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544화-혈주 (7)
[천위!]
[이게 무슨!]
다급한 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설천위는 그 목소리들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단숨에 팔을 잃은 일격.
베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가 혈주의 조롱을 듣고 난 뒤에야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설천위는 즉시 자신의 전신으로 감각을 확장했다.
자연스러움.
처음 혈주가 보였던 그 힘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대가 새롭게 생겨난 팔로 자신의 팔을 잘라 낸 것이라면, 상대의 움직임은 이미 무(武)의 극치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 살존조차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게 팔을 벨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혈주는 그것을 실행했고 성공했다.
자연스러움.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해내는 그것은 격을 넘은 존재들이 가진 기본적인 힘이다.
게임에서도 몇 번이나 나왔었다.
저딴 걸 왜 눈치채지 못하느냐고, 아무리 은밀하게 해도 뭐 기감이나 이런 거로 눈치채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짜증을 냈었는데.
“이런 느낌이군.”
이제야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켰던 주인공급 캐릭터조차 감지해 내지 못할 때도 있었던, 당연함이라는 자연스러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그들의 격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진짜 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어이없이 팔을 내준 설천위는 경계의 범위를 자신의 내면까지 확장시켰다.
몸에 약간의 이변이라도 생긴다면 바로 눈치챌 수 있도록.
적이 만드는 자연스러움에 현혹되지 않도록.
단숨에 자세를 바꾸고, 떨어진 팔을 허공으로 차올린 설천위는 영력으로 만들어 낸 물로 팔에 묻은 피와 흙을 씻어 냈다.
그리고 잠시 그 팔을 응시하던 설천위는 대충 묶어서 등 뒤로 넘기고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성격이 안 좋네.”
[승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겠나?]
승리야말로 곧 생존이니.
신화시대를 살아온 혈주는 오히려 승리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안심했다. 네놈의 그 얼굴을 보니 고작 이 정도에 흔들릴 종자는 아니로구나.]
“안심은 개뿔, 뒈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짜증이 담긴 껄렁한 목소리로 대답한 설천위는 도를 어깨에 걸치고 힘을 풀어냈다.
“뒈지고 싶어서 안달 났다고 하면 순순히 목을 내어줄 텐가.”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잡은 설천위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에 쥔 도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강기가 칠흑의 화염을 품고 혈주를 덮친다.
그 공격을 현현한 오른팔로 가볍게 받아 낸 혈주는 일순 시야를 가렸던 강기가 사라지자마자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설천위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번뜩!
어느새 감겨 있던 바닥의 눈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설천위의 움직임이 일순간 정지한다.
몸 안에 있는 피를 순간적으로 굳혀 근육의 움직임을 막은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눈을 크게 뜬 설천위를 향해 혈주는 멀쩡한 팔을 휘둘렀다.
단숨에 혈천위의 뺨에 처박힌 주먹이 설천위의 얼굴을 부술 기세로 밀어낸다.
그 충격에 그대로 고개가 돌아간 설천위는 이내 허공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몸을 돌리지 않으면, 목뼈가 돌아가서 즉사할 테니까.
허공으로 떠오른 설천위는 충격에 몸을 회전하면서도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리고.
캉!!
가슴 쪽을 노리고 파고드는 혈주의 손을 막아 낸 설천위는 그 묵직한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다.
그 혈주가 찔러 넣은 손을 받아 낸 충격을 이용해 몸의 회전을 상쇄시키고,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아 발판을 만들고 그 위에 착지했다.
가볍게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자세를 다잡은 설천위는 추적 없이 여전히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혈주의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시당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아니다.
그딴 걸 전투 중에 신경 쓸 정도로 미련한 인간은 아니니까.
저 여유가 거슬렸다.
조금 전에 팔을 잘라 낸 일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공격을 쓰지 않은 건 정말로 여유인가, 아니면 쉽게 쓸 수 없는 기술이어서 그런가.
그것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돌진했음에도 얻은 것이 없는 상황.
