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552화 (552/624)

제552화

551화-영약 (6)

“그래서, 무슨 약인데?”

백호를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겨우 벗은 천마를 뒤로하고, 설천위는 제대로 약을 살폈다.

붉은색의 구슬처럼 생긴 외형.

겉이 워낙 반질반질해서 약이라고 듣지 못했다면, 구슬로 착각했을 듯한 외형이다.

인간이 이걸 삼켜도 되나 싶은데…….

[성능은 확실할 거다.]

“그래요?”

[사후에 이런 약을 만든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는데, 그때 들은 재료의 반만 넣었어도 성능이 확실하게 보장될 거다.]

천마의 보증에 설천위는 이번엔 백호를 바라봤다.

[네가 먹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썩어 갈 물건이다.]

자식인 백호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설천위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약을 집었다.

반질거리는 외형처럼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말 유리구슬을 만진 것 같은 느낌에 이걸 깨물어 먹어야 할지 아니면 꿀꺽 삼켜야 할지 고민됐지만, 결정은 빨랐다.

“있다가 먹지 뭐.”

나중에 천천히 살펴본 뒤에 먹지 뭐.

약을 품 안에 챙긴 설천위는 든든해진 가슴팍에 만족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약이 있을 정도면, 다른 물건도 있을 만하지 않나?

설천위는 귀찮아서 검도 안 들고 다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는 기물(奇物)이라고 불리는 물건들이 존재한다.

물질의 영역을 벗어난, 기이한 힘을 지닌 물건들.

게임에서는 당연히 장비로 표현되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 신을 죽이는 것이 목표인 육도의 세계에서 장비는 필수…… 가 아니었다.

애초에 기물(奇物)이란 것이 극히 희귀한 물건이기도 했고, 그중에서도 신(神)과 대적할 수 있는 물건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물을 파밍 할 시간에 적을 때려잡는 게 더 이득이었고, 대부분의 무기는 초반에 잡은 괴이의 부산물을 야장들이 다듬어서 만들었다.

신의 힘에 대적하기에는 신의 부산물이 단연 최고였으니까.

성능보다는 내구도에 집중한 결과였다.

즉, 구하기가 더럽게 힘들어서 그냥 튼튼한 무기로 만족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물이 별 쓸모가 없느냐?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술사들이 술법에 사용하는 물건들 전부가 하급이지만 기물의 일종이었고, 정말 드물게 얻을 수 있는 기물들 중에선 신검(神劍)이라 불러도 될 물건들도 있었으니까.

학관 시절에 설천위도 몇 번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허탕을 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최상급 기물의 획득이 어려운 건 그 랜덤성에 있었으니까.

어떤 회차에서는 사당에 있었고, 어떤 회차에서는 졸부의 창고에 있었고.

때에 따라 그 위치가 바뀌어서 획득이 어려운 것들이 태반인지라 깔끔하게 미련을 털어 냈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십만대산의 깊은 곳, 백호의 영역에 어떤 간 큰 도굴꾼이 찾아오겠는가.

이런 곳마저 기물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건 정말로 신의 농간이 아닐까.

슬쩍슬쩍 올라가는 기대감에 설천위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영력으로 훑어보고, 내공으로 살펴보고.

정말 모든 것을 총동원해 사당의 안을 샅샅이 수색한 설천위는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할배, 천마신교는 거지였어요?”

[그게 무슨 망발이냐! 나름 중원으로 상행도 가면서 꽤나 풍족하게 살았거늘!]

“그런데 왜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험지에서 살면 실리를 따지게 되는 법이니라.]

“실리를 따지는 인간들이 영약을 여기에 처박아 두고 까먹어요?!”

[어허! 처박아 두다니? 보관이라고 표현하거라.]

“그게 그거죠.”

아무것도 없는 내부에 한숨을 내뱉은 설천위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뭐 더 얻을 것도 없네.”

[그러지.]

백호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온 설천위는 창창하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기물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없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영약의 단단한 감촉에 설천위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든든하네.”

백호의 피라.

어떤 효과가 있을지 궁금한데?

* * *

영약을 손에 넣은 설천위는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먹진 않았다.

일단 영약을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다.

백호의 피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모를 일이니까.

약의 전문가인 신의가 충분히 약을 살피고, 그 성분을 조사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조사라고 해도 영력으로 천천히 살피는 것이지만.

천의무봉이라 이름 붙인 봉합술을 익힌 뒤로 영력을 다루는 것에 한층 더 능숙해진 신의이니 정확한 성분의 파악까진 힘들어도 약의 효능을 어느 정도 알아내는 것은 가능할 거다.

신의가 약을 분석하는 시간 동안 설천위는 다른 준비를 했다.

백호의 동굴에서 살짝 떨어진 공터.

그곳에 명주실 정도의 두께로 만든 기둥 위에 선 설천위는 엄지발가락 하나로 서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었다.

마치 철로 만든 기이한 형태의 조형물을 이용해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 놓은 예술품처럼.

가는 기둥 끝 위에 서서 무릎을 굽힌 채 기수식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은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도저히 취할 수 없는, 비현실의 결정체 같은 자세로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설천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느릿하게 등이 뒤로 넘어간다.

마치 발끝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그대로 뒤로 넘어간 설천위는 똑같은 자세 그대로 거꾸로 매달렸다.

기이한 자세에서, 이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겁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괴이한 자세가 된 설천위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옆으로 갔다가 반대로 갔다가.

기둥 위에 올린 엄지발가락을 중심으로 마치 거대한 구체를 만드는 것처럼 빙빙 도는 설천위는 기이할 정도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찍?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설천위를 찾으러 온 다람쥐가 공터를 밟는 그 순간.

