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3화
552화-영약 (7)
“후우.”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설천위는 허공에 떠올랐던 몸을 천천히 낙하시켰다.
[언제 봐도 신기한 묘기구나.]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이것 정도지만.”
백호의 감탄에 피식 웃으며 대답한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약해졌던 중력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약간이지만 무거워진다.
조금 전, 말 그대로 중력을 극도로 약화시켜 천천히 낙하했던 감촉을 떠올리며 설천위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중력을 다루는 건 꽤나 익숙해졌어.”
[중력?]
[익숙해진 수준이 아니라 그 정도면 통달했다고 봐도 충분하겠구나.]
백호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고, 천마는 설천위의 소박한 자기 평가에 혀를 내둘렀다.
기본적으로 천마가 만들어 낸 부유술은 대지가 만물을 끌어당기는 힘을 거스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그것을 상쇄하고 자연스럽게 벗어남으로써 숙달하는 것인데…….
‘시작부터 힘 자체에 개입할 줄이야.’
자연과 일치되는 경지에 올라야 겨우 가능한 짓을 배운 지 고작 보름 정도밖에 안 된 설천위가 해내고 있다는 건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설천위가 자만할까 봐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설천위는 지금 익히지 못한 다른 기술에 아쉬워했지만, 애초에 수십 년에 걸쳐 익혀야 하는 배움이다.
그중에 하나라도 이렇게 단기간에 익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천마가 속으로 감탄을 삼키며 설천위를 살피는 사이, 설천위는 그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거 제왕검형이랑 비슷한데…….’
물론 원리는 완전히 다르다.
제왕검형은 중검의 묘리를 공간으로 확장해 공간 전체에 무게를 더하는 방식이고, 지금 설천위가 하는 것은 중력 자체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내부의 존재가, 무게가 증가했다고 느끼는 결과는 같지만, 원리가 달랐다.
하지만, 설천위가 패기로 사람을 짓누르는 것보다는 제왕검형에 더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패기는 정신을 짓눌러 심리적으로 몸을 무겁게 만드는 것에 가까우니까.
패기는 상대방의 의지력에 따라 그 위력이 크게 변한다.
즉, 상위 악귀들을 상대로 패기의 압박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실제로 최근에 싸웠던 적들은 설천위의 패기에 눌렸던 적이 없었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패기를 뿌리지 않으면 적의 기세에 설천위가 눌릴 정도였으니 공격보다는 방어에 사용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거다.
여하튼, 영적인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기는 슬슬 약발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새롭게 얻은 방식은?
말 그대로 중력을 강화하는 방식이므로 그런 놈들에게도 통하지 않을까?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턱을 쓸던 설천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좋아. 다른 건 버려야겠네.”
[버려? 무엇을 말이냐?]
“천마 할배한테 배운 기술 중에 중력을 다루는 것 빼면 기본만 하려고요.”
대지를 다루고, 나무를 움직이고, 물을 솟구치게 하는 등등.
말 그대로 자연을 다루는 기술들이었지만, 설천위는 그것들은 기본 원리만 익히기로 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도를 닦아서 신선이 되는 게 아니라 빌어먹을 신들하고 싸우는 거니까.
놈들에게 통할 기술 하나 정도만 익히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자연을 익히는 것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들을 아우르는 깨달음을 놓칠 가능성이 컸다.
천마의 우려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전부 익힌다고 깨달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걸 모두 익혀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익히겠으나 그런 확신이 없다면 지금은 그런 곳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거든요.”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낸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무림이라는 곳이 워낙 땅덩이가 크고 느긋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들 하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황궁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할지 모르겠지만, 느긋하게만 움직였다간 되레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황보세가에 있는 이들도 움직임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이면 슬슬 행동을 취하기 시작할 시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아주 컸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연결도 선명하지 않아서 위험해요.”
몸은 거의 회복됐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지 연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뭐, 애초에 따로 떨어트려 놓은 녀석들은 전부 독립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라 괜찮지만.
문제는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자신을 불렀을 때 자신이 호응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전이문의 최대 장점은 순간적으로 공간을 뛰어넘는 것.
아무리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한 술법이라고 해도 이만한 거리라면 솔직히 부담스럽지 않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말 그대로 중원의 끝에서 끝으로 가는 거니까.
제아무리 설천위라고 해도 단박에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먼 거리다.
뭐 그렇다고 중간에 들르기에는 중간 지점에 기다리고 있는 이정표가 없으니 그것도 힘들고.
결국, 답은 중원의 끝과 끝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거다.
입은 상처도 완치시키는 건 물론이고,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흘러넘치고 있던 영력까지 완전히 다듬어야 한다.
그게 지금 설천위가 해야 할 일이다.
전이문을 넘어가서 주변에 피해 안 끼치고 아군을 도우려면 최소한 넘치는 힘은 제어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 준비의 시작은…….
[딱히 해가 될 만한 요소는 찾지 못했다. 먹는다고 해서 죽진 않을 거다.]
얼마 전에 구한 영약이다.
꼼꼼하게 영약을 살핀 신의의 보증에 설천위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험해지면 그냥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데 집중해.”
[알겠다.]
자진해서 호법을 맡아 주기로 한 백호가 동굴 앞을 지키고, 동굴 안에 자리를 잡은 설천위는 가부좌를 튼 채 영약을 손에 쥐었다.
“후우.”
하나뿐인 옷을 벗어서 구석에 잘 모셔 두고 속옷만 입은 상태인 설천위는 가볍게 호흡을 정리하고 단숨에 영약을 입에 넣었다.
씹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킨다.
