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8화
537화-운주 (9)
하늘이 무너진다.
그런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한 흑룡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광경은 절로 손발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내는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술사.
“흡!”
즉시 부적을 꺼낸 사내가 펼친 술법이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잠깐.
잠깐의 틈만 벌어 준다면 일단 몸을 피해서 저 거체가 다시 공세를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지만, 일단은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판단은 순간이고 실행도 순식간이었지만, 사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급하게 쥐어짠 술법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라는 점.
“커헉!”
만들어 낸 방벽을 가볍게 부수고 들이닥친 흑룡의 주둥이에 그대로 얻어맞은 사내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그 기세 그대로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돌진하던 흑룡의 주둥이는 순식간에 황보세가의 담을 무너트리고 기다란 고랑을 만들어 냈다.
“쿨럭! 하아! 하아!”
붉은 덩어리를 뱉어 낸 사내는 내장이 뒤틀린 듯한 감각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깨달았다.
‘다리가!’
아니, 다리뿐만이 아니라 양팔도 망가졌다.
아찔할 정도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극심한 통증에 사내의 얼굴엔 절망감이 차올랐다.
대체 어떻게?
관청이 있는 곳에서 황보세가까지는 성인의 걸음으로도 반 시진(약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거리다.
아무리 뛰어난 술사라고 할지라도 이만한 거리에서 이런 식의 공격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식령과 술사가 떨어질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고,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식령의 크기에도 한계란 것이 있지 않은가!
상식이 완전히 파괴된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 사내가 이를 악무는 그 순간.
[꽤나 많이 퍼져 있군.]
미묘하게 짜증이 담긴,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대기가 진동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떨리는 것 같은 거대한 힘의 움직임.
그리고.
“……미친.”
황보세가 곳곳에서 솟구치는 검은 무언가에 사내의 눈동자에는 이제 절망조차 남지 않게 됐다.
검은색 무언가에 사지 혹은 몸통이 묶여 허공에 떠오르고 있는 자들이 전원 자신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현실은 비정했다.
사내가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흑룡의 힘은 확실하게 사내와 부하들을 사로잡았다.
어느새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사지 또한 흑관에 묶였음을 인지한 사내는 결국 포기했다.
살수도 아니고, 입안에 독 같은 건 품고 다니지 않으니 자결은 이미 물 건너갔고, 설령 죽는다고 해도 이만한 술사의 손에 걸린 이상 저승으로도 편히 갈 순 없으리라.
완벽한 절망 속에 빠진 사내의 몸은 이윽고 서서히 어딘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 * *
“이, 이게 대체?”
설천위에게서 솟구친 검은색 무언가가 흑룡이었음을 깨닫고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한 운주가 말을 더듬었지만, 형왕은 그걸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게 성장했군.’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친선전.
그때 설천위가 흑룡을 불러내는 것을 보긴 했지만, 지금 보는 것과는 격이 완전 달랐다.
크기도, 위압감도 그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다.
그때가 다 자라지 못한 미숙한 용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장성해서 완성된 용 같았으니까.
“으으으, 지독해.”
운주와 형왕은 물론 다른 이들도 충격에 빠져 몸을 덜덜 떠는 사이, 비틀거리며 일어난 연화가 툭툭 엉덩이를 털었다.
주독(呪毒)을 흡수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앉아서 명상을 했더니 흙이 다 묻었다.
“음? 뭐 해요?”
그래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연화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아, 저거 부르는 거 오랜만에 보네…….”
예전에 막 배우기 시작할 때, 한번 보라고 영역에서 보여 준 적은 있었는데.
실전에서 쓰는 건 처음 보는데…….
듣자 하니, 첫 임무에서였나? 아무튼 그 임무에서 저 용이 날뛰었다가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내고 봉인했다던데.
……황보세가에 덤터기를 씌울 생각으로 꺼낸 건가?
단주님 정도의 능력이면 굳이 안 꺼내도 될 텐데, 왜?
연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사이, 흑룡의 몸체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뻗어 나갔던 몸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화야.”
“넴.”
설천위의 부름에 즉각 대답한 연화는 기이한 감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뭔가요?”
“언여휘의 영력. 여기에 있는 놈들이 어디 출신인지 알려 주는 호패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걸 왜 당신이 내뿜느냐고요?
설천위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연화는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깨달았다.
“……관청에도 몇 놈 있네요.”
“여전히 눈치는 빨라서 좋아.”
연화의 대답에 히죽 웃은 설천위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턱짓했다.
“가서 잡아 와. 급하면 죽여도 상관은 없다만, 사로잡을 건 확실하게 사로잡아 오도록.”
“네.”
설천위의 지시에 장난기 없이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그대로 몸을 돌려 관청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설천위의 눈빛을 받은 설란이 따라붙었고, 운주가 움직이자 그를 따라 형왕까지 움직였다.
그렇게 네 사람이 관청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본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황보세가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생포된 채 끌려오는 적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이냐, 언여휘?”
대체 왜 부하들에게 위치를 알 수 있는 장치를 해 둔 거냐.
* * *
설천위의 흑룡이 몸을 눕혀서 생겨난 공터.
흑룡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설천위는 중요한 인물들만을 모아 놨다.
황보세가의 무인, 우 참정과 몇몇 관리……는 사실 중요 인물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사건의 당사자이기에 그냥 뒀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황보중이지만, 아직도 아들내미와 얼음 속에서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테니 그쪽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핵심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황보세가와 관에 세작들이 있었습니다.”
“……으음.”
