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8화
547화-영약 (2)
“흐음, 여기 괜찮은데요?”
십만대산의 한 계곡.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더 깊이 들어가던 설천위는 계곡 속에 자리한 동굴을 발견했다.
나무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얕게 흐르는 냇물이 앞에 있는 동굴.
임시로 머물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거처였다.
“다행히 선객도 없는 것 같고.”
애초에 선객이 없는 걸 확인하고 들어온 거긴 했지만.
짐승이 머물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인데도 운이 좋았다.
예전에 머물던 짐승이 있었는지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비를 피하고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만한 조건이다.
“후우.”
대충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설천위는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슬슬 힘드네.”
[당연하다. 한참을 돌아다녔으니까.]
[그나마 생명체가 잘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니, 한동안은 이곳에서 쉬는 게 나을 게다.]
“그래야죠.”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는 영력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라서 계속 움직이긴 했지만, 슬슬 그것도 한계였다.
동굴에 들어왔으니 주변에 나무들이 조금 영력에 절여지는 걸 감안하더라도 한동안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맞았다.
“식량 조달은 내가 해 주마.”
“고마워요.”
설천위의 영력으로 실체화한 현태중은 밖으로 나갔다.
“그럼 내가 동굴을 좀 다듬어 주마. 이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뒤이어 실체화한 암영의적이 자신 있게 나서서 동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리 누워라. 침을 놔 주마.”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체화한 신의가 적당히 다져진 땅을 두들기며 설천위를 불렀다.
손에 영력으로 만들어진 침까지 쥔 그의 부름에 어기적어기적 기어가 드러누운 설천위는 신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렇게 각자가 할 일을 하면서 어느새 설천위의 몸에 침이 빼곡히 박힐 때쯤.
“……이것이 나루토의 기분인가?”
분신은 아니지만, 나 대신에 다른 누가 일 처리를 해 준다는 거 상당히 편하네.
“그게 무슨 소리냐?”
“아, 헛소리요.”
신의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설천위는 두 눈을 감았다.
침도 맞았으니, 움직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설천위는 천천히 다른 감각을 끌어올렸다.
촉각이나 청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영력.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는 자신의 혼의 자취.
그것에 집중한 설천위는 순식간에 세상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여태까지 느껴 본 적 없던 전지의 감각이 몸을 충만하게 채운다.
나무의 흔들림.
대지의 미약한 움직임.
미물들이 자잘한 소음.
그 모든 것들이 품은 작디작은 혼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독할 정도의 전능감이 따라붙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안에 잡힌 모든 것들을 먹어 치울 수 있다는 전능감.
자신의 영력의 영향 아래 들어간 모든 존재들의 생사여탈권이, 아니 그들의 혼 자체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압도적인 전능감이 몸 안을 가득 채웠다.
할 수 있다.
그 감각은 이내 하고 싶다는 감정을 만들어 냈다.
욕망.
신체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더 많은 것을 갈구하는 욕망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그리고.
“후우우우.”
그것이 가장 위험한 감정임을 깨달은 설천위는 즉시 눈을 떴다.
고작해야 10분도 안 되는 시간.
자신의 상태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한 번 더 자각한 설천위는 이번엔 눈을 뜬 채 명상에 들어갔다.
이번에 집중할 대상은 영력이 아니었다.
감각.
육체에 집중했다.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통증이었다.
아직 살이 다 차오르지 않은 가슴의 구멍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끔찍할 만큼 지독했다.
다만, 그것을 바닥에 깔고 새롭게 집중하자 육체 하나하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뼈, 근육, 인대 등등.
지금 어디에 문제가 있고, 어디에 문제가 없는지.
지금 영력의 영향 아래 어떤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지 등등.
모든 것들을 살펴본 설천위는 신의가 놓은 침을 뽑아 줄 때가 되어서야 명상에서 깨어났다.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그의 코를 타고 들어왔다.
“마침 일어났군. 준비됐다.”
“오오, 뭐예요?”
“멧돼지.”
“냄새 장난 아닌데요?”
필수로 가지고 다니는 향신료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지만, 잡내를 어느 정도 잡아 주기엔 충분했다.
약간 냄새가 나는 건 참아야지.
현태중이 준 고기를 받아 든 설천위는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아아, 역시 단백질이지!”
“단백질?”
“고기를 말하는 거예요. 역시 사람 몸에 난 구멍은 고기로 채워야죠.”
히히 웃으며 열심히 고기를 뜯던 설천위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갸웃했다.
“동물이 있네요?”
“아마 영물일 거다. 네가 뿜어내는 영력에 압도되어서 이제 겨우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흐음.”
그것치고는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러운데…….
“날쌘 놈이었다면, 네 기척을 느낀 순간 도망쳤을 텐데……. 아마 상당히 민감한 놈일 거다. 네 기세에 압도되어 여태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가 겨우 움직인 것을 보면.”
다가온 암영의적의 설명에 잠시 턱을 쓸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짐승이 제 살길은 알아서 찾아야죠.”
그런 것까진 내가 배려를 못 해 주지.
“그나저나 십만대산, 십만대산 해서 놀랐는데 진짜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네요.”
[여기는 십만대산 중에서도 깊은 곳이다.]
“과연.”
천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고기를 다 뜯은 뼈를 내려놓고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일단, 회복과 성장에 집중해 볼까요.”
[그 몸으로 수련을 하겠다는 말이냐?]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요. 영력을 제어하는 건…… 솔직히 무리인 것 같고.”
솔직히 말하자면, 영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무리인 부분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영력을 육체에 잡아 두는 일이었다.
애초에 영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면 이런 중상을 입고 산을 싸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거다.
