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1화
540화-혈주 (3)
강렬한 충격과 함께 공간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솟구친 선홍색의 기운과 흑룡이 맞부딪치면서 터져 나오는 충격과 굉음에 그 아래 있는 작은 마을이 또다시 요동쳤다.
다만, 이번에는 그 충격이 그리 거세지 않았다.
혈주가 만들어 낸 결계가 마을의 지붕을 덮어 그 충격을 완화시켰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배터리라니, 참 발상 독특하네.”
[배터리? 그게 뭐냐?]
“그런 게 있어요.”
혼들의 질문을 대충 넘긴 설천위는 달려가면서도 끊임없이 술법을 펼쳤다.
패융을 이용해 계속해서 하늘에서 공격하고, 달려가면서도 끊임없이 말뚝 형태의 흑관을 쏘아 내어 공격했다.
마을에서 느껴지는 혈기에 반쯤 마을을 아예 날려 버릴 생각으로 했던 공격을 혈주가 막아 낸 시점부터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다 싶으면 마지막에 힘을 빼려고 했는데, 혈주 놈이 숨지 않고 나와 준 덕에 일이 단순해졌다.
“다 때려 부수고, 저놈의 목도 따고 돌아갑니다.”
멀리서 마주친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형체가 흔들리는 부정형의 육체.
그 안에서 일렁이는 눈동자.
혈주가 맞았다.
혈사련의 최종 보스.
연옥에 그 육체가 갇힌, 멸(滅) 중에서도 최상급의 위치에 있는 괴물.
풀려나면 안 되는 괴물 중 괴물.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다면 그만한 호재도 없다.
설령 연옥이 열린다고 한들 경계해야 할 적의 머리가 하나 줄어든 셈이니까.
그러니, 무조건 죽인다.
그렇게 결심한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마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을 둘러싼 결계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결계 위를 달려서 산 중턱에 있는 혈주에게로 향한다.
어느새 손에 뽑아 든 흑도가 결계 위를 긁어내며 불꽃을 피워 올린다.
피어오르는 불꽃과 함께 달리는 설천위의 앞으로 붉은 강시가 솟구쳤다.
혈사련의 전력 중 하나인 강시다.
뭐, 음지의 조직은 개나 소나 다 쓰는 강시지만, 혈사련의 강시는 약간 개성이 있었다.
키아아아아아!
체내에 피를 돌리는 혈강시의 움직임은 보통의 강시보다 빠르고 부드럽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파고드는 강시의 목을 흑도로 잘라 낸 설천위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결계 위로 기어 올라오는 강시들이 좀비처럼 몸을 비틀며 달려들었다.
목을 베고, 쓰러지는 강시의 어깨를 강제로 당겨 발판으로 삼아서 한 발로 뛰어오른다.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내지른 발차기에 다른 강시의 목이 돌아갔다.
허공에 뜬 설천위를 향해 강시들이 즉각 달려들었으나, 설천위는 회전에 속도를 더해 도를 휘둘렀다.
이젠 완숙한 경지에 오른 제공권이 자신에게 오는 모든 공격을 통제한다.
회전하며 휘두른 일격으로 강시들을 말 그대로 양단해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발아래 발판을 만들어 허공을 박찼다.
쏘아지듯 날아가는 설천위를 노리고 밑에서 솟구친 강기가 설천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대로 허리를 끌어안으려는 강시를 피해 설천위가 결국 도를 휘둘러 놈의 목을 베고, 허공으로 튀어 올라 제동을 거는 순간.
콰아아앙!!
다시 한번 맞부딪힌 선홍색의 힘과 패융의 충돌이 결계를 뒤흔들었다.
키아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강시들이 흔들리는 결계를 뚫고 올라와 달린다.
“후우우우…….”
베어 낸 강시의 위로 착지했던 설천위는 전신에 패기를 두르고 호흡을 골랐다.
“흡.”
