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4화
543화-혈주 (6)
[오만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혈주의 선언과 함께 사방에서 치솟은 피는 순식간에 망령의 형태로 바뀌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피의 비는 맹금류가 되어 하늘에서 강하했고, 강에서 치솟은 피는 망자의 손이 되어 설천위를 휘감았다.
대지에서 일어난, 온갖 짐승의 형태를 한 망령들이 달려들었다.
그 안에는 인간 또한 짐승이라는 듯 인간의 형태를 한 것들까지 섞여 있었고, 그중에는 무장을 한 자들도 있었다.
자신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망자들을 베어 내며, 설천위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 마을에 있는 인간들은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혈주에게 종속된 살아 있는 그릇이다.
평생을 이곳에 묶여 있는 자들이기에 그들이 도망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시간을 끄는군.’
자신이 아는 혈주의 주력 공격은 이런 게 아니다.
고작해야 망령을 꺼내 적의 발을 묶는 것 따위가 혈주의 전력일 리가 없지 않은가.
설천위가 기억하는 혈주의 대부분의 공격은 육체를 찾고 난 뒤의 것이긴 하지만, 육체가 없다고 해서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닐 터.
지금 당장 게임에서 봤던 것과 거의 흡사한 영역을 전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효과 자체는 달랐지만.
게임 속에선 혈주의 영역에 서 있는 것만으로 생기를 빼앗기고 피를 잃었다.
상처 하나 없음에도 과다 출혈로 죽는 게 혈주의 영역이다.
피에서 태어난 신화시대의 괴이.
그게 혈주이니까.
인간의 육체와 피로 세상을 씻어 신격화될 뻔한 혈교의 교주와는 궤가 다른 자연적으로 태어난 괴이다.
방심은 금물이고, 그렇기에 당연히.
“소령연화.”
설천위는 힘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흑도를 타고 피어난 칠흑의 불꽃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패기와 살기를 머금기 전엔 새하얗던 불꽃이 검게 물들어 사방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조촐한 집들을 태우고, 단숨에 달려드는 망자들까지 태운다.
그렇게 불을 뿌리면서도 설천위는 스스로 움직여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베고, 부수고, 태운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적을 쓸어버리고 있는 설천위로 인해 본래부터 피 냄새로 가득 차 있던 마을은 어느새 죽음의 냄새까지 진득이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지켜보던 혈주가 이변을 깨달은 것은 50이 넘는 숫자가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혼이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종속시킨 부하들의 혼이 자신에게 오질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싸우느라 의식하지 못했고, 그다음에는 놈의 불꽃이 혼까지 태운 건가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혈주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보고로 들었던 설천위의 정보.
혼을 흡수한다는, 말도 안 되는 능력.
신화시대, 신들에게 도전했던 오만한 인간이 사용하던 힘과 같은…….
[만마(萬魔)인가!]
깨달은 순간, 혈주는 즉시 움직였다.
이대로 두면, 자신의 힘이 깎이는 걸 넘어서서 상대의 힘이 강력해진다.
자신이 만들어 낸 그릇들을 설천위가 전부 흡수한다면……!
시간을 끈 끝에 서 있는 것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을 얻은 혈주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망자들을 쏟아 내는 것에 더해, 직접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육체가 없어 그 반동이 심해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힘을 꺼냈다.
혈주가 만들어 낸 공간이 요동친다.
설천위를 중심으로 그 공간이 요동친다.
“흐음?”
이변을 눈치챈 설천위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쓰네?”
예상했다는 듯 웃는 설천위의 얼굴에 혈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피를 없애는 권능의 힘을 예상했다는 듯 차단해 버리는 설천위의 행동에 혈주의 눈에는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서렸다.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자신이 세상에 나서지 않은 지 수천 년이 지났거늘, 대체 저 인간은 어찌 자신의 힘을 알고?
밑에 부리는 종자들조차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인 이 힘을 어찌?
자신의 권능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힌 것에 혈주가 당황한 사이, 패기와 영력을 전신으로 돌려 피를 지킨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통하네.’
대체 뭘 노리고 여태까지 아끼다가 이제야 꺼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혈주가 사용하는 힘은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이렇게 되면 할 일은 간단하지.
적들을 쓸어버린다.
혈주의 힘을 깎고, 그 존재들을 흡수해 자신을 강화한다.
그것을 목표로 정한 설천위는 그대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적들은 추적해서 목을 베고.
집 안에 숨은 자들은 아예 불로 태워 버렸다.
땅에 숨어든 자들은 검강을 날려 땅과 함께 분쇄해 버렸다.
[허허, 이 녀석이 마도나 사파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군.]
[보통은 아무리 적이라도 이런 일방적인 학살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법인데…….]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살육을 자행하는 설천위를 보며 혼들이 되레 걱정할 정도였다.
설천위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나서 그 정신이 멀쩡할 리 없지 않은가.
설천위가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정신 나간 인간도 아니고, 오히려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혼들이 자신을 걱정하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설천위는 계속해서 학살을 이어 나갔다.
혈주는 이제 피로 된 날붙이 같은 것까지 만들어 날려 보내며 설천위를 방해했지만, 망자와 날아오는 날붙이 따위로는 설천위를 막을 수 없었다.
모든 힘을 자신에게만 응축한 채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것처럼 맹렬히 나아가는 설천위는 단숨에 마을을 지우진 못했으나, 착실하게 적들을 죽여 나갔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힘을 모아 혈주의 공격을 견뎌 내며, 설천위가 혈주의 그릇들을 제거한 지 일각(약 15분)이 흘렀다.