설천위가 밟고 있던 얇은 기둥이 실 떨어진 연처럼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이 허공에 발가락을 걸고 있는 설천위의 몸이 움직였다.

완전히 몸을 웅크렸다가 단숨에 펼치는 탄성으로 물구나무를 선 설천위가 두 손을 자신의 가슴 앞에 모았다.

합장.

무해가 봤다면 감탄할 법한 그 자세로 허공에 그대로 멈춰 선 설천위의 눈이 번뜩인다.

안광이 먼저 터져 나오고, 그 뒤에 설천위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런 느낌인가요?”

[괴물 놈…….]

허공에서 천천히 몸을 돌리는 설천위를 보며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말이 안 된다.

영약도 구했으니 육체의 문제는 상당히 호전될 거라고 예상되어 천마는 설천위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비기를 가르쳐 줬다.

신(神)에게조차 대항할 수 있었던 천마의 독문절학.

후대의 천마들은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진짜 절학을 가르쳤는데…….

[네놈, 어찌 이리 능숙하게 펼치는 것이냐?]

“그야, 대충 무슨 느낌인지 감이 잡혀서요?”

가볍게 대답하고 있지만, 사실 설천위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중력이라.’

천마가 다루는 힘의 뿌리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연(自然).

말 그대로 자연스럽고 스스로 그러한 것을 일컬으며, 당연히 그러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을 대자연이라 부른다.

자신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본디 그러한 것이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손에 닿은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연스러움을 동경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을 경계한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의 절학은 그런 무위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천마는 인간으로서 신(神)에 도전한 존재.

그리고 동시에 마(魔)로서 하늘 아래 우뚝 선 존재다.

세상을 초월한 존재들을 잡기 위해 스스로 세상을 향해 손을 뻗은 거인.

끝내 자연조차 그 손에 넣은 마(魔).

그의 절학은 자연 그 자체를 손에 쥐고 있었고, 그 이치에는 자연 자체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설천위가 다룬 힘 또한 그런 종류였다.

‘이걸 중력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꾸로 서 있던 몸을 원래대로 되돌린 설천위는 순수하게 천마의 통찰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만유인력.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그 개념조차 없을 힘을 천마는 수천 년 전에 이미 깨닫고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천마는 설천위가 이 힘을 단숨에 깨달은 것에 놀라고 있었지만, 반대로 설천위는 천마가 이 힘을 직관만으로 구성해 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설천위야 뭐, 배운 지식이 있으니 그 개념을 단숨에 이해해서 그것을 영력으로 구체화하는 데 쉽게 성공했지만, 천마는 아니지 않은가.

그 시절에 그런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고, 심지어 그런 자연의 법칙마저 비트는 존재들이 널린 세상에서 그런 이치를 깨우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건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직 부족하니라. 네가 이해가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진짜로 익혀야 할 것은 이해만으로는 불가능한 범주에 있으니.]

“그런 것 같네요.”

물론, 설천위가 천마의 절학이 만들어진 원리를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익힐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절학의 기본이 되는 기술들은 순식간에 익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익히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천마의 정수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것은 신(神)의 공통된 특성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산사태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메마른 대지에 풀이 말라 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그 끝에 상대를 베는 것조차 자연스러워지는 것.

완벽한 자연(自然).

그것이 천마의 절학이 품은 시작이자 끝이다.

신(神)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게 해 주는 최소한의 자격.

기술은 그 자연스러움 위에 얹어져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아직 자연스러움에 손이 닿지 않은 지금의 설천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술을 연마하는 것밖에 없었다.

똑바로 서서 천천히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띄우는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보던 천마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연마하거라. 그리고 깨닫거라. 그때야 비로소 너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 터이니.]

나조차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선의 너머에 도달할 것이다.

* * *

“돛을 올려라!!”

바다 위.

해안가에서 보일 듯 말 듯 먼 곳을 지나가던 배는 때아닌 고난을 겪고 있었다.

잔잔한 바다 위. 폭우도 파도도 없었지만, 배 위의 선원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끝이 없군요.”

잠영으로 배 밑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던 적을 베어 낸 유예린은 지독한 적들의 공세에 그만 혀를 내둘렀다.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선 지 닷새.

빠른 이동을 위해 골랐던 해로였지만, 적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이동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습격을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빨랐어요.”

“정보가 완전히 샜어.”

배가 출발하고 고작 이틀 만에 습격해 온 것을 보면,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정보가 샌 것이 분명했다.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어 아직까진 안전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노를 죄다 부숴 버리다니.”

노와 돛을 동시에 사용하는 쾌속선으로 빠르게 나아가려던 계획이 적들의 수작에 의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노는 사흘째에 전부 부서졌고, 돛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배의 속도는 더욱 느려지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늦게 목적지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되면 지상에서 움직이는 병력과 약속 시간이 많이 벌어진다.

그 같은 괴리는 적이 손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기에 반드시 피해야 했다.

“주 공자.”

“예.”

“문 공자와 교대로 배를 밀어주세요.”

“결국 하네요.”

“어쩔 수 없으니까요.”

화경급 강자들의 힘을 조금 빼더라도 시간을 맞추는 게 더 중요했다.

유예린의 지시에 배의 뒤로 간 주현운은 그대로 바다에 뛰어내렸다.

그리고.

“후읍!”

바다 위에 선 주현운은 말 그대로 배를 밀기 시작했다.

바다를 딛고.

천천히 밀던 속도는 어느새 달리는 것으로 변했고.

콰가가가가가각!

배는 바다를 가르며 무섭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노를 젓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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