린 자는 죽는다.
그것은 공포로 이어졌고,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혈주라는 존재는 변해 갔다.
생명에서 태어나서 생명을 꺼트리는 존재로.
선하면서도 악한 존재로.
누군가의 생명을 지탱하는 존재이자,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존재.
그리고.
“인간의 악의는 피마저 검게 물들이지.”
완전하게 자아를 깨닫는 순간, 혈주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대지에 스며든 검은 피였다.
인간에 의해 검어진, 생명의 근원.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죽음을 안긴 피는 대지에 스며들어 말라비틀어지면서 검게 변했다.
시간과 함께 그것은 악취를 동반했고, 죽음의 신호가 됐다.
피는 본디 붉어야 하는 것.
그것이 검게 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증거가 되니.
“사라져야 할 것은 인간이다.”
육식을 하는 짐승은 그 피마저 먹는다.
자신의 삶을 이어 가기 위해 먹어 치운 피는 새로운 육체에 흡수되어 여전히 붉은색으로 순환한다.
하지만, 욕망에 물든 인간이 흘리는 피는 순환하지 않는다.
대지에, 그리고 강에 흘러 들어갈 뿐.
그 끝에 남는 것은 검게 변해버린 죽음과 악취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부자연스러운 존재다. 생명조차 검게 물들이는 세상의 악이지.”
혈주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지우고자 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다른 자들과 협력했다.
언여휘와도.
피로 세상을 물들이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미친 인간 놈이랑도.
연옥에서 빠져나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괴물들과도.
그래서 손을 잡았다.
인간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서.
그렇기에.
“너를 집어삼킬 생각 따윈 없다.”
설천위와도 손을 잡을 생각이다.
그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생각이다.
설령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쿵! 쿵!
설천위의 몸에 달라붙었던 붉은 피가 맥동하고.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라. 설천위.”
설천위를 감싼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와 전쟁, 그리고 참혹하게 망가진 세상을 담은 과거로.
* * *
[이게 무슨…….]
밖에서 설천위를 지켜보던 천마와 신의는 완전히 단절된 설천위의 상태에 당황했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허허, 뭔가 조치를 취했나 보군.]
[쉽게 당할 녀석은 아니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설천위를 감쌌던 붉은 막이 사라지고, 평온한 표정으로 운기조식을 하는 설천위를 확인한 둘은 안도했다.
혈주의 힘이 느껴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설천위가 전에 흡수한 혈주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일이 떠올라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잘 해결된 모양이다.
[괜찮은 건가?]
[음, 괜찮을 걸세. 기운도 상당히 안정되고 있고, 문제는 없을 걸세.]
[다행이군.]
안도하는 백호를 보며 웃어 준 천마는 연결이 막힌 것을 느끼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몰아(沒我)에 들어간 것 같군. 한동안 이대로 두면 금세 약의 흡수를 끝내고 일어날 걸세. 그나저나 아쉽군. 골격이 좀 변하긴 했지만, 환골탈태까진 가지 못한 모양이야.]
[환골탈태가 쉬운 일이 아니죠.]
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의는 조심스럽게 설천위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도, 호흡도 문제가 없어 보이니 일단 이대로 두는 게 좋겠습니다.]
신의마저 기다리기로 마음먹자, 남은 이들은 얌전히 설천위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은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순식간에 흘러갔다.
* * *
“……후, 쉽지 않군.”
요 며칠, 배 위에 있었던 운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루에 절반 정도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배의 속도도 그렇지만, 그런 배를 기어코 쫓아와 달라붙는 적들의 지독함에 그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치열한 하루하루……라고 하기에는 배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강해서 별 무리 없이 적들을 처리했기에 딱히 위기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오늘만 몇 번 습격이 있었지?”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한 세 번 정도 있었지?”
운주의 물음에 그 옆에서 부적을 그리고 있던 연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니, 네 번이었나? 너무 자주여서 헷갈리네.”
너무 습격이 잦아서 그 횟수가 헷갈릴 정도인데, 그에 반해 목소리는 너무 태연한 거 아닌가.
연화의 여유로운 태도에 피식 웃어 버린 운주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뛰어난 이들이 지켜 주니 마음이 든든하군.”
“뭐, 그렇지. 무림맹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강자들이니까.”
“그럼 연 누이도 이름을 날렸소?”
“나? 나는 아직 신입이라……. 헤헤, 아직 별로?”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소리를 하는 연화였지만, 딱히 무림맹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운주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패력단에서 준비한 술사들을 마치 개 패듯이 팼던 연화였지만, 가해자는 기억을 못 한다고 그녀는 자신이 무림맹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최소 화경이라고 소문이 도는 흑룡단의 부단주를 술사가 맡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뭐, 천천히 일을 해결하다 보면 명성이야 저절로 따라오겠지!”
그녀는 그런 건 아예 몰랐다.
애초에 흑룡단에 있을 때도 수련만 했으니까.
연화는 술사로서 아득히 격이 높은 설천위가 옆에서 닦달하는데도 수련을 빼먹고 놀러 다닐 정도로 요령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음, 그렇군. 배의 속도를 보면 때가 된 것 같은데…….”