고작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후우.”
가볍게 호흡을 고르는 설천위의 손에 이미 백오십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새로운 무림공적이 나타났다며 오줌을 지리고 도망칠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설천위는 담담했다.
중간에 스탯이 상승했다는 알림도 들은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적들을 쓸어버리는 것이니까.
살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나아가는 설천위의 모습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공포에 질린, 그야말로 살고자 발버둥 치는 아우성이 마을에서 울려 퍼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동의 정신으로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만.]
기어코 혈주를 움직이게 했다.
산 중턱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던 혈주가 드디어 마을로 내려왔다.
설천위의 앞에 서서 그를 가로막은 혈주는 좀 전의 당황 따위는 전부 지워 버린 담담한 눈동자로 설천위를 응시했다.
[독하구나. 설천위.]
“너 같은 녀석들 상대하려면 독해져야지.”
[너 같은 자들은 많이 봐 왔지. 역사 속에서 항상 금포를 입는 것은 너 같은 자들이었다.]
세상이 혼란한 시대에도 결국 패권을 쥔 것은 인덕으로 사람을 품은 군주가 아닌 치밀함과 냉정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간웅이었다.
기꺼이 자신의 발아래 피로 물든 길을 깔 수 있는 자가 세상을 손에 거머쥐었다.
[황제라도 될 생각이더냐?]
“하?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뜬금없는 혈주의 물음에 짜증을 낸 설천위는 어깨에 도를 걸친 채 삐딱하게 말했다.
“그딴 거 관심 없어. 내가 원하는 건 행복한 미래다.”
앉아야 할 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은 행복일 수 있으나, 그 자리에 앉을 일이 없는 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은 결국 행복과 멀어지는 길이다.
설령 황제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설천위는 황제 따위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천위의 단호한 대답에 혈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인가.]
“뭐라는 거야.”
마치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혈주의 모습에 설천위는 짜증을 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뻔하지 않은가.
여태까지 지켜보면서 멀리서 힘이나 쓰던 녀석이 갑자기 내려와서 앞을 가로막는다?
부하들은 이미 반이나 죽었는데?
부하들의 목숨이 아까워서라면 진즉에 내려와서 막았겠지.
뭔가 믿을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다면, 거래는 불가능하겠군.]
상대가 믿는 패를 꺼낼 것이다.
담담한 혈주의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 순간, 그 발밑을 집어삼키는 짐승의 아가리가 보였다.
사람의 팔만 한 송곳니가 난 거대한 주둥이가 설천위가 있던 자리를 물어뜯었다.
발판을 만들어 허공에 선 설천위는 일렁이는 혈주를 바라보다가 이내 이변을 깨달았다.
“……너?”
[안타깝지만, 너를 이곳에서 잡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설천위가 죽이려고 했던, 남은 백오십 정도의 그릇이 전부 죽었다.
그들의 호흡과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인지한 설천위는 혈주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혈주가 왜 시간을 끌었는지도.
혈주의 발아래로 거대한 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한쪽 눈과 한쪽 팔이 한계였다. 수십 년을 걸쳐 만들어 낸 그릇의 절반을 사용해도 고작 이 정도지.]
약간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일렁이는 혈주의 몸이 변한다.
일렁이는 부정형의 몸에 붉은 피부로 된 인간의 것과 같은 팔이 하나 돋아나고, 부정형의 몸체에서 유일하게 선명하던 눈 한쪽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한쪽 눈.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혈주의 발아래 그어진 선이었다.
설마,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번뜩!
거대한 선이 열리며, 고양잇과 짐승의 그것과 같이 세로로 쪼개진 홍채를 가진 거대한 눈동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커헉!”
몸 안의 피가 치솟는 감각과 함께 설천위의 몸이 휘청거렸다.
조금 전에 막아 낸 권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피를 뒤트는 힘.
즉시 영력과 패기를 더욱 강하게 집중시켜 피가 뒤틀리고 사라지는 것을 막은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더럽게 까다롭네!”
눈 한 번 응시 당한 것만으로 이런 충격이라니.
과연 신화시대에 신들에 의해 그 육체가 연옥에 처박힌 괴물다웠다.
자신이 날뛰는 와중에도 은밀하게 연옥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술법에 능하면서 육체의 일부를 되찾은 상태.
고작 팔 하나일 뿐이지만…….
‘막아야 한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연옥이 완전히 열려 완벽하게 현신한 혈주는 현경급의 고수들로 파티를 짜서 달려들어도 몇 명이나 죽을 정도의 괴물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죽인다!’
후퇴 따위는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발판을 박찼다.
허공에서 아래로.
쏘아지듯 날아간 설천위의 도가 단숨에 혈주의 몸을 뒤흔든다.
도에서 타오르던 칠흑의 불꽃이 그 부정형의 몸을 태워 갈기갈기 찢었으나, 혈주의 몸은 여전히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의 것과 같은 형체를 유지한 채 생기를 뒤틀고 그것을 피의 형태로 다루는 괴물은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지나간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것으로 끝인가?]
“……괴물 새끼.”
[틀린 말은 아니군.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설천위의 욕을 담담하게 받아 낸 혈주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아쉽군.]
혈주의 웃음과 함께, 팔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에 설천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떨어진다.
팔꿈치 바로 위쪽에서 잘린 팔이 땅으로 떨어진다.
[기껏 팔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어.]
자신의 손끝에 묻은 설천위의 피를 부정형의 혀로 핥은 혈주의 하나뿐인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