전투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상대가 패를 전부 공개하지 않고 있기에 생기는 문제.
‘생각보다 더 싸움에 능숙한데.’
숨길 것은 숨기고, 드러낼 것은 드러낸다.
비장의 수는 숨겨 놓고, 적당히 위협될 만한 것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
전투의 기본이고, 전략의 기본이다.
그 주도권을 상대가 쥐고 있으니 설천위는 불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뭐, 좋아.”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이쪽이 물러날 필요는 없지.
여유롭게 추가 공격 없이 자리를 지키는 혈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그대로 발판을 없애고 땅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착지해 도를 손에 쥔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피한다?
이미 자진해서 놈의 결계에 들어온 시점에서 후퇴는 하책일 뿐이다.
무엇보다 지금 도망치면 놈을 놓친다.
눈앞에 있는 지금,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단숨에 달려든 설천위가 도를 휘두르고, 그 순간 혈주는 설천위의 도를 받아 냈다.
이번에는 자신의 움직임을 정지시키지 않았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설천위는 다시 도를 휘둘렀다.
언제 피를 조작할지 모른다는 점을 의식하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그런 설천위의 공세에 반격하지 못하고 방어에 집중하는 혈주의 모습에 설천위는 더더욱 인상을 썼다.
힘을 가늠할 수 없게 끊임없이 숨긴다.
마치 검붉은 연못이 그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것처럼.
피로 물든 강이 그 아래에 깔린 시체를 가리는 것처럼.
놈은 끊임없이 자신을 가리고 숨기며 승리를 추구했다.
집착에 가까운 전투 방식.
위기를 감수하면서도 치명적인 일격을 노리는 그 전투 방식은 언뜻 설천위와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서로가 서로의 패를 온전히 내보이지 않는 공방이 이어진다.
베고, 막고, 차고, 찌르고.
각자 가진 모든 것을 토해 내는 전투에서 혈주의 부정형의 몸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설천위의 몸에는 자잘한 생채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생채기들에서 흐른 피가 설천위의 옷을 축축하게 적신 시점에서.
혈주가 움직였다.
다시금 번뜩인 눈이 설천위를 시야에 둔다.
동시에 설천위의 전신에 적셔져 있던 피가 치솟았다.
밖이 아니라, 안쪽으로.
전신을 난자하는 피의 송곳에 몸을 관통당한 순간, 설천위의 몸이 굳었고 그 틈을 노렸다는 듯 혈주의 손이 설천위의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슴을 가린 설천위의 팔이 혈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무 쉽잖아.”
[훌륭하군.]
“그렇게 노골적으로 상처를 내는데 대비를 안 할 리가 없지.”
몸 안에 흘려 놓은 패기와 영력으로 파고든 피의 송곳을 별 무리 없이 막아 낸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이것도 안 돼.”
[……이건 놀랍군.]
순간, 혈주의 공격을 막아 낸 팔에서 치솟은 피의 칼날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설천위가 혈주를 공격해 팔을 잃었던 첫 공격.
그 공격에서 설천위의 팔을 베어 낸 건 혈주의 팔이 아니었다.
눈.
바닥에서 설천위를 응시하고 있던 눈의 권능이 설천위의 팔 안에 있던 피를 날로 바꿔 그대로 팔을 베어 낸 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의식하진 못했지만, 전투를 하면서 생각할 시간이 생긴 설천위는 금세 그 트릭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왔던 기술이니까.
그렇기에 바닥에 생겨난 혈주의 눈이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이유 또한 알아챘다.
“너, 아직 불안정하구나?”
고작해야 팔 하나, 눈 하나를 가져온 것에서부터 눈치챘지만, 설천위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혈주의 상태는 불안정했다.
힘의 반동을 스스로 견뎌 내기 힘들어 자신의 권능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그것을 확신한 설천위는 무리하게 전투를 이어 나갔고, 틈을 보이며 혈주가 공격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린 끝에 목적을 이뤄 냈다.
