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7화
536화-운주 (8)
모두가 정지한 공간에 홀로 서서 위압적인 기세로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압박하고 있는 설천위.
몇몇 병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해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다, 단주님!”
그것을 눈치챈 연화가 슬며시 다가와 설천위의 소매를 당겼다.
“이러다가 사람들 죽겠어요!”
벌벌 떨면서도 연화가 설천위를 말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볼 수 있었으니까.
설천위가 이 공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힘이 무려 영력이라는 것을 그녀는 보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남들은 단순히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는 정도의 감상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의 사람들한테까지 이러는 건……!’
연화가 보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설천위가 뿜어낸 영력은 이 공간에서 설천위가 아군이라 인식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혼을 움켜쥐고 있었다.
반항하는 순간, 당장에라도 쥐어짜서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듯.
“넌 여전히 무르구나.”
그런 연화의 반응에 피식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는 소매를 잡고 있는 연화의 손을 털어 내고 동시에 힘을 거둬들였다.
“쓰러진 자들을 이쪽으로 모으도록.”
“으, 예!”
겨우 막혔던 숨통이 뚫리자,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별다른 반항 없이 설천위의 지시에 따랐다.
애초에 정신이 번쩍 들고 나니, 현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가주랑 같이 온 인물이고, 고작 손짓 한 번에 그 가주를 소가주와 함께 가둬 버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허겁지겁 쓰러진 이들을 모아서 설천위의 앞에 눕혀 놓는 사이, 그에게 다가간 우 참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 참정, 황기택이라고 하오.”
“흑룡단주, 설천위입니다.”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지그시 우 참정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연화.”
“네.”
“결계 범위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포함하는 수준으로.”
“예?”
“목적은 적의 침입과 혹시 모를 간자의 탈출 방지다.”
“예에?”
아니, 이 인간이.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몇인 줄 알고……!
백 장(약 300m) 가까이 되는 범위로 결계를 펼치란 소린데, 그게 뚝딱하고 되면……!
“괴연천식(傀然天食)의 사용을 허락해 주마.”
“아, 그럼 되죠.”
난 또…….
고개를 끄덕인 연화는 즉시 영력을 풀어냈다.
그녀는 술사의 입문을 독문 술법으로 시작했기에 본인의 독문 술법인 괴연천식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 역량이 크게 갈렸다.
이만한 범위에 결계를 단숨에 치는 일은 순수하게 술법만을 이용하는 거라면 무리였지만.
“시작합니다요.”
괴연천식의 사용을 전제로 한다면, 아무런 무리도 없이 가능했다.
단숨에 그녀를 휘감은 회색의 연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괴연천식은 혼을 땔감으로 삼아 불꽃을 피우는 힘.
악귀를 먹는 것으로 하늘을 집어삼키는 역천(逆天)조차 넘볼 수 있는 힘.
순식간에 결계를 만들어 낸 연화는 괴연천식의 힘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굳이 제가 괴연천식까지 써야 돼요?”
괴연천식은 좋은 능력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혼을 땔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 자원에 한계가 있는 힘이다.
때문에 설천위는 함께 있다면 보통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연화에게 넘기지 않았고, 연화가 괴연천식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만을 시켰다.
그래서 연화도 결계를 펼치라는 말에 당황했던 것이고.
“조금 정도는 낭비해도 괜찮을 거다.”
“왜요?”
“곧 넉넉하게 먹어 치울 수 있을 테니까.”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한 설천위는 그대로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훑어봤다.
독에 당한 이들이 신음하며 몸을 비트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은 꽤 걸릴 것 같고.’
혹한진(酷寒鎭) 안에서 발버둥치는 두 부자의 기척을 보아하니 진을 뚫고 나오려면 한세월은 걸릴 것 같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불존과 사존마저도 빠져나오는 데 한 시진이나 걸린 술법이니까.
두 사람의 역량을 고려하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일단, 황보 부자에겐 신경을 끄기로 작정한 설천위는 황보세가의 인물들을 훑어보다가 한 사람을 골랐다.
“너, 이리로 와.”
“나, 나 말이오?”
“그래, 너. 딱 봐도 부관쯤 되어 보이는데, 설명 좀 듣자.”
황보세가의 무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다가오자,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우 참정도 불렀다.
“우 참정 대인도 오시죠. 아무래도 양쪽의 사정을 다 들어 봐야 할 것 같으니까.”
* * *
“그런……! 말도 안 되는 음해다!”
“그럼 우리가 거짓을 말한다는 거요?!”
서로의 상황을 설천위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양쪽 다 진실이니까 싸우지들 말죠.”
설천위는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 손을 넣어서 심리적인 벽을 만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뭐, 양쪽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죠.”
“……으음.”
설천위의 말에 바로 답에 도달한 우 참정은 침음성을 흘렸고, 황보세가의 무인은 이해를 못 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황보세가가 우둔한 건 편견이라면서?”
“……사람마다 차이는 있는 거니까 황보세가라고 우둔하다는 것은 편견이 맞지.”
황보세가의 사람도 똑똑할 수 있다, 뭐 그런 건가?
시선의 차이?
설란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쓰러져 있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에게 다가갔다.
“영력에 의한 중독, 뭐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저주의 일종이지.”
통상적인 저주와는 다른, 정말 중독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무슨 상관인가.
“연화야.”
“네.”
“한 명 치료해 봐.”
“먹어 치워요?”
“그럼 너한테 다른 걸 시키겠니?”
“우훗!”
“칭찬 아니다.”
얘는 처음에는 경계심 강한 고양이처럼 굴더니, 점점 푼수가 되어 가는 것 같네.