“통탄할 일이로다…….”
“어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에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사내를 일으켰다.
가볍게 떠오른 검은 고리에 걸려 허공에 들린 사내.
그 모습을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봤지만, 설천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황보세가의 자금줄을 과하게 끊고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반대로 황보세가가 계속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도 전부 이놈들이 한 짓이라 이거죠.”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실 또한 협력했고요.”
“으음…….”
“그럴 수가…….”
이 상황에서 가장 핵심은 황실이다.
애초에 우 참정의 밑에 있는 관리들 중 세작이 섞여서 우 참정의 지시를 거짓되게 전달한다고 해도, 황실이 계속 제대로 거래를 이어 나가면 이상함을 눈치채는 이들이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다.
즉, 이 지역의 관리와 황보세가 전부를 속이려면 황실의 협력이 필수여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가짜 요청서를 황실의 관리가 받아들여서 일 처리를 했을 수도 있지 않소?”
“황보세가와 황실의 거래는 서로에게 큰 이익이 남는 거래죠. 웬만한 일이 없는 한, 황실에서 먼저 연을 끊을 이유가 없습니다.”
황보세가는 무술 교관, 장수 등으로 황실에서 꽤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안이다.
무턱대고 교역을 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온갖 정치가 엮여 있는 황실에서의 일 처리가 그리 단순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황실에서 일어난 난은 성공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아직 전국으로 퍼져 있지 않다는 것은…….”
“……정당한 계승권이 없는 집단의 역천.”
“정답.”
황실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이가 황제가 되기 위해 난을 일으킨 거라면, 난에 성공한 순간 동네방네 자랑하는 게 정상이다.
왜냐고?
그래야 아군과 적군을 빠르게 구별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난을 일으킨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려고 전략적으로 숨긴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병력 이동이 생긴다.
그런데, 현재 황궁에서는 그런 기미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즉, 다른 목적을 가지고 숨기고 있고 또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선택지야 몇 가지 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황제 폐하, 아 그러니까 지금 어디에 숨어 계실 황제 폐하를 말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분을 배신하고 난을 성공시킨 역도들에게 붙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이 말입니다.”
“헛소리! 지금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오!”
“내 잠자코 들어 줄 수가 없는 모욕이군!”
난리를 치는 관리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히죽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럼 다행이고. 내가 굳이 당신들의 심장을 터트릴 필요는 없을 테니, 서로 좋은 이야기지.”
“그, 그게 무, 무슨 소, 소리냐!”
“시, 심장을 터, 터, 터트린다니!”
“술법으로 여기에서 한참 떨어진 황보세가에 있는 세작들까지 잡아오는데, 배신자들의 심장을 터트리는 술법을 심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지.”
자고로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총을 든 적이 아니라 비수를 쥔 아군이라고 했다.
지금 상황에서 배신자가 나와서 황궁 쪽으로 붙고 안 좋은 소문이 나는 건 치명적이다.
황제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세력을 모아 다시 황궁을 찬탈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으니까.
초반의 이점을 위한 약간의 정보 통제 정도는 해 주는 게 맞겠지.
“배신했다? 그러면…….”
“커헉!”
설천위의 손끝이 쓰러져 있던 포로 중 하나에게 향하자, 그는 몸을 비틀다가 이내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거친 호흡과 함께 절명.
“이렇게 되는 거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관리들을 보며 피식 웃어 준 설천위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우 참정을 바라봤다.
설란의 평가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더니, 한 뚝심 하네.
“우 참정, 그럼 부탁드립니다. 관에 숨어 있던 세작들은 잡았으나, 황궁에서 오는 이들 속에도 반드시 세작들이 끼어 있을 테니 조심하십시오.”
“알겠소.”
“그리고 황보세가와의 일은 이 자리에서 끝내되, 공표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또한 알겠소.”
“명쾌하시군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 정도로 사리 분별은 가능하오.”
담담한 우 참정의 대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이내 쓰러진 포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자, 그럼 내가 궁금한 게 많은데, 우리 좀 대화를 해 볼까?”
* * *
“흐흥, 흐흥.”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산 정상에 자리 잡은 작은 정자.
그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비후는 의자에 앉아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는 언여휘를 보며 말했다.
비후가 따라 준 술을 홀짝이며 흥에 겨워하던 언여휘는 그런 비후의 말에 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겁고말고. 천위, 그 녀석 진짜 괴물이 다 됐어.”
“처음 만났을 때도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 그래도 고작 몇 년 사이에 사존을 그렇게 풀어 줄 능력을 갖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완전 괴물이 됐지. 파편을 심은 사존을 대체 어떻게 진정시킨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네.”
비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언여휘는 이내 밝게 웃으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천위가 전이문을 쓰는 걸 확인했어! 분명 화산파에 있던 천위가 뜬금없이 황보세가에 나타났거든.”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나.”
“뭐, 그렇지.”
비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히히 웃으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비후, 오랜만에 외출이나 할까?”
“인형과 함께 돌아다니는 취미는 없다만.”
“에이, 그러지 말고. 진짜 재미있는 볼거리가 생길 거야. 응? 난 꼭 보러 갈 거니까 비후도 같이 가자.”
특유의 히히 웃는 웃음이 아닌, 비릿한 미소로 말을 끝맺는 언여휘의 모습에 비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이번엔 따르도록 하지. 그래서? 볼거리라는 게 뭔가?”
볼거리가 무어냐.
그 질문에 언여휘는 다시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종말의 파멸 혹은 희망의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