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538화-혈주 (1)
포로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설천위는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부족한데…….”
“네? 왜요?”
황보세가나 관의 일은 대충 해결했으니까 천천히 하면 되지 않나?
설천위의 중얼거림을 들은 연화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놈들이 문제가 아니야. 이 뒤에 있는 것들이 문제지.”
심문이 벽에 가로막힌 이유는 간단했다.
금제.
술법으로 걸어 놓은 금제가 포로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웬만한 술법이라면 설천위가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그렇지 못했다.
그야말로 악의로 가득 찬 술법.
해제하든, 힘으로 밀어 버리든 어떤 방식을 쓰더라도 이 금제는 소멸의 순간 확실하게 피시전자를 죽이고 그 혼을 뒤튼다.
입안에 독을 숨기고 다닌다는 살수들보다 훨씬 지독한 방식이다.
독은 자의로 씹기라도 하지, 이건 뭐 그냥 인형만도 못한 취급이니.
“이 정도면 언여휘, 그 자식이 손을 쓴 게 확실한데…….”
문제는 ‘왜?’이다.
언여휘의 술법이 사용된 계획이니 그녀의 개입 자체는 이상하지 않지만,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부하들에게 금제를 거는 건 좀 이상했다.
이렇게 할 바엔 그냥 적에게 잡혔다고 자각하는 순간, 심장을 터트려 버리는 술법을 거는 게 효율이 훨씬 좋다.
아니 어차피 죽일 거, 복잡한 과정 안 거치고 처리하면 얼마나 깔끔한가.
언여휘가 그런 방식에 죄책감을 가질 인간도 아니고.
그런데도 언여휘는 굳이 귀찮음이 한가득인 방식으로 금제를 걸어 놨다.
마치.
‘나한테 풀어 보라고 도발하는 것처럼.’
이유가 뭘까.
초보적인 수준의 고문에 의해 피 칠갑을 한 포로들을 내려다보며 설천위는 고민에 빠졌다.
도발.
굳이? 왜?
이런 방식을 고집해서 언여휘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그…… 아직도 고민이시면 일단 치료부터 할까요?”
자신의 옆에서 입술을 우물거리는 연화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보적인 고문이긴 했지만, 연화 정도의 나이와 경험으로는 상당히 거북스런 광경이긴 했을 거다.
자신도 시스템적으로 주어진 정신력과 부동심 스킬이 아니었다면 이런 짓을 벌이고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니까.
원초적인 폭력, 아니 학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연화가 길게 봐서 좋을 모습은 아니었다.
“치우자. 일단, 너는 저기 둘 정도만…….”
끌고 가서 혼을 먹어 치워라.
거기까지 말하려던 순간, 설천위는 정지했다.
혼을 먹어 치운다.
지금 이들에게 걸려 있는 금제는 죽음뿐만 아니라 혼조차 뒤트는 형태의 것이다.
설천위가 그냥 죽이지 않고 금제를 풀 방법을 고민했던 이유가 이거다.
그냥 죽였다간 정보가 훼손될 테니까.
하지만, 만약 혼이 뒤틀리기 전에 흡수한다면?
“아무래도 괴연천식은 조금 아껴 써야겠다.”
“네?”
상대 술사를 먹어 치워 영력을 급격하게 보충시키는 방법을 이번에 알려 주려고 했지만…….
다음에 알려 줘도 충분하겠지.
고개를 갸웃하는 연화를 살짝 밀어내 공간을 확보한 설천위는 포로들의 앞에 서서 양팔을 펼쳤다.
드물게 집중하는 그 모습에 연화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뒤로 빠졌다.
설천위는 거의 모든 경우에 술법을 가벼운 손짓으로 펼친다.
그건 단순히 오만해서가 아니다.
정말 간단한 일이기에 그리할 뿐인 거지.
그런 사람이 마음먹고 펼치는 술법이라니,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거다.
애초에 보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설천위의 머릿속에서 태어나 완성된 술법에 어떻게 손을 보태겠는가.
그렇게 얌전히 뒤로 빠져서 요동치는 영력의 흐름에 감탄하던 연화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점점 더 영력의 기세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술법에 실패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줄어드는 영력에 연화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걸음을 내디디려는 그 순간.
“운 공자?”
그녀의 가슴께를 막은 팔에 연화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아무리 그래도 좀 남사스러운…….
“다가가선 안 된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볼을 붉히던 연화는 딱딱하게 굳은 운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지금 설천위의 주위는 고요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잠잠한…….
‘음?’
순간, 묘한 감각에 연화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꺾였다.
방금 뭔가 이상한……?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묘한 감각에 연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그 순간.
“온다!”
다급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운주의 품에 안긴 연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이해했다.
왜 운주가 이토록 경계했는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자신이 느끼지 못하던 것을 운주는 보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라!!]
혼을 쥐고 흔드는 것 같은 포효가 아득하게 세상을 뒤흔든다.
자신의 앞을 가린 운주의 어깨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설천위에게서 솟구치는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그리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포로들 전부를 휩쓸고 지나간 검은 무언가와 함께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사라졌다.
“후우우우…….”
깊게 숨을 내쉬는 설천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화는 이내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특기 분야였기에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전부 먹어 치웠어……!’
혼이 나간 것처럼 쓰러진 포로들의 몸에는 정말로 단 한 줌의 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 *
“응?”
황보세가의 무인들과 관리들을 두고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해 논의하던 설란은 기묘한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본능인지 무엇인지 모른 채 관리나 황보세가의 무인들 또한 설란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검은 무언가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욱! 우에에엑!”