꽤나 큰 크기 때문에 좀 버겁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삼킬 크기는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오오오오오오오!
공간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설천위의 배 속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녹기 시작한 영약의 기운이 그를 자극하면서 설천위를 중심으로 공간 전체가 울기 시작했다.
극한까지 단련된 설천위의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뼈와 근육이 비틀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이건?]
이변은 빠르게 찾아왔다.
설천위의 몸을 선홍색의 막이 휘감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혈주?]
설천위가 마지막에 먹어 치웠던, 혈주가 만들어 내던 것과 똑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 * *
“……이건 또 뭐야?”
영약을 흡수하는 일에 집중하던 설천위는 무의식을 파고든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자신의 내면세계.
혹은.
“네가 만든 곳이냐?”
그 내면 안에서 따로 둥지를 튼 존재의 세계.
붉은 피가 질척이는 대지 위에 선 설천위는 자신 앞에 선 존재를 마주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붉은색의 피부, 웬만한 남자라도 멈칫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 튼튼하게 전체를 감싼 근육.
하의만 입은 괴인은 긴 장발을 흩날리며 붉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인가, 설천위?”
“딱히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는데, 혈주.”
“바로 알아차려 주니 반갑군.”
“이 상황에서 날 이런 곳에 부를 인간……은 아니고, 존재는 너 정도밖에 없으니까.”
육체를 회복하고 영력을 기르는 데 집중하느라 내면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또 조용히 있길래 그냥 놔뒀더니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냐.
너무나도 은밀하게, 아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세계의 일부를 바꿔 버린 혈주의 행동에 설천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이런다고 뭐 안 달라진다. 백날 이래 봐야 의미 없어.”
“그건 모를 일이지. 아무리 네가 괴물 같은 자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다.”
설천위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혈주는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네 육체에 내 힘이 섞여 들어간 뒤에도 네가 나를 계속해서 부정할 수 있을까?”
내면세계에 이렇게 자리 잡은 나를?
그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혈주의 웃음에 설천위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얼마든지? 그리고 뭐 부정할 필요까지 있나?”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에 묻지도 않은 귀지를 털어 낸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 잡히는 도(刀).
“이 순간이 끝나면 둘 중 하나는 발아래서 기고 있을 텐데.”
“흐하하하하하하하하! 자신감이 넘치는군! 내면이라면 상대가 나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있다, 이건가?”
“아니? 밖에서 만났어도 자신 있었는데?”
혈주의 도발을 코웃음으로 넘긴 설천위는 단숨에 솟구치는 피로 된 송곳을 베어 버렸다.
“너 정도는 얼마든지 찢어 버릴 수 있지.”
“그런 조잡한 칼질로 말인가?”
베어진 송곳의 단면에서 또다시 솟구치는 송곳.
완벽하게 설천위의 눈을 노리고 파고든 송곳이 한 끗 차이로 고개를 비튼 설천위의 귀를 꿰뚫었다.
“칼질?”
구멍이 난 귀에서 피가 철철 흐름에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솟구치는 피의 송곳들을 베고 피하며 달려 나가는 설천위의 몸 곳곳에 상처가 늘었으나, 설천위는 그리 오래지 않아 혈주의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대로 혈주의 목을 베었다.
단숨에 잘려 나간 목이 허공에 떠오르고, 함께 잘린 장발의 머리카락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무리다. 그런 조잡한 칼질로는 백날 베어도 나를 베지 못한다.”
허공으로 떠오른 혈주의 머리가 설천위를 비웃었다.
피가 한 번 솟구쳐 설천위의 시야를 가리고, 바닥에서 솟구친 피 분수가 가라앉았을 때 혈주는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가슴을 활짝 편 혈주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칼로 벤대?”
손에 쥐고 있던 도가 파편이 되어 흩날리고, 혈주의 앞에 선 설천위는 가볍게 어깨를 돌리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헛짓거리를 해 놨어도 여긴 내 앞마당이야. 멋대로 담장을 쌓아 놓으면 안 되지.”
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주먹이 움직였다.
그대로 혈주의 턱을 날려 버린 설천위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끈적이는 피를 쥐어뜯었다.
마치 지옥의 망자들이 뻗는 손처럼 몸에 달라붙는 피가 질척이며 설천위의 몸을 좀먹는다.
“흐하하하! 괴물이구나! 괴물이야!”
호쾌하게 울리는 혈주의 웃음소리에 몸에 달라붙어 있던 것들을 거칠게 떼어 낸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알면 그만 깝치지?”
“아니, 그럴 수 없다. 내가 비록 떨어진 존재라고 하나, 내 숙원마저 버린 것은 아니니.”
쩌적!
하늘에 금이 간다.
붉은 하늘에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는 균열 사이로 검은 연기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인정하마. 네놈은 진정 괴물이다.”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
균열 너머로 터져 나오는 패융의 포효에 쩌렁쩌렁하게 공간 전체가 뒤흔들린다.
혈주가 만들어 낸 영역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영역이 포함된 곳조차 설천위의 내면세계.
설령 혈주가 설천위의 의식을 이곳에 붙잡아 둔다고 한들 설천위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기 시작한 자신의 영역을 보면서 혈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네 녀석의 발목을 지금 이곳에서 붙잡…….”
콰득!
“헛소리.”
혈주의 안면을 그대로 발바닥으로 찍어 버린 설천위는 단숨에 혈주의 위에 서서 그 얼굴을 바위에 처박았다.
“내가 밖에서 말하는 거 못 들었냐?”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
패융의 포효와 함께 무너져 떨어지는 피의 파편 속에서 설천위는 혈주의 머리를 짓이겼다.
“시간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