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화
541화-혈주 (4)
공간이, 세상이 일그러진다.
결계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이들은 세상이 비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여겼던 결계가 불안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을 정도로 저 위에 있는 것은 인간의 눈에 담아선 안 될 괴물이었다.
검은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칠흑의 선이 설천위의 주위를 완전히 잠식한다.
[과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주는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술사로선 확실히 옛날에 날뛰었던 혈패황이라는 자보다 더한 괴물이구나.]
무려 제천대성이 나서서야 겨우 막아섰던 그 괴물조차 패기와 영력만으로 이리 공간을 일그러트리진 못했다.
허공에 생겨난 무수한 칠흑의 선.
영력이 패기와 뒤섞이고 압축되어, 그 공간을 먹어 치운 결과물이 저것이다.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영력이 담겨 있을지 쉽사리 감을 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패도(覇道)로구나.]
힘의 상징.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압도적인 힘의 현현이다.
하지만, 설천위는 혈주의 솔직한 감탄에 오히려 미간을 찡그렸다.
상대가 여유를 잃지 않았으니까.
전력을 제대로 풀어놨음에도 ‘오, 좀 치는구나.’ 정도의 반응만 돌아온다는 건 확실히 좋지 않은 신호다.
상대방에게 이 정도의 힘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좋지 않냐?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상대가 괜히 기 싸움에서 밀리기 싫어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이 정도는 막아 낼 여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이다.
어떤 전투라도 기본은 정보전이다.
상대를 더 많이 아는 자가, 스스로를 더 많이 아는 자가, 상황을 더 많이 아는 자가 결국에는 승리한다.
힘과 기술은 그 지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는 도구일 뿐.
그러니.
“후우.”
일단은 천천히 가자고.
* * *
공간을 씹어 삼킬 기세로 영력을 뿜어내던 설천위가 호흡을 내뱉는 순간.
결계 위의 풍경은 또다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칠흑의 비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하나하나 무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검으로, 어떤 것은 도로, 어떤 것은 창으로, 어떤 것은 비수로.
찌르고 베는 형태의 무기들이 칠흑의 선에서 줄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수천에 이른 무기들이 순식간에 결계 위를 까맣게 물들였다.
[허허, 이건 참…….]
[무(武)와는 동떨어져 있으나, 강함은 충분한 기술이구나.]
설천위의 곁에서 무기로 만들어진 먹구름을 바라보던 혼들이 혀를 차며 감탄했다.
일당백의 무림인들이 왜 황실을 두려워하는가.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쏟아지는 화살과 끝없이 밀려오는 창끝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武)는 강함으로 이어지지만, 모든 강함이 무(武)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최강의 무인도 자신보다 강한 힘에 패배할 수 있다.
한 손으로 무너지는 댐을 막을 수 없듯이.
그런데 설천위는 홀로 무너지는 댐을 만들어 버렸다.
칠흑의 무기들이 그 날 끝을 혈주에게로 향했고.
요동치는 영력이 단숨에 가라앉으며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완벽한 고요.
그 고요를 마주한 혈주의 시선이 칠흑으로 이루어진 무기의 장막을 뚫고, 그 안에 서 있는 설천위를 직시한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린 설천위가 손가락을 겨누는 순간.
혼이 떨릴 정도의 오한과 함께 혈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크로로로로로!!]
하늘에 떠 있던 패융의 포효와 동시에 칠흑의 무기가 새까만 면이 되어 혈주를 향해 쏟아진다.
댐을 무너트린 격류처럼 쏟아지는 무기들이 단숨에 혈주를 집어삼켰다.
혈주의 뒤에 있던 산까지 순식간에 검은 격류에 휘말려 칠흑으로 물들었다.
도저히 현실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광경에 마을에 있던 이들은 경악했고, 설천위의 곁에 있던 혼들마저 감탄을 토해 냈다.
이윽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쏟아지던 무기의 격류가 멈췄다.