“커흑!”
단박에 속 안의 것을 전부 게워 내는 관리나, 내상을 입은 듯 거친 기침을 토해 내는 황보세가의 무인들.
그들의 급격한 변화에 설란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 사태의 원인인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서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모습.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의 앞에 널브러져 있는 포로들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설란은 절로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원이 생기라곤 없는 얼굴로 넋이 나가 있는 포로들의 상태는 명백히 죽은 모습에 가까웠다.
아마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원 숨이 끊어질 테지.
그리고 저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백이면 백, 악귀에게 혼이 빨린 피해자들뿐이다.
‘……천위야.’
자신의 동생이 악귀라 불리는 것들과 비슷한 힘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죄의 무게다.
아무리 무림에서 칼부림이 당연시되고, 생과 사가 오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라고 해도, 결국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 봐도, 혹은 사고로 죽는 것만 봐도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게 사람이다.
자신의 손으로 포로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혼조차 먹어 치우는 그 죄업을 어린 동생에게만 지우는 건…….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 죄책감에 설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그 순간.
“누이.”
“……응?”
“이쪽의 일을 맡길게. 황제 폐하랑 준비 좀 해 줘. 그리고 유 매에게 연락을 넣을 테니 곧 지원 병력이 올 거야. 부탁할게.”
“……그래.”
급하게 부탁의 말을 쏟아 낸 동생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설란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확신하고 있었나?’
황제 폐하.
무의식중에 말한 것 같지만, 설천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리고 저쪽에서 이쪽의 이야기를 들은 고 호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틀린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면.
“전원 집중!”
일단 중요한 건 이쪽이다.
“얘기는 들었죠? 지금부터 우리는 어딘가에 숨어 계실 황제 폐하를 위해 병력을 모으고 일을 준비할 겁니다. 첫 번째도 은밀함, 두 번째도 은밀함입니다.”
말을 하며, 설란은 마찬가지로 놀라 있던 우 참정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도 얼추 짐작하고 있던 것일까.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설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관리들을 몰아붙였다.
“다들 할 일을 정해 주겠네. 먼저…….”
우 참정의 협력 덕에 대충 얼버무린 설란은 얼이 빠져 있던 관리들이 설천위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일을 진행시켰다.
다만, 역시 속일 수 있는 건 설천위의 기세에 압도되어 있던 관리와 황보세가의 무인들까지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주의 묘한 눈빛에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음속 동요를 감춘 설란은 특유의 냉철함을 발휘했다.
동생이랑 붙어 다니다 보니 많이 무뎌졌던, 초생단 부단주로서의 면모를 끄집어냈다.
“연화야.”
“네. 언니.”
“같이 좀 움직이자.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봐야겠어.”
“넵!”
담담한 표정의 설란이 연화를 데리고 결계를 빠져나가고, 서서히 호흡을 잊어 가는 포로들 앞에 서 있던 운주는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패도(覇道)인가.’
설천위가 단숨에 포로들을 죽인 것.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이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본래부터 그가 가진 성질인지 아니면 고난을 겪으며 얻게 된 성질인지는 모르겠지만.
포로들의 목숨을 거둬 가는 그 일순간의 기세는 분명히 수만의 시체들 위에 세워진 황좌의 그것과 같았다.
절대 쉽사리 앉아선 안 되는, 죽음으로 완성된 힘 말이다.
* * *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군.”
혼들을 흡수하자마자 설란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서둘러 이동한 설천위는 짜증을 토해 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함정이다.]
[이건 맹으로 돌아가 전력을 끌고 가는 것이 옳다. 오존이라 불리는 자들도 불러서 움직이는 것이 맞느니라.]
[다른 자들은 몰라도, 네 아비인 북존만큼은 바로 움직일 수 있지 않느냐?]
“무리예요. 설가에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따로 전이문을 열 방법을 마련해 두지 않았어요. 가는 데만 족히 한 달은 걸립니다.”
왕복으로 두 달.
그것도 설천위가 홀로 미친 듯이 달렸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혼들의 조언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설천위는 최선을 다해 달렸다.
손휘의 말대로 명백한 함정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무리거든요. 도망치고도 남을 시간이죠.”
[으음.]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손휘가 말을 아꼈다.
설천위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위치를 옮길 수도 있으니까.
“아예 선택지가 없는 함정을 만들어 놨어요. 대체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포로들의 혼을 단숨에 집어삼켜 그 존재를 흡수한 순간,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정보.
“혈사련의 련주를 잡으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혈사련의 수장이 지금 힘의 상당수가 연옥에 봉인된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과, 그가 있는 위치가 단숨에 설천위에게 전해졌다.
마치 설천위가 금제를 풀지 않고 혼을 집어삼켜 흡수할 거란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독(毒)이 되는 기운 따위 일절 집어넣지 않고, 설천위가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도록 숨겨 둔 정보.
그 의도의 깊은 속내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언여휘는 설천위가 혈사련의 련주와 싸우기를 원하고 있다.
설천위는 한 명이라도 더 미래의 거물이 될 적을 제거하고 싶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기에, 설천위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취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천마 할배요. 슬슬 대답 좀 해 봐요.”
최근 몇 달간 조용히 있던 천마를 불러낸 설천위는 자신의 옆에 나타난 노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져 가장 먼저 마주했던 혼이자.
“이번에는 도움이 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만 삐져 있고 얘기 좀 해 봐요.”
가장 강력한 혼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잡으러 가는 건 이 세상의 최종 보스가 될 수도 있는 괴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