다룰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갈무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
비유하자면, 물그릇에 물이 넘쳐흘러서 주위로 마구 뿌리고 있는 상태.
지금 설천위가 딱 그 상태였다.
문제는 물그릇은 보통 넘칠 때쯤이면 더 이상 물이 추가되지 않지만, 설천위의 경우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어서 계속해서 물이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
예전에는 하나를 실체화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혼의 실체화를 무려 셋이나 동시에 하고 있음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게 그 증거였다.
그냥 외부로 뿌려 놓은 영력들을 뭉쳐서 실체화시킨 것이니,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소모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 영력을 제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몸의 성장 같아서요.”
지금 영력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건 그릇의 크기가 작아서다.
물을 탑처럼 쌓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릇의 크기가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정하는 법이니까.
즉, 지금 영력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릇 자체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환골탈태 정도가 가장 좋은데요.”
“참 쉽게도 말하는구나. 네가 지금 환골탈태를 하려면 현경에 진입하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불가능할 터인데.”
“그러니까요. 그게 문제란 말이죠.”
흐음.
현태중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앉아 있던 천마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인 게냐?”
영력을 불어넣어 그를 실체화시킨 설천위는 탐스러운 수염을 자랑하는 천마의 앞에 섰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무엇을 말이냐?”
“천마의 무공을요.”
당당하게 대답한 설천위는 그대로 아홉 번 절을 했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천마를 보며, 히죽 웃었다.
“가르쳐 주시죠. 스승님.”
* * *
“……이상한데요?”
흑룡단 집무실.
그곳에서 업무를 보던 호운은 청아의 중얼거림에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님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 같단 말이죠…….”
“난 잘 모르겠는데…….”
“그거야 오빠가 혼으로 살아온 경험이 짧아서 그런 거고요.”
오빠라고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이 집무실에는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무해와 서하영, 호운 그리고 청아만 있었으니까.
“이상한 거라면 어떤 거죠?”
“그게 말이죠. 으음……. 며칠 전에 진짜 미친 듯이 아팠단 말이에요?”
“나도 그랬지.”
“아마 유 언니가 떠나고 다음 날인가 그다음 날인가 그랬는데…….”
잠시 말끝을 흐린 청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뒤에 이상하게 영력이 늘어난 느낌이란 말이죠.”
“늘어나요? 왜요?”
“그걸 몰라서…….”
며칠 동안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질 않아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었던 거다.
대충 청아의 설명을 들은 서하영은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설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설 공자가 강해졌단 건가요?”
“그게 또…… 그렇다고 확답할 수가 없어요. 공자님은 저희를 완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놔서 공자님이 강해진다고 그 영향이 그대로 오진 않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영력의 변화를 느낄 정도로 영향을 끼치려면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건지 감도 잘 안 왔다.
무엇보다.
“그렇게 강해졌다고 하면, 며칠 전에 있었던 그 통증이 설명이 잘 안 돼요.”
강해지면 강해진 거지, 혼이 찢어질 것 같은 그 통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미타불, 그렇다면 혹 영적인 무언가가 벌어져 그리 느끼셨을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술사분들의 순찰을 더 늘려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겠네요.”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제대로 감이 잡히질 않으니 가장 무난한 결론을 내린 부단주들은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청아의 의견 제시로 시작된 작은 의문은 그렇게 지나가고, 모두가 다시 일에 집중하려던 그때.
“……이건 이상하군요.”
오늘 막 들어온 공문을 살피던 서하영은 미간을 찡그린 채 유심히 내용을 살폈다.
“팽가에서의 이상 현상. 팽가의 무인들이 아예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안에서 기합성조차 들리지 않는다…….”
설령 문파가 봉문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기합성은 터져 나와야 하거늘.
한창 활동해야 할 팽가가 조용하다는 것은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다.
“황실의 관리가 몇 번 드나든 뒤에 이렇게 됐다…….”
잠시 고심하던 서하영은 황보세가를 떠올렸다.
팽가와 황보세가.
둘 다 황실과 연이 깊은 가문이다.
황보세가에서 무언가가 일이 터져 지금 유예린까지 그곳으로 지원을 간 시점에서 팽가에서도 일이 터졌다?
예사롭지 않았다.
“마침 잘됐군요.”
공문을 보낸 사람까지 확인한 서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해 대사,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문제없습니다. 호 학사님께서 도와주셔서 업무 처리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마음껏 다녀오셔도 됩니다.”
“그럼 철 부관과 둘이서 가겠습니다. 창천단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니, 그들과 합류해 다녀오겠습니다.”
무해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서하영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움직일 거면 부하들 훈련은 대체 왜 시키는 걸까요?”
청아의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 무해와 호운은 조용히 서류 업무에 집중했다.
* * *
“으아아아아아아! 내가 무공을 가르쳐 달랬지 죽이라고 했냐고!!”
십만대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곳에 매달린 설천위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절벽을 올라가고 있었다.
상처가 욱신거리고 몸 곳곳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댔지만, 설천위는 멈출 수가 없었다.
[배우겠다고 한 건 네놈이다! 조금 실력이 늘었다고 오만해져서는! 내가 그 썩어 빠진 몸뚱이와 근성을 바로잡아 주마!]
설천위의 팔다리에 매달린 묵직한 추가 덜렁거린다.
[무게를 더 늘려라, 애송이!!]
“왜 추의 무게까지 내가 무겁게 만들어야 하냐고요! 이건 그냥 자학이잖아!”
[그게 싫다면 강해져라!]
천마의 호통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천마가 알려 준 구결을 외우며.
육체의 고통에 설천위의 감각마저 무뎌진 무의식의 틈새에서 설천위가 외우는 구결을 따라 내공과 영력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