수백 수천의 무기가 꽂혀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게 된 혈주와 그의 뒤로 펼쳐진 칠흑의 산은 그야말로 지옥의 검엽(劍葉)을 보는 듯했다.
사방 천지에 깔린 날붙이들은 그 위를 걷는 죄인들의 사지를 자르고, 그 피조차 칠흑이 삼켜 버릴지니.
저 안에서 누군가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허나.
[크로로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존재가 있었다.
포효와 함께 그저 기운을 뿜어내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던 패융이 그 거체를 떨궜다.
지옥의 검엽 위로 떨어지는 칠흑의 용이라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설천위의 곁에 있던 혼들마저 얼이 나간 그 순간.
──────!!
이미 소리의 단계를 뛰어넘은 것 같은 강렬한 굉음이 사방 천지를 뒤흔들었다.
대지와 결계에 박혀 있던 모든 날붙이가 그 충격에 뽑히고, 겨우 서 있던 나무들 또한 비틀거리며 그 뿌리를 드러냈다.
그 충격의 중심.
달려든 패융의 어금니를 한 손으로 막아 낸 존재가 그 부정형의 몸을 일렁였다.
[과하구나. 인간의 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과한 힘이로다.]
어깨에 겨우 박혀 있던 비수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혈주는 부정형의 몸을 일렁이며 표정을 바꿨다.
미소.
[너의 혼이라면, 굳이 황궁에서 열리는 연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부정형의 얼굴로 누가 봐도 미소라고 읽어 낼 수 있을 표정을 지은 혈주의 팔이 부풀어 올랐다.
“패융!!”
그 순간, 설천위는 즉시 패융의 혼을 끌어당겼다.
패융의 혼이 빠져나가고, 설천위의 영력과 패기로 만들어진 빈껍데기의 육체로 혈주의 힘이 쏟아진다.
건강한 피처럼 붉은 선홍색의 빛이 소리조차 없이 패융의 육체를 지워 버린다.
겨우 패융을 탈출시켜 자신의 몸에 두른 설천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터는 혈주를 노려봤다.
[손이 빠르구나. 그걸 믿고 수족들을 부리는 것 같다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게다. 네가 우리를 견딘다고 해서 네가 부리는 것들까지 우리를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니.]
담담한 어조로 충고하는 혈주의 눈동자는 지극히 평온하고 잔잔했다.
그 눈을 마주한 혼들은 단박에 그의 충고가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혼을 집어삼키는, 그야말로 인간을 뛰어넘은 무언가.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그러한 존재였고, 저 앞에서 육체도 없이 방황하는 인간의 영혼 따위 아무런 힘조차 없었다.
가장 정신적 수양이 부족한 암영의적은 황급히 설천위의 내면으로 돌아갔고, 이를 악물고 버티던 다른 이들도 끝내 눈을 깔았다.
끝내 굴복하고 시선을 피한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설천위의 힘에 감탄했던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깨달았다.
인간은 한 손으로 무너진 둑을 막을 순 없지만, 부처는 한 손으로 무너진 둑을 저수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 아니라.
[선혼(鮮混).]
신(神)의 영역에 발을 내디딘 무언가다.
* * *
우 참정의 장원에 있는 별채.
운주와 고 호위는 그곳에 머물기로 했고, 설란과 연화 또한 호위를 목적으로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런 별채의 작은 정원.
“그럼 황제 폐하는 살아 계신 거야?”
“호위 무사들이 안가로 잘 데려가셨을 거다.”
“아하.”
쪼그려 앉아서 졸졸 흐르는 냇물을 구경하던 연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도 동생을 많이 믿었나 보네. 중요한 금패도 맡기고.”
“……믿음직한 사람이긴 하지.”
연화의 나이는 18살, 황제는 17살이니 나이상으로 연화가 누나는 맞았다.
“그나저나, 말한 대로 되긴 하는 거야? 서신 좀 보냈다고 병력을 움직일까?”
