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542화-혈주 (5)
[선혼(鮮混).]
혈주의 한마디로 시작된 변화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변화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대지 위로 붉은 강이 흐르고, 하늘로 붉은 구름이 떠다니는 것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나 싶지만, 혈주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세상의 순리라는 것처럼.
자신은 재해가 아니라 그저 파도가 치고 태양이 내리쬐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 그 자체일 뿐이라고.
그리 말하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이었다.
“더럽게 까다롭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기에 설천위는 자신을 휘감은 영력을 들끓게 했다.
패기와 영력으로 주변 공간을 짓밟아 자신의 영역을 확고하게 다졌다.
자연스러움은 무에서도 추구하는 극치 중 하나.
현경보다 높은 경지의 무(武)를 지닌 자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정도밖에 없으나, 그들을 평가할 때 무림의 호사가들이 쓰는 단어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는 자연경(自然境)이다.
자연과 일치된, 스스로가 자연 그 자체가 된, 신선과도 같은 경지에 오른 이들.
자연체란 것은 예로부터 수많은 무인들이 동경하던 극치 중 하나였다.
그런 자연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무공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살수들의 무공이다.
상대가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만큼 깔끔한 암살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 안에 살의가 숨겨진 순간부터 몹시 위험해진다.
그렇기에 조심해야 했다.
도(刀)를 쥔 채 제공권을 극한까지 벼린 설천위는 차분하게 주위를 인지했다.
선홍색의 피가 흐르는 강.
피로 만든 것처럼 붉은 구름.
어느새 점차 붉어지고 있는 하늘.
그 위로.
“살벌한데.”
모든 것이 붉은 가운데 유일하게 푸른 초승달이 선명하게 빛났다.
질척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관이 없다는 듯 초연하게 빛나는 초승달은 깨끗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달을 온전히 인지한 순간, 설천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러움을 느낀 순간 경계했음에도.
“빠르네…….”
어느새, 자신이 붙잡은 공간 이외의 모든 곳이 붉게 변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공간 전체가 놈의 것으로 변해 버렸다.
[신(神)과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신(神)과의 싸움.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혈주의 말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으나, 혈주는 그런 설천위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흑암지규군과 싸웠다고 했나. 설마 그자를 기준으로 우리들의 수준을 가늠한 것은 아니겠지.]
화산(火山)은 무서운 존재이긴 하나, 그다지 흔한 존재는 아니다.
평생을 살면서 화산이라는 것의 존재조차 모르고 죽는 이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
즉, 화산을 토대로 한 존재로서 거듭난 흑암지규군의 격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연 연옥의 문을 넘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짜 강자들보다는 약했고, 인간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히 강하다는 조건.
그 조건이 맞아떨어져 흑암지규군이 무림맹으로 열린 문을 넘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실망할 것이다. 지금 네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전략이 아니라 오만이라는 소리이니.]
조소를 머금은 혈주의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천위가 영력과 패기로 붙잡고 있는 영역을 붉은 피가 침범하기 시작한다.
그 즉시 힘을 움직인 설천위는 마치 핏물이 옷감에 번지는 것처럼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오는 혈주의 힘을 차단했다.
그런 설천위의 반응을 보며, 혈주는 입꼬리를 비튼 채 물었다.
[너는 나를 아느냐?]
괴이와 괴이의 싸움은 지식의 싸움이다.
어떤 괴이라도 강점이 있고, 그와 반대로 약점 또한 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그 근원은 무엇인지, 그에 따른 약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자신보다 격이 떨어지는 존재에게도 패할 수 있는 것이 괴이끼리의 싸움이다.
그렇기에 괴이와 인간 사이의 싸움은 괴이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인간은 패배의 조건이 너무나도 분명하니까.
목을 베이거나, 심장을 찔리거나, 혹은 피를 많이 흘리거나.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요소는 너무나도 많고, 괴이가 죽음을 맞이할 요소는 제각각이고 그 방법 역시 제한적인 경우가 대다수다.
혈주의 물음에 담긴 의미를 단박에 깨달은 만독단주가 설천위를 말렸다.
[천위야, 위험하다……!]
웬만한 괴이라면, 설천위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을 거다.
만독단주가 홀로 쳐들어가는 설천위를 굳이 말리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의 설천위는 웬만한 괴이라면 얼마든지 찢어발길 힘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동격의 존재 혹은 그 이상의 존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술사로서의 경험과 지식이 얕은 설천위가 전투를 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낸다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다.
설령 자신이 돕는다고 해도, 상대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괴물이라면 자신의 조언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단은 물러나서 상태를 점검하고 백화단주까지 불러서 충분히 조사해 추후에 다시 조우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설천위를 말리고자 밖으로 현신하려던 만독단주는 자신을 붙잡는 무형의 기운에 결국 빠져나가지 못했다.
[천위! 너무 무리한 싸움이다!]
만독단주의 고함이 울려 퍼졌지만, 설천위는 꺼내 들었던 흑도를 땅에 꽂아 넣고 허리를 폈다.
“아냐고?”
히죽이며 입꼬리를 비트는 설천위.
당당하게 가슴을 편 상태로 혈주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난 승산 없는 싸움에는 판돈 안 걸어.”
[크르르르르!]
설천위의 손을 타고 올라간 패융이 단숨에 몸집을 키워 설천위를 휘감았다.
다른 것에 힘을 쓰기 시작하자, 설천위의 영역을 좀먹던 힘이 다시금 그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영역 싸움이 이젠 설천위 쪽의 일방적인 열세로 바뀌었다.
