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539화-혈주 (2)
천마가 설천위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하지 않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였던가.
사실 설천위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혼들은 심심하면 떠들기 바빴고, 내면세계에서도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논검 등을 하는 등 꽤나 시끄럽기에 기본적으로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흘려듣기 때문이다.
거기다 어느 시점부터 그들의 조언이 가장 절실했던 전투에서 더 이상 그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게 됐고, 당연하게도 설천위가 그들의 조언에 기대는 일도 사라졌다.
이제는 수많은 것들을 홀로 해낼 수 있는 설천위에게 스스로 죽은 자임을 자각하고 있는 혼들은 그의 행동에 크게 개입하지 않게 되었다.
옆에서 떠들어 봤자 죽은 자의 넋두리밖에 되지 않음을 알기에 혼들은 하나둘 설천위에게 조언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천마였고, 가장 강한 천마조차 조언을 아끼니 다른 혼들의 조언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거의 잡담 정도만 하거나, 설천위가 고민할 때 자신들의 의견을 살짝 내비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근래에 설천위가 혼들과 하는 건 심상세계에서 하는 간단한 대련이거나 청랑과 노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 설천위가 직접 천마를 불러냈기에 다른 혼들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들이 떠들 때가 아님을 알았기에.
[무슨 일이더냐?]
“지금부터 상대하는 놈이 상당히 살벌한 놈이라서요. 혹시 몰라서 도움 좀 요청할까 했죠.”
[지금 네 실력이라면 내 도움이 더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이야.]
“그건 아니죠.”
천마의 말에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요동치는 힘.
가볍게 쥔 주먹 안으로 요동치는 영력과 패기가 느껴진다.
이를 악물고 쌓아 온 내공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
혼을 먹어 치우는, 인세에 존재해선 안 될 힘.
“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거야 상황에 따라서 하는 거고, 그 전에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가볍게 발을 구르며, 설천위는 덤덤한 표정의 천마를 보며 물었다.
“혼원패공(魂元覇功), 천마신교의 무공이죠?”
* * *
신화시대.
인간이 너무나도 미력해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인간은 그야말로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키워지고, 필요에 따라 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
그런 가축.
치욕을 치욕이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몸을 낮게 낮추고 사는 것이 최선이고 당연했던 세상.
그 세상 속에서 그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못한, 소림과 무당의 시조들보다도 더 이전의 시대에 존재했던 자들.
누군가는 이름 없는 선인(仙人)으로 기억되고, 누군가는 이름 없는 성인(聖人)으로 기억하는 존재들.
그리고 스스로 악(惡)이 되길 자처했던 자들까지.
신화시대에서 신을 몰아내는 것은 꿈과 희망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악(惡)의 정점에 섰던 것이 만마(萬魔)의 지배자.
스스로 마(魔)의 정점에 오른 인간.
천마(天魔)였다.
[혼원패공은 내가 창안한 무공이자 내 정수였던 무공이다.]
악귀를 먹어 치우고, 그것을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는 것으로 힘을 쌓아올리는 무공.
그것은 무공이자 술법이었고, 신화시대를 살아온 천마는 딱히 구분하지도 않고 구사하던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던 시대였으니까.
[나는 신화시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결국 목숨을 잃었다. 수백 년을 살았던 목숨으로도 신들과의 전쟁은 힘에 부쳤던 게지.]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로 고개를 저은 천마는 여전히 달리고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내가 죽고 몇 대가 지나서 문제가 생겼다.]
“폭주했나요?”
[그래. 받아들이는 혼을 전부 옳게 지배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후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혼원패공의 최대 단점.
내면으로 흡수한 혼을 지배하는 데 역량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당장 설천위만 해도 높은 정신력과 부동심 스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손휘나 천희만락궁의 궁주의 혼을 흡수했을 때 상당히 위험했을 거다.
신화시대를 견디고 자리를 지키던 악귀들이 그들과 비교해 크게 부족하진 않았으리라.
[고민을 거듭하는 후대를 보다가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무공을 바꿨군요.”
[그때는 신녀라 하여, 내 말을 전해 줄 아이들이 있었다. 혼원패공을 완전한 무공으로 바꾸고, 마(魔)를 지배하는 공능만을 남겨 전해 주었다.]
“그게 천마신공이고요?”
[그래.]
천마의 대답에 조용히 듣고 있던 혼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천마신공에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럼 마공을 익힌 녀석들은?”
[네 상대가 되지 못한다. 혼원패공은 모든 마(魔)의 정점에 선 진짜 천마(天魔)의 힘이니까. 단, 마(魔)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녀석들에겐 절대적이진 않을 게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뭐, 이름만 들었던 천마신교가 뜬금없이 튀어나와도 문제는 없다는 거 아니야.
좋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지금 벽에 막힌 저한테 해 줄 조언도 있겠네요?”
현재 설천위의 혼원패공은 8성에서 막힌 상태다.
이만한 경지를 이루고도 고작 8성밖에 안 되나 싶지만…….
[혼원패공은 무와 술이 섞인 학문이다. 순수하게 무의 학문인 천마신공과는 결이 다르지.]
“그럼 무공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 혈패황인가 하는 인간은 술사도 아닌데, 대성했다면서요?”
[그 녀석은 술사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너만 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됐다.]
“더러운 세상!”
그 인간은 그럼 없는 게 뭐야!
[거기다 녀석은 말년……이라고 하기에는 젊었지만, 아무튼 마지막에 만 단위의 인간들을 죽이며 그들의 혼을 전부 흡수해 억지로 영적인 역량을 크게 올렸다. 그 덕에 최후의 결전 전에 혼원패공을 대성한 것이지.]
