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0화
549화-영약 (4)
영물이란 영적인 동물을 말한다.
뭐, 간단히 말하면 긴 세월 동안 산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범이나 곰 같은 동물들이 대표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눈에 띄는 동물들이 긴 세월 그 영역을 지키면 그 동물을 영물이라 불렀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말하는 영물은 그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영물이란 것이 대부분이 자신의 영역에 붙어서 살아가지만, 무림인들에게 중요한 건 그들의 영험함이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들이 품은 내단의 영험함이었다.
그들의 내단이 얼마나 영험하고 쓸모가 있는가.
그게 무림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따라서 무림인들은 단순히 오래 산 동물이 아니라 몸에 내단을 지닌, 짐승으로서의 벽을 허문 존재를 영물이라고 불렀다.
그런 영물들은 화경급의 고수가 혼의 격이 자연스럽게 오르는 것처럼 높은 영감을 지니고 있다.
자연에서 성장해 벽을 넘었기에 사실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감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상한데.”
지금의 설천위가 뿜어내고 있는 영력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건 매우 이상한 행동이었다.
설천위가 뿜어내는 영력이 어디 보통 영력이던가.
온갖 기운이 섞인 것이 설천위의 영력이다.
패기는 기본적으로 섞여 있고, 살기와 독기 심지어 혈기까지 섞인 게 설천위의 영력이다.
워낙 많은 존재를 먹어 치우고 살을 찌운 영력이기에 그 속성은 자유자재로 변하고 설천위는 지금 그것을 그저 뿜어내고 있는 중이다.
딱히 안에 담긴 기운까지 조절하지 않았기에 영적으로 민감한 영물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기는커녕 100장 이내에 접근도 안 해야 옳았다.
날카로운 봉우리 위에서 몸을 풀던 설천위는 흑관을 이용해 허공에 걸쳐 놨던 상의를 대충 걸치고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의식해서 봉우리의 면을 박차는 순간.
단숨에 늘어지는 풍경과 함께 산의 중턱까지 내려온 설천위는 거친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쾅!!
“흠흠.”
멈춰졌다.
거대한 바위에 부딪혀 겨우 정지한 설천위는 돌가루를 대충 털어 냈다.
수련에 너무 집중했는지 근력의 통제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력이 근육에 깃드는 과정에서 급격히 증가하는 근력의 수준이 아직 감이 잘 안 잡혔다.
[영적인 재능으로도 몸뚱이의 저주는 어쩌지 못하는구나.]
[다른 건 다 잘하는 놈이 왜 제 몸 다루는 건 저리 못한단 말이냐…….]
“아, 좀!”
오랜만에 듣는 혼들의 한탄에 눈을 부라린 설천위는 히죽히죽 웃으며 사라지는 혼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영감들, 어째 장난만 늘고 있어.
쯧, 혀를 찬 설천위는 혼들에게 관심을 껐다.
끼잉.
그제야 영물과 마주하게 된 설천위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람쥐?”
새하얀, 그야말로 순백의 다람쥐가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의 털은 본디 어두운 것이 보통의 다람쥐인데, 이 녀석은 그 등의 털까지 완전히 새하얀 녀석이었다.
문제는.
“새끼 같은데?”
그 크기가 작고, 떨리는 눈동자에 힘이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긴 세월을 살아온 영물로는 보이지 않는, 어린 새끼 같았다.
“흐음.”
자신의 영력에 짓눌려 벌벌 떨고 있는 다람쥐를 설천위는 잠시 가만히 지켜봤다.
설천위가 영물임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저 다람쥐가 품은 영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어린 녀석이라…….
“어미가 죽었나?”
낑…… 낑…….
설천위의 중얼거림에 반응이라도 하듯 다람쥐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마치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서럽게 우는 그 모습에 잠시 지켜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다람쥐에게 다가갔다.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도와주마.”
마침 휴식 시간이니까.
다람쥐를 조심스럽게 손 위로 올린 설천위는 다람쥐의 영력을 더듬었다.
그 안에 깃든 영력을 더듬어 이 다람쥐가 지나온 길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찾았다.”
다람쥐에게 깃든 영력의 주인을 포착한 설천위가 그대로 땅을 박찼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몸.