그리고 내뱉던 호흡이 멎는 순간, 설천위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설천위의 도에 맺힌 하얀색의 불꽃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살과 뼈를 가르는 절삭음조차 없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드는 강시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 설천위는 어느새 결계의 절반 이상을 지나갔다.
땅에 서서 자세를 고친 설천위가 도를 허공에 휘두르는 순간.
파파팍!
설천위의 궤적을 따라 남았던 순백의 꽃잎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시들의 목을 베었다면 목에서부터, 몸을 베었다면 몸에서부터.
선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적을 베고, 태우기 시작했다.
[훌륭하다.]
[아름답구나.]
혼들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설천위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결계의 절반을 넘게 지난 지금,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구나. 흑룡단주. 아니, 설천위라고 부르는 게 더 좋나?]
오만함을 품고 내려다보는 시선.
이제는 서로의 목소리가 충분히 닿을 정도의 거리임에도 설천위를 상대로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부정형의 얼굴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 미소와 마주한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자는 신(神)이다.
혈사련이라는 조직이 어째서 종교의 색까지 지니고 있는지 체감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이 존재를 마주한 뒤에 신앙을 품지 않을 인간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경외(敬畏)라는 감정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그 존재감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부정형의 눈과 마주친 설천위는 되레 입꼬리를 비틀었다.
“많이 약해졌구나. 혈주.”
[그럼에도 아직 다 익지 않은 어린 괴물을 사냥하기엔 충분하다.]
“그건 흔히들 하는 착각이고.”
가볍게 숨을 뱉어 낸 설천위는 흑도를 늘어트린 채 힘을 끌어올렸다.
[크로로로로로로로로로!!]
설천위의 변화에 맞춰 패융이 포효한다.
기실 흑암지규군을 흡수하고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갈고닦은 뒤에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내 본 적이 없었던 전력을.
“누구나 처맞기 전엔 그럴싸한 계획이 있는 법이지.”
설천위는 풀어놓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설천위의 발아래 깔린 결계에 금이 갈 정도의 영력이 공간 전체를 짓누른다.
너무나도 강대한 영력은 압력이 되고, 그 영압은 이제는 보통의 사람조차 볼 수 있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공간을 수놓기 시작했다.
패기와 살기 그리고 영력이 뒤섞여 만들어진 칠흑의 비가 흑룡의 포효를 타고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 * *
“마님.”
“응?”
“주인님이 황보세가로 가 보시라는데요. 중요한 일이니 핵심 전력을 반 이상 끌고 가시래요.”
“……그래?”
본래 간단한 뜻 정도밖에 전하지 못하던 식령과의 통신을 설천위는 고작 몇 달 만에 완성시켰다.
아직도 식령 쪽에서는 힘이 부족해 먼 거리에서는 의사를 전달하기 힘들었지만, 설천위는 이제 꽤나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식령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흑룡단 집무실에서 업무를 돕던 청아의 전언에 유예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설천위가 직접 핵심 전력을 이끌고 가라고 지시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
황보세가, 황실.
두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일의 무게를 얼추 가늠한 유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귀를 부르세요. 그리고 음…….”
잠시 고민하던 유예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셋만 데려가도 되겠죠.”
황보세가와 황실 간의 갈등이다.
병력을 이끌고 가는 것보단 고수로 이루어진 정예만 가는 게 낫겠지.
무엇보다 흑룡단의 인원들은 각지로 움직이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민생 구제와도 맞닿아 있어서 무해대사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그쪽 일을 맡기는 게 나았다.
애초에 설천위가 흑룡단을 만든 목적도 그랬고.
필요한 순간에 중요하게 움직여야 할 것은 판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강자다.
“불렀어?”
“출정입니까?”
“드디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온 유예린은 자신을 반기는 삼인방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하는 눈치네요?”
“좀이 쑤시던 참이니까…….”
“언제든지 대응하려면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역시 너무 가만히 있는 건 좀…….”
“서 부단주나 철백 형님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지만, 저희는 아니니까요.”
서하영이나 철백과 달리 상시 병력으로 흑룡단에 주둔하고 있던 삼인방이다.