우쭐거리는 연화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던 설천위의 시선에 문득 한 사람이 들어왔다.
“독이라면 위험한 것 아닌지…….”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로 연화를 보고 있는 황제, 아니 운주.
살짝살짝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원망의 기색도 좀 느껴지는데…….
운주의 시선에 뻘쭘해진 설천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연화가 치료를 잘하면 다 짬때리려고 했는데, 한 명만 경험 삼아 시키고 나머지는 내가 해야겠다…….
아니, 그런데 왜 연화를 바라보는 황제 놈 눈깔이 저렇지?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높은 가문의 자제 같은데, 연화에게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
설란의 전음에 눈을 감은 설천위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얘는 꼬셔도 저런 사람을…….’
흑룡단에서는 부단주이고 또 어린애 취급을 받아서 그런 요소가 생길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동년배를 만나면 너도 훌륭한 매력의 소유자였나 보구나.
무인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손을 뻗는 연화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고민하다가 답이 안 나오니까 일단 부딪쳐 보자고 생각하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건지…….
“으음!”
쓰러진 무인에게서 주독(呪毒)을 빼내던 연화는 신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독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으음……. 될, 것 같기도……?”
빨아들인 주독을 괴연천식의 힘으로 먹어 치우는 데 얼추 성공한 연화는 그대로 명상에 잠겼다.
재능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단숨에 모든 걸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않고도 가능하거나.
전자는 머리를 쓰는 쪽으로 천재인 경우가 많고, 후자는 몸을 쓰는 쪽으로 천재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다수의 경우, 후자의 천재는 가르치는 데 서툴다.
대표적인 예가 서하영의 아버지인 권왕, 서청진이다.
그냥 하면 되는데, 왜 못 해?
이런 말이 기본적으로 튀어나오는 인간들.
그리고 연화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에 속하는 천재다.
실전에 강한 천재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든 독을 꾸역꾸역 흡수해 내고 있는 연화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고.
[허허, 참 기대되는 인재야.]
손휘는 감탄을 터트렸다.
자신도 천재였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손휘가 뛰어난 경지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나이를 상당히 많이 먹은 뒤였으니까.
지금의 연화는 워낙 독특한 독문 술법을 운용하기에 판단하기도 힘들어서 같은 수준에 언제쯤 올랐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쟤는 가만히 놔두면 되겠네.”
[알아서 중화하고 흡수하겠지. 참 뛰어난 인재다.]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손휘는 이내 설천위가 손을 뻗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
설천위의 손에서 빠져나온 영력이 황보세가 무인들의 몸에 닿는 순간부터 그 몸에 깃든 영력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자, 손휘는 헛숨을 토해 냈다.
재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고, 그중 하나를 갖춘 이들을 천재라고 칭한다.
그리고.
[괴물 놈…….]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자들은 괴물이라고 칭한다.
연화가 주독을 중화하는 것을 본 것만으로 그 특성을 파악하고 해제하기 시작한 설천위의 재능에 손휘는 혀를 내둘렀다.
감탄하는 손휘를 뒤로한 채, 빠르게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치료한 설천위는 이젠 완전히 뽑아낸 주독을 가지고 끙끙대고 있는 연화의 주위로 가볍게 흑관을 펼쳤다.
“흐음?”
언여휘랑 너무 자주 만나서 그런가, 주독의 중화를 너무 쉽게 끝낸 설천위는 묘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짜증 나네.”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영력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설천위의 몸에서 칠흑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전이문이라.”
황보세가의 외당.
객의 신분으로 머물고 있던 사내는 부하의 보고에 눈을 감았다.
‘괴물이로군.’
조금 전, 멀리 관청 방향에서 느껴졌던 영력의 흔들림은 범상치 않았다.
상당한 수준의 술법이 펼쳐진 증거.
거기다 황보세가의 무인들과 관의 병력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그들 전부를 감싸는 결계까지.
멀리서 염탐하던 부하들의 보고를 생각하면, 그 ‘흑룡단주’가 직접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그런 기색이 보이니 주의하라는 정보를 받긴 했지만…….
“……정보가 사실이라면 몇 번이나 사용했다는 소리인데.”
그게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
술사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가 사용할 수 있는 축지(縮地)만 해도 전이의 하위 기술이지만 막대한 영력을 소모해 제물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엄청난 장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는 막대한 제물이 필수로 여겨질 정도로 연비가 박살 난 기술이 바로 공간을 뛰어넘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의 정점 중 하나인 전이문을 타인을 데리고 펼친다라…….
둘 중 하나다.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고 여기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영력을 품고 있거나,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말도 안 되는 효율의 개선을 이뤄 냈거나.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고.
“역시, 인간으로 간주하고 계획을 실행해선 안 되겠군.”
최소 재(災)급의 악귀, 혹은 멸(滅) 이상의 괴물로 보고 움직이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황보세가는 버린다.”
계획이란 것은 성공 가능성이 1푼이라도 보일 때 성립되는 것이다.
백 번 중에 한 번 성공할 수 있더라도,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한 것이 계획이다.
성공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계획이 아니다.
그러니 물러난다.
건질 수 있는 것만이라도 건져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라면 이곳에 굳이 버티고 있다가 소중한 전력을 날릴 이유가 없었다.
즉시 퇴각을 결정한 사내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고 본인도 최소한의 뒤처리만을 하고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미친.”
오랜만에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으며, 사내는 어깨에 걸쳤던 짐을 떨어트렸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도시의 상공.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몸에 두른 흑룡이 그 섬뜩한 금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혼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물어뜯어.]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