혈주의 하나뿐인 팔을 잡은 오른팔은 그대로 둔 채, 설천위는 왼팔을 움직였다.
검을 쥐고 그 팔을 휘둘러 놈의 눈을 꿰뚫었다.
그 궤적을 흐리는 선유적월검(仙遊跡月劍)의 이치를 품은 일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혈주의 하나 남은 눈을 꿰뚫었다.
[……어떻게?]
잘렸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이적이다.
어느새 돌아온 설천위의 왼팔에 혈주의 몸이 거세게 일렁였다.
“안 가르쳐 줘, 새끼야.”
그런 혈주를 비웃으며 검을 비튼 설천위는 거세게 검을 뽑아냈다.
형태가 없던 다른 육체와 달리 유일하게 선명하던 눈에서 검이 뽑혀 나오자, 거세게 피가 솟구쳤다.
혈주의 혼을 묶어 놓고 있던 중심을 꿰뚫은 일격은 혈주에게도 치명상이었다.
[크으으윽!]
“뭐, 너무 원망은 하지 말라고. 나도 더럽게 힘드니까.”
혈주가 뿜어내는 존재감, 영력, 혈기 등등.
놈의 공간에서 싸우는 것 자체가 사람의 심력을 크게 잡아먹는 일이다.
그런 와중에 팔도 잘리고, 연옥에서 빠져나온 놈의 본체의 일부와도 맞서 싸웠으니 힘이 안 빠질 수가 없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고친 설천위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팔의 감각에 감탄했다.
‘신의 양반, 솜씨가 좋네.’
[내가 얼마나 연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실전 테스트를 내 몸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결과만 좋으면 됐지.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아직도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 혈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꽤나 불안정하게 가져왔나 봐? 눈 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 보니.”
[……네놈.]
“뭐, 내가 알 바 아니지. 슬슬 끝이나 내자고.”
놈의 수단을 파훼하고, 치명상을 입힌 시점에서 승기는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이제 놈이 어떤 방식으로 권능을 쓰더라도 대처할 자신이 있다.
오른손에 도를, 왼손에 검을 쥔 설천위는 이를 악문 채 일렁이는 혈주를 향해 다가갔다.
이대로 몰아붙여서 목을 거두면 되는 그 순간.
“히히, 역시 이대로 넘겨줄 순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군. 지켜보고 있길 잘했어.”
결계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혈주와 설천위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결계 위.
소녀의 모습을 한 언여휘와 미공자의 모습을 한 비후가 가볍게 결계를 부수고 땅으로 떨어졌다.
“안녕! 오랜만~!”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밝게 인사하는 언여휘와 덤덤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비후.
그 둘의 모습에 설천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네놈들이더냐!!]
혈주는 분노를 토했다.
지금 자신이 이 꼴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이곳의 위치를 누군가가 설천위에게 알렸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맞아~. 내가 알려 줬지? 우리 천위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꺼져.”
“아잉.”
몸을 비비 꼬는 언여휘의 모습에 설천위가 역겹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귀엽게 자신의 볼을 검지로 찌른 언여휘는 히히 웃으며 본심을 드러냈다.
“사실~ 지켜만 볼 생각이었거든? 천위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해 보고 싶어서. 그런데 혈주를 이길 줄은 몰랐네~.”
“동감이다. 적당히 싸우다가 패배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거늘.”
단숨에 혈주의 약점을 공략해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혈주가 간이로나마 연옥을 열어 자신의 일부를 가져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혈주를 설천위가 이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입하기로 했어.”
별거 아니라는 듯 장난스럽게 말하며 언여휘는 작은 손을 뻗었다.
“그럼 우리랑 같이 갈까, 천위야?”
언여휘의 손짓에 기하학적인 형상의 진법이 사방을 가득 메우는 것과 동시에, 비후의 그림자에서 치솟은 악귀들이 설천위를 포위했다.
“응? 같이 가자?”
천진난만하게 웃는 언여휘의 광기 어린 미소가 설천위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