단숨에 나무를 지나 그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설천위의 손바닥 위에서 다람쥐가 조그마한 눈을 크게 떴다.
끝없이 펼쳐진 십만대산의 절경을 눈에 담으며, 단숨에 발판을 만들어 낸 설천위의 발이 발판을 밟았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발판 위에서 무릎을 굽힌 설천위의 허벅지가 딴딴하게 부풀어 오르고.
쾅!!
폭음과 함께 설천위의 몸이 단숨에 허공을 꿰뚫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속도에 비견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하늘을 꿰뚫은 설천위는 속도가 줄어들 때쯤 발판을 만들어 다시 가속했다.
고작 몇 걸음 만에 목표로 한 곳에 도착한 설천위는 이번엔 반대로 발판을 만들어 제동한 뒤에 그대로 착지했다.
이번에는 깔끔하게 착지…….
[전투 중에도 그렇게 조정할 생각이 아니라면, 쓰지 않는 습관을 들이거라.]
“쓰읍, 눼.”
가공할 속도를 은밀하게 흑관을 이용해 제어했던 설천위는 천마의 지적에 입술을 삐쭉였지만, 천마는 그 모습에 기가 찰 뿐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술법으로 저 속도를 제어한단 말인가.
설령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만한 수준에 오른 강자라면 육체의 제어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천마가 기이한 설천위의 행태에 한탄하는 사이, 바닥에 내려선 설천위는 낑낑거리는 다람쥐와 함께 한 동굴 앞에 섰다.
“어우.”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네.
진득한 피 냄새에 혀를 찬 설천위는 그대로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개판인데.”
난장판이 된 동굴 내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사방에 흩어진 피와 살점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지만, 비위가 안 좋은 이라면 단숨에 속 안의 것을 모두 게워 낼 만큼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었다.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찬 동굴 중앙.
그곳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은 앞발 하나와 뒷발 둘을 잃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백호였다.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백호를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내려 손바닥 위를 쳐다봤다.
하얀 다람쥐가 붉은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서 당장에라도 백호에게 달려갈 듯 꿈틀거린다.
다시 고개를 들어 백호를 바라본 설천위는 자신의 손바닥 위의 다람쥐를 발견하고 더 날카로워진 백호의 눈빛에 어색하게 물었다.
“……엄마?”
종이 다른데?
* * *
[누가 엄마라는 것이냐, 인간?]
“오, 암컷은 맞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엄청 부드럽네.
[……암컷 맞다. 무슨 상관이지?]
“아니, 아빠라 불렀어야 했나 했지.”
[마음대로 불러라.]
서서히 힘이 다하는 듯 눈꺼풀이 내려오는 백호를 보던 설천위는 다람쥐에게 깃든 힘이 저 백호의 것임을 확인하고 감탄했다.
“고작 가호만 내린 건데, 이 정도야? 대단한데?”
[그 아이를 살려 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흐음.”
살려 보내기 위해.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뱀, 독을 썼구나.”
흩뿌려진 살점 중에 형체가 남아 있는 것들은 명백하게 뱀의 그것이었다.
거기다 드문드문 녹아내린 바위들까지.
독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진 모양이지만, 싸움이 한창일 때 이 어린 다람쥐가 이곳에 있었으면 한 줌의 독기에도 숨이 끊어졌을 거다.
즉.
“얘를 살리려고 불리한 싸움을 한 건가?”
영물이?
영물은 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
당연히 삶에 대한 집착이 다른 짐승들보다도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괜히 오지에 숨어 살고, 자신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두려워서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다.
그런 영물이 숙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적을 앞에 두고 종도 다른 어린 짐승을 위해 힘을 썼다라…….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
“사람의 말을 구사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녀석이 꽤나 감정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짐승이라 할지라도 모성애는 있다.]
“모성애?”
얘를 상대로?
뀨! 뀨!
어느새 손바닥에서 튀어 올라 백호에게 다가가 유일하게 멀쩡한 앞발을 핥는 다람쥐.
누가 봐도 종족이 달라서 자식 같진 않은데.
[색이 달라 홀로 살아온 내게 자식은 이 아이뿐이다.]
“……과연.”
백호로 태어난 호랑이.