단숨에 몰려서 그 영역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칠흑의 대지 위에서 설천위는 뻗은 손을 자신의 가슴에 부딪쳤다.
미완의 어설픈 자성영역은 혈주에게 통하지 않는다.
지금 영력과 패기로 만들어 낸 영역이 혈주의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한 자성영역은 어설픈 자기주장일 뿐이고, 근거도 신념도 없는 자기주장은 같잖은 궤변에도 쉽게 흔들리는 법이다.
“전초전은 끝이다.”
힘을 가늠하는 것은 여기까지.
힘을 아끼고 천천히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끝났다.
이제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적을 먹어 치우는 사냥의 시간이다.
어느새 설천위를 휘감았던 패융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그 몸에 흔적으로 남기 시작했다.
용이 전신을 휘감은 문양이 새겨지고, 그 문양이 칠흑으로 일렁인다.
패도(覇道).
설천위가 가장 먼저 손에 넣었던 힘이자, 미약했던 시절부터 그의 목숨을 구해 줬던 힘.
그 힘을 몸에 두르고 설천위는 단숨에 주먹을 땅에 내리꽂았다.
그의 몸을 받치고 있던 결계가 단숨에 쪼개지고, 그 아래로 설천위의 몸이 떨어진다.
“지금부터는 학살의 시간이다.”
단숨에 양 떼 속으로 떨어진 설천위는 즉각 땅을 박찼다.
당연하다는 듯 결계를 넘어온 혈주의 힘이 설천위를 쫓아왔지만, 화경에 오르며 환골탈태를 거친 몸을 패룡기(覇龍氣)까지 사용해 강화시킨 설천위의 육체는 그런 추적을 단숨에 뿌리쳤다.
초고속 이동으로 마을을 질주한 설천위는 주먹을 휘둘렀다.
“컥……!”
심장에 구멍이 뚫린 마을 사람이 꼬꾸라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다시 땅을 박찬 설천위는 또 다른 사람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이 마을에 있는 사람의 숫자는 대략 300명.
모두가 혈사련에 몸을 담고 있는 광신도들이자, 수많은 의식으로 혈기를 몸에 쌓은 살아 있는 배터리들이다.
즉.
“일단, 우리 공평해진 다음에 시작하자고.”
이것들이 없다면, 혈주는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패융을 떨어트려 마을을 덮쳤던 것도.
피할 수 없는 광범위한 공격으로 혈주를 공격해 본 것도.
그냥 간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융의 공격으로 혈주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이 쓸 수 있는 공격 중 최상위권에 위치한 기술로도 혈주의 몸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지 못함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애초의 계획이 그것이었고.
굳이 많은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면 흘리지 않겠지만.
흘려야만 한다면.
“수천이라도 죽여 주지.”
그것이 내가 걷는 패도(覇道)이니.
검게 물든 그 길은, 피가 굳어 만들어진 칠흑의 혈로(血路)다.
또다시 몇 명의 적들을 순식간에 죽인 설천위는 무공을 익힌 듯 날카로운 기세로 달려드는 적을 마주하며 웃었다.
“내가 괜히 무공을 익힌 게 아니라서.”
고작해야 초절정 혹은 절정 정도라면, 내 앞에 서기엔 무리가 있지.
달려드는 초절정 고수의 검과 몸을 단숨에 베어 버린 설천위는 왼쪽으로 파고드는 절정 고수의 주먹을 왼손으로 받아 내서 순식간에 손목을 붙잡고 으스러트리며 꺾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끔찍한 고통에 상대방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설천위는 그대로 발을 차올려 그 가슴을 함몰시켰다.
순식간에 고수 두 명을 절명시킨 설천위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혈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겠어?”
도발과 동시에, 아니 그 전부터 움직였을 것이 확실한 피의 강이 설천위의 발에 질척이며 달라붙었다.
패기를 전신에 두른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발을 털었다.
“그렇게 깨작깨작 공격하는 거로는 안 된다니까.”
[네놈…….]
“널 아냐고 물었지?”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혈주를 보며, 설천위는 단숨에 도망치는 다른 적을 죽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넌 날 아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정의(正義)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인지.
이 자리에서 너를 놓치면, 그로 인해 내 소중한 이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인지.
“너도 날 몰라.”
넌 모를 것이다.
아니, 이제 알게 됐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눈으로 보고 확인했으니까.
도망치는 적들을 베어 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넌 딱 봐도 알겠어. 몸뚱이도 없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반푼이라는 걸.”
설천위의 조롱에도 혈주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혈주는 육체가 연옥에 봉인된 상태이기에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에 반해 제대로 된 근접전을 할 수 없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출력을 높인 술법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보고 있어. 애지중지 키워 온 밭이 전부 망가지는걸.”
상대가 그 출력을 견뎌 낼 수 있는 존재라면 별다른 힘을 쓸 수 없음을.
그리고 그것을 설천위가 간파했다는 점에서 혈주는 확신했다.
설천위는 자신을 알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적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이쪽을 공략할 방법을 찾는다.
공격을 견뎌 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기에 어떻게든 제압할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것이 정상이다.
허나, 설천위는 그런 과정 따위 전부 생략한 채 자신의 공격을 견뎌 내며 밑에 있는 부하들을 처리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혈주에게 당장 위협이 되진 않더라도 길게 보면 그 힘을 깎아서 승산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라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판단 속도였다.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밑에 있는 마을이 자신의 힘을 이루는 일부라는 것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혈주는 그 즉시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피로 이루어진 강물이 치솟고,
붉은 구름에선 혈우(血雨)가 쏟아진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생명.
피는 고대로부터 생명이니.
[오만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피에서 깨어난 망자들이 설천위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