무려, 화경급 고수가 직접 배를 밀어 속도를 냈다.
며칠간 반복하면서 두 고수의 볼이 쏙 들어갔지만, 그 덕분에 속도만큼은 확실했다.
애초에 도착이 예정된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니, 슬슬 때가…….
“보고드립니다! 목적지인 항구가 보이니 하선을 준비하라는 전언입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치는 선원의 목소리에 연화는 쭉 기지개를 켰다.
“어우! 드디어 나가네! 찌뿌둥해라~. 다들 싸우는데 나는 안 껴 줘서 나만 심심했네.”
“누이는 내려서부터 할 게 많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야 그렇지만…….”
다들 적들이랑 싸우는데 가만히 있는 건 은근히 고역이란 말이지.
운주와 함께 배 위로 올라온 연화는 저 멀리 보이는 천진항(天津港)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화려하네!”
“북경의 바로 아래에 있는 도시와 이어진 항구이니 꽤나 번성한 곳이지.”
어떤 의미로 북경만큼이나 발달한 도시였다.
워낙 많은 물류와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놀거리도, 먹을거리도 풍부한 도시이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정보를 떠올리며 운주가 설명하고, 연화가 감탄하는 동안.
배가 항구에 다가섰고, 그 순간.
키이이이이잉!
“흑!”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은 연화가 몸을 비틀었다.
“연화!!”
다급하게 달려든 운주가 연화를 끌어안았지만, 연화는 그런 운주를 밀어냈다.
“배! 멈……! 멈!!”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는 연화의 모습에 그 즉시 의도를 알아차린 운주는 연화를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배를 멈춰라!!”
한 손으로 연화를 들어 올린 채 거칠게 내지른 운주의 외침에 배에서 두 사람이 뛰어올랐다.
단숨에 선미로 튀어나와서 바다로 뛰어내린 주현운과 문율이 그대로 배를 가로막았다.
그그그그그긍!!
육중한 배가 강제로 멈추면서 나는 아찔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전원 경계하라!!”
설란의 외침과 동시에 모든 전력이 일제히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무기를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한다.
그리고 그 순간, 괴리를 눈치챈 유예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영역(靈域)……!”
분명 멀리서 봤을 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항구에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리고.
“……위!”
힘겹게 중얼거린 연화의 목소리는 집중하고 있던 이들 전원의 귀에 전달됐다.
즉각 반응한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과연, 감이 좋은 술사가 있다는 정보는 사실이었나?]
하늘 위, 전체적으로 초록색에 금빛 장식이 들어간 갑주를 입은 거한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에서 펄럭이는 붉은 망토에 수 놓인 금색의 글씨가 그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존재인지를 증명했다.
금(錦).
그것은 금의위(錦衣衛)를 상징하는 표식이자 그가 황제의 직속으로 일하던 자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역겨운 피의 냄새가 나는구나.]
인왕의 얼굴을 본떠 만든 초록색의 가면 뒤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이 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증거이며.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알아차릴 새도 없이 허공에서 만들어 낸 창을 손에 쥐고 정확하게 운주를 겨냥하는 그 태도는 그의 목표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예상했지만, 너무 빨라……!’
적들이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온갖 전력을 투입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빨랐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은 예상했던 범주가 아니었다.
이쪽의 정보를 알아냈다면 황궁의 귀족들을 움직여서 정치적으로 이쪽을 압박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세워서 왔는데…….
‘초장부터 이런 악귀를 항구에 보내다니……!’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한창 황궁 안의 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이 정도로 강한 존재를 항구로 내보낸다고?
이 배에 탄 인물이 황제라는 확신이 있다고 해도 의아할 정도로 과감한 일 처리다.
거기다.
‘연화의 저 반응, 명백하게 이상해……!’
운주의 품에 안긴 연화의 상태를 확인한 유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술사의 실력이 뛰어날수록 영력의 수준에 민감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저항력 또한 커지는 법이다.
만약 연화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면, 다른 이들도 이상을 호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연화만 저렇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즉,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확신한 유예린은 설란과 눈을 마주쳤고, 비슷하게 상황을 파악한 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퇴각 준비!”
가장 시급한 것은 적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
자신들이 갇힌 이 영역이 하늘에 떠 있는 저 거한의 것인지도 모르는 지금, 일단 퇴각해서 상태를 재정비하고 다시 기회를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설란이 퇴각 명령을 내리자마자 갑자기 하늘이 울렸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고.
콰가가가강!!
말 그대로 벼락이 꽂히듯 창이 꽂혔다.
배를 그대로 양단해 버릴 기세로 꽂히는 창.
푸른 뇌전을 휘감은 창이 연화와 운주를 깔끔하게 태워 버린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뜩이고.
“묵직하네요.”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탄 창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바닷물에 젖었던 바지가 깔끔하게 마른 것을 보고 감탄한 문율은 검을 늘어트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안 내려올 건가요?”
순박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한 문율은 대답이 없는 상대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가 가죠.”
[참수(斬首) 개(改) 제2식 직참(直斬)]
장난스러운 문율의 목소리와 함께 배의 후미에서 죽음의 일격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