순백의 털을 타고 태어난 다람쥐.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고고하게 살아오며 자식을 본 적 없는 백호가 모성애를 느낄 대상으로는 충분하다는 거겠지.
[인간.]
“왜?”
[부탁이 있다.]
“아, 싫은데.”
[……싫다고?]
보통 이런 상황이면 들어 보겠다. 뭐, 아니면 그래, 내가 이 녀석은 책임지고 키워 줄게.
이런 대답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네놈은 인간의 마음도 없느냐!]
[이런 귀축 놈!]
[어허!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냐!]
“아니, 왜 당신들이 난리야!”
버럭버럭 소리치는 혼들을 대충 손을 휘둘러 쫓아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동굴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뭐, 그 녀석을 대신 키워 달라거나 뭐 그런 부탁이잖아?”
[……맞다. 타고난 생명력 덕에 숨이 붙어 있긴 하나, 이 꼴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자연계에서 네 다리 중 셋이 잘린 건 타격이 크지.
뭐, 보통은 출혈과 감염으로 죽겠지만 백호쯤 되면 그냥 서서히 고사하는 느낌으로 죽을 거다.
[내 생명력이 전부 꺼지기 전에 내 내단을 넘기겠다. 반은 네가 가져도 좋으니, 이 아이가 크면 나머지 반을 이 아이에게 주는 것으로 충분……. 뭐 하느냐?]
최후를 느끼고 비장하게 말하던 백호는 동굴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떨어진 팔다리를 줍는 설천위의 모습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내 가죽이라도 가져가려는 것이냐?]
이런 금수 같은 놈!
이런 놈한테 이 아이를 맡기는 것이 옳은가?
자신이 접근하는 것조차 힘든 괴물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가죽? 그딴 걸 왜 가져가?”
필요 없어.
내가 산적 두목도 아니고, 백호 가죽을 가져가서 어디다 쓰라고.
백호에게 다가간 설천위는 주워 온 다리들을 상처 쪽에 대고 짝을 맞췄다.
“음, 이 정도인가? 그나저나 저 뱀, 생각보다 비늘이 더 날카로웠나 본데?”
뱀의 조르기로 잘린 거면 뭉개지고 걸레짝이 되었어야 정상인데,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네?
끝나면 챙겨 가야겠다.
[뭘 하려는 거냐?]
“뭐긴, 치료지. 누가 다쳤으면 치료해 줄 생각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죽으라고 놔두고 그 자식을 대신 키워 주는 건 너무 비정하잖아.”
슬쩍 눈을 흘기는 설천위의 모습에 혼들이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으음, 호랑이를 상대로 해 본 적은 없다만.]
“내 영력 충분히 빌려줄 테니까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 이으세요.”
[알겠다. 해 보마.]
설천위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 신의는 실체화해서 백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설천위의 영력을 이용해 잘린 발과 잘린 상처를 꼼꼼하게 살핀 신의는 무려 반 시진(한 시간)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다.”
“좋네요.”
그사이, 왠지 모르게 안심한 다람쥐와 놀아 주던 설천위는 빙긋 웃으며 일어나서 물을 만들어 냈다.
한 번 더 백호의 상처 부위를 씻어 낸 설천위는 흑관으로 만들어 낸 수술대 위에 백호를 놓고 그 눈 위에 손을 올렸다.
“조금 따끔하겠지만, 참아라.”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뭐긴, 잘린 팔다리를 붙이는 거지. 아, 넌 다리만인가?”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백호를 진정시키자, 신의가 작은 바늘을 꺼냈다.
그리고 그 바늘에 연결되는 실.
흑관으로 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뒤로, 설천위가 옛날에 만화에서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신의에게 연습시킨 기술.
설천위도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신의에게 밀린다.
애초에 신의는 mm보다 더 섬세한 수준으로 침을 놓을 수 있었던 명의 중 명의였다.
섬세하고 꼼꼼한 일 처리는 그의 특기였고, 원리를 알고 꾸준한 연습이 동반된다면 그 실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된다.
혈주와의 전투에서 설천위의 잘린 팔을 단숨에 붙일 정도로.
[천의무봉(天衣無縫)]
지고의 경지에 오른 봉합술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