연화의 물음에 운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심이 높은 이들로 엄선해서 보냈으니 반 이상은 올 거야.”
“그럼 반 정도는 안 올 수도 있다는 소리네? 위험하지 않나?”
“설령 정보가 새는 걸 감수하더라도, 확실하게 세력을 모으는 게 더 중요해.”
지금의 황궁은 정치 싸움에 악귀들의 개입이 더해져서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복마전이 됐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이익과 명분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인데, 악귀에게 홀린 자들이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변수를 만들어 내니 도저히 흐름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현 황제가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르고도 무려 7년이나 제 몸을 지키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의외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챙길 사람은 챙기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서 살아온 삶.
그 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어준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의 피가 형장에 흐르는 것을 보고 밤새 얼마나 소리 죽여 울었던가.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놈들의 시선을 돌리느냐. 황궁을 좀먹은 자들을 얼마나 빠르게 처리하느냐. 이 두 가지겠지.”
서신을 보내 북쪽의 고관대작들을 자극한 건 그 때문이었다.
황궁 탈환은 단순히 힘으로 밀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악귀들을 처리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그 악귀에게 빌붙어 자신의 배를 채우려던 망종들.
황제의 권력을 탐해 역모의 꿍꿍이를 숨기고 있던 반역자들.
그들을 전부 처리해야만 싸움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병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황궁의 병력을 외부로 빼내려면, 놈들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대군이 필요해.”
피할 수 없다면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외부로 병력을 빼내는 것으로 생기는 이점은 셀 수도 없이 많아. 우선 별동대의 진입이 편해지고, 안에서 상대해야 할 적의 숫자도 줄어들지.”
“적이 제물로 사용할 목숨의 숫자도 줄어들고.”
제물.
그 말에 운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음지에서 흐르는 피의 강은 황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짙다.
당장 황궁에 위험이 닥치면, 위기를 느낀 적들은 황궁의 병력들을 제물로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지키려 들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면, 제물이 될 인간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병력을 전부 빼내는 건 불가능해. 필연적으로 전투는 벌어질 수밖에 없지.”
씁쓸함이 담긴 운주의 목소리에 연화는 별다른 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외부에서 위협해 병력을 빼낸다고 해도 황궁에 병력이 아예 빌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별동대니라.”
가장 경비가 삼엄할 때, 그때 황궁의 권력자들이 모인 곳을 기습해 그들을 전부 죽이거나 사로잡는 것.
그게 황궁을 뺏는 첫걸음이다.
그다음은 황제 쪽에 명분이 있으니, 베어 낼 자들은 베어 내고 품을 자들은 품으면 된다.
문제는 그 시작 자체가 어렵다는 점인데…….
“이 누나만 믿어. 은밀하게 옮겨서 싹 정리해 줄 테니까!”
“후후, 그래. 누님만 믿지.”
자신 있게 가슴을 펴는 연화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운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연화는 무거운 주제는 잊으라는 듯 장난을 쳤다.
한편, 두 사람이 있는 정원 앞 정자에 앉아 있던 설란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쟤가 눈치가 없는 애가 아닌데.’
그때 천위가 말하는 걸 못 들었나?
무공이 약해서 청력이 그리 좋지 않아 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눈치를 보면 짐작할 수도 있는데…….
짐작했다면 황제한테 누나라고 부르라고 시킬 리는 또 없고.
“으음.”
고심에 빠진 설란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하자, 그 곁에 서 있던 고 호위가 작게 웃었다.
“깊게 생각하지 마시오. 순리대로 흘러갈 테니.”
“……예상보다 너그러우시네요.”
설란의 대답에 허허롭게 웃은 고 호위는 자신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힘든 삶을 살아오신 분이오.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 한 가지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지 않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연화, 쟤가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저렇게 대할 수 있을지가 문제지.
한숨을 내쉰 설란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 돌아오니?”
이 상황을 대신 책임져 줄 동생이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