좀이 쑤실 만도 하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문을 나서며 웃었다.
“황실이랑 엮인 일일 수도 있으니 다들 몸가짐을 조심하세요.”
* * *
“크아아아아아! 빌어먹을 설가 놈아!!”
꼬박 하루를 혹한진에 갇혀 있었던 황보중은 기어코 깨진 얼음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두들겨 패서 기절시킨 아들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온 황보중은 아무도 없는 풍경에 이를 악물었다.
“이놈들이!”
가주랑 소가주가 결계 안에 처박혀 있으면 땅에 붙어서라도 이곳을 지켜야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열받은 황보중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일단 가문으로 돌아간다.’
상황이 상황이다.
가문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쳤고, 관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일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건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가문의 상황을 정상화시키는…….
“아! 나왔다!”
“으음? 너는?”
“어휴, 뭐 그렇게 나오는데 오래 걸리는 거예요. 아저씨 때문에 꼬박 하루 동안 결계를 유지했다고요.”
“아, 아저씨?”
너, 흑룡단 부단주 아니냐?
패력단주한테 아저씨라니.
“이……!”
무엄한 놈을 봤나!
눈을 크게 뜬 황보중이 호통을 치려는 순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가문도 제대로 관리 못 하는 사람은 밖의 신분을 내세울 자격이 없어요.”
황보중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찔러 온 연화의 공격에 황보중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자식 놈들이 가문을 똥통에 처박으려 한 것은 제대로 그들을 보살피지 못한 아비의 죄다.
“……상황을 설명해 다오.”
“네, 아저씨. 일단 따라오세요.”
순순히 굽히는 황보중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그대로 그를 이끌고 관청 안으로 향했다.
“일단 가면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황보세가와 관에 잠입해 있던 세작의 대부분은 처리했어요.”
“벌써?”
내가 갇혀 있어서 시간 감각이 틀어졌나?
고작 하루가 지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고작 하루 만에 다 솎아 냈다는 말이냐?”
“예? 아뇨?”
허어, 아들의 변화에 얼마나 흔들렸으면 감각이 무뎌져서 시간도 제대로…….
“아저씨 가두고 바로 해결했어요. 단주님이. 한 일각(약 15분) 정도 걸렸나?”
“이, 일각?”
사실 그것보다 더 짧았던 것 같지만,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대충 다 솎아 냈는데, 정말 아무런 것도 익히지 않고 잠입한 세작도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으음……. 알겠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일 처리가 그리 빨랐다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없었다.
“지금 관청으로 가는 건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해결해야 할 문제?
연화의 말에 의문이 고개를 들었지만, 황보중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이내 회의를 위한 넓은 방에 도착한 황보중은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관리들과 가문의 무인들이 얌전히 앉아 있는 게 아니겠는가.
거기다 초생단의 부단주와 우 참정이 있었고, 가장 상석에는 웬 정체 모를 청년이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패력단주님, 잘 오셨습니다. 마침 패력단주님의 동의가 필요한 일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황보중의 등장을 반긴 설란은 자신의 옆자리를 그에게 내어주었다.
모두가 상석에 청년이 앉아 있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 눈치껏 설란의 옆에 앉은 황보중은 바로 이어지는 설란의 설명을 듣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서, 패력단주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잠깐! 지금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역모라니, 무림맹에선 아무런 정보도…….”
“사실이다.”
툭.
황보중의 앞에 놓인 금패를 보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뒤집어 ‘天(천)’이라 새겨진 것을 확인한 황보중은 왜 청년이 상석에 앉아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까득!
“황보세가는 대의(大義)가 뭔지 알고, 양심(良心)이 무엇인지 아는 가문이다.”
거대한 가문을 만들어 내며, 오물도 묻고, 죄 또한 지었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은 아이들을 외면하고 적에게 붙을 외도는 되지 않는다.”
제 식구마저 버리는 외도(外道)는 절대 아니다.
황보세가가 황궁 찬탈 작전에 정식으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