“그런데 그 인간도 천마 할배가 알려 줬어요? 천마신교에서도 사라진 무공을 어떻게 익혔데?”
[천마신교의 오래된 유적 터에서 찾았더구나. 나도 거기에 있다가 그자와 마주쳐 몰래 따라붙었고.]
혈패황이라 불렸던 사내를 떠올린 천마는 추억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쾌한 사내였다. ……혼원패공의 부작용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인지 적에게 과한 잔인성을 보여 그게 문제가 되어 파멸로 치닫긴 했지만.]
혼원패공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강대한 정신력을 요구하기 때문인지 사람이 무감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당장 설천위만 봐도 대체 왜 저리 고문 같은 것에 담담한지 의문이 들 정도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또 자신의 사람에게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부작용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싶은, 참으로 애매한 부작용이지만.
사람이 차분한 것이 단점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그 사람의 특색이지.
[여하튼, 그자가 완성한 혼원패공과 네가 완성할 혼원패공은 그 결이 다를 것이다.]
“중심의 차이 때문에요?”
[그래. 그자는 극(極)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신(武神)이었다. 아마 혼원패공이 아니라 다른 무공을 익혔더라도 그때 당시의 전투를 거의 재현할 수 있었을 거다.]
물론, 혼원패공이 아니라 다른 무공이었다면 끝내 패하긴 했겠지만.
[그렇기에 그자는 혼원패공을 자신의 방식대로 발전시켰다. 무(武)를 중심으로 품은 혼들의 무를 쏟아 내는 방식으로 펼쳤지.]
패왕지로(霸王之路)라고 사내가 명명했던 그 기술은 가히 독보적인 기술이긴 했다.
무(武)를 술(術)로 승화시킨 그야말로 무학의 극치.
다만, 그런 방식은 설천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너는 네게 맞는 방식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걸 모르겠단 말이죠.”
혈패황, 그 괴물 같은 양반과 달리 이쪽은 한쪽이 과하게 처지는 형태다.
무(武)가 술(術)을 따라갈 생각은커녕 질질 끌려가는 형국.
그 둘이 조화롭게 얽혀 있는 혼원패공의 성장이 멈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흑암지규군을 흡수하며 영적인 부분이 팍 치고 올라간 덕에 균형이 더 일그러졌다.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고, 또 넘으면 무공까지 싹 다 해결될 것 같지만, 무공이 걸리적거려서 올라가지 못하는 묘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여러모로 미묘한 상태에 걸쳐 있었다.
“하여튼, 조금 부족한 게 많으니까 이번에는 천마 할배도 준비해 주세요.”
[허어, 내 손을 빌리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만.]
“그렇다고 죽을 순 없잖아요?”
달갑지 않아 하는 천마를 달래며, 설천위는 다시 달리는 일에 집중했다.
달리고 또 달려서, 꼬박 하루를 달린 뒤에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보세가가 있던 도시에서 두세 개 정도의 도시를 지나 도착할 수 있는 곳.
앙천산(仰天山).
예로부터 기이한 신령들이 깃드는 산이라 하여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 경원시하던 산에 도착한 설천위는 거침없이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흠.]
산속 동굴.
돌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가만히 사색에 잠겨 있던 혈사련주. 교의 사람들에겐 혈주(血主)라고 불리는 존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음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가만히 다가오는 존재를 느끼던 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 보면 알게 될 일이지.]
똑바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움직임에는 망설임 따윈 없었다.
함정이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오만한 저 행태에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순 없는 법.
혈주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혈사련의 부하들이 그 힘에 반응해 소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자신의 성.
설령 상대가 누구든 흙투성이의 발로는 침입할 수 없는 철옹성이다.
[흑룡단주, 네놈이라 할지라도.]
대충 누구의 수작인지는 감이 잡혔다.
흑룡의 송곳니로 자신을 사냥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피로 흑룡을 추락시키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네년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언여휘.]
어디선가 보고 있을 언여휘에게 나직이 경고하며, 혈주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따라 요동치는 영력이, 혈기가 동굴 밖 작은 마을의 하늘을 뒤흔든다.
하늘 자체가 무너질 것처럼 격하게 요동치며 그 힘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힘과 생명력을 토대로 만들어 낸 절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일격이 적의 심장을 노리고 준비된다.
적의 기습 따위 우스운 재롱으로 만들어 버릴 반격이 준비되는 그 순간.
수천의 세월을 살아온 혈주의 본능이 그를 움직였다.
반격을 위해 준비해 놓은 일격을 망설임 없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선홍의 일격은 언뜻 그가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었으나.
콰아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수준을 넘어 몸 전체가 충격에 떨리게 만드는 굉음이 허공에서 터져 나온다.
그 밑에서 혈주에게 힘을 보태던 이들이 놀라면서도 다시 혈주와의 연결에 집중하는 그 순간.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울려 퍼지는 용의 포효와 함께, 혈주와 연결되어 있던 이들의 심상이 크게 뒤흔들렸다.
단숨에 연결을 끊어 내진 못했으나, 그 연결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강력한 포효.
그리고 굉음이 지나간 뒤 드러난 하늘에서 광오하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흑룡의 존재에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동굴을 나와 밖에 선 혈주는 부정형의 몸체를 흔들다가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멀리, 기척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달려오고 있는 설천위와 눈을 마주친 혈주는 생각했다.
[과연, 오만할 자격이 있는 놈이구나.]
순식간에 그의 앞에 생겨난 붉은 벽에 박히는 검은 말뚝들이 아득바득 벽을 뚫고 파고드는 것을 보며, 혈주는 더더욱 힘을 끌어올렸다.
[연옥을 열어라.